북코스모스

15. 흔적

쉽게 끝나리라 믿었던 전쟁은 그 후로 이 년을 더 질질 끌었다. 중국공산군을 인식 못한 것이 연합군의 실수였다. 팽덕회가 이끄는 중국공산군은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에 이미 만주에 45만이나 되는 병력을 이동시켜 놓고 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이 평양을 거쳐서 위로 올라가자, 갑자기 물밀듯이 몰려 내려왔다. 소위 인해전술이라고 하는 두고두고 유명해지는 전술인데, 파도처럼 밀려 내려오는 공산군을 당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낮에는 산속으로 숨어들어서 움직이지 않고 밤이면 나타나서 조여오는 전술도 연합군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전쟁은 지리하게 끌려가기 시작했고 1953년 여름이 되어서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끝이 난 것도 아니었다. 정전이었다.
나는 그사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모국이지만, 이제는 내 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내가 원하는 건 혜석과 함께했던 장소들이었다.
물론 가족을 만났다. 나이가 드니 가족이 그리워졌다기보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갑자기 가족이 그리워졌다. 외로워서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세상에서 외롭고 힘들었다. 내 인생은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라는 걸 그녀의 죽음이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잉여 인간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조차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인간이다.
그래도 외롭다. 쓸모없는 인간도 외로움은 느낀다.

세상은 재미있다. 이제는 완전히 몰락했어야 할 우리 가문은 전혀 기울지 않았다. 고생한 흔적들은 있지만, 다른 상류층처럼 우리 가족도 생생했다. 한국전쟁은 기회가 되어주어서 상류층들은 아주 잠깐 사이에 또다시 상류층이 되었다. 아버지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동생은 미군들과 군납 일을 하면서 지냈다. 이제는 권력보다 돈이라고 떠드는 동생이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무슨 짓을 해서든 온 가족을 지키는 동생이 어쩌면 나처럼 휴머니즘이나 찾는 인간보다는 훨씬 쓸모가 있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지켜내니까 말이다.
게다가 동생은 이제 미국무성의 공무원이 된 나를 호재라도 만난 듯이 반겼다. 일본인은 누구나 미국인들과 연줄이 닿아야만 돈을 벌었다. 나는 동생의 일을 도와서 -혹시라도 혜석의 그림이라도 남았다면 구할 요량으로- 돈을 좀 만든 후에 다시 한국으로 건너갔다.

서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몰골이었다.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수많은 천막과 얼기설기 지어진 종이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수많은 부상한 군인들과 민간인들 외에 엄청난 고아들이 거리를 헤맸다. 미군은 구호물자를 실어 날랐지만, 언제나 식량도 약품도 역부족이었다. 외국인들이 볼 때는 아시아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민족 간의 전쟁 같지만, 사실은 3차 세계대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무려 300만이 죽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가지고 있던 번호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물론, 떠나기 전에도 해보았지만- 통화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번호의 주인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이름을 알고 전화번호로 일하던 건물을 알아내서 겨우 전화번호의 주인을 찾아낸 건 보름이 지난 후였다. 경찰력도 행정력도 거의 완전히 회복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여섯 달 만에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1월의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한강이 꽁꽁 언 추운 날이었다. 나는 어렵게 찾은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소 선생은 넉넉하고 호인으로 보였다. 젊어서는 아주 미남이었을 것 같았다. 일찍부터 변호사를 해와서인지 행동이 점잖고 세련되어 보였다. 우리는 무교동의 청주집에서 창밖의 살풍경한 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청주를 마셨다.
“사토씨와 내가 교대해서 그녀와 친구가 되어주었군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다지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 혜석씨 이야기로는 다르던데요?”
“저야말로 소선생님께서 진정한 친구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소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역시 그 부분에서는 변변치 못합니다.”
“최린을 고소해서 많은 돈을 받아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만… 그게 옳은 일이었나를 가끔 생각하고는 합니다.”
소 선생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시 최린은 참의에까지 올라간 거물이었죠. 아마 당시 친일파 중에서 손꼽는 명사였을 겁니다. 당연히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재판을 걸면 돈을 내놓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혜석이 많이 어려웠나 보죠? 그렇게까지…”
“저도 처음에는 혜석씨의 명예를 생각해서 말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혜석씨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김우영이라는 작자는 당시에 전라도에서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땡전 한 푼 내놓지 않았습니다. 혜석씨는 그야말로 먹고살기도 어려워졌지요.”
“그래도 제전에도 입선하고 전시회도 열고 그랬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랬죠. 그러면 뭐합니까? 제전에 당선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선작을 전시하는 것조차 조선의 평론가나 언론이 모욕을 주고 손가락질을 해대는데… 화가의 그림을 보고 평을 하는 게 아니라 집단으로 괴롭히려고 마음을 먹은 거죠.”
“꼭 그렇게까지 할 이유라도 있었던 겁니까?”
“뛰어난 화가가 여자인 건 특별한 일이라고 해서 칭송을 했지만, 그 여자가 고분고분한 일반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과 사회의 통념에 반하는 행동을 일삼으니까 눈엣가시가 되어버린 거죠.”
소 선생이 술잔을 빙빙 돌리면서 결론처럼 말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혜석씨는 사회로부터 매장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 재판이 결국 그녀를 몰아세운 꼴이 되었군요.”
“결정적인 한 방은 이미 그 전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소 선생은 나를 쳐다보면서 술잔을 들어 보였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조는 사치다.”
멋진 말이기도 하고, 적나라한 말이기도 했다. 그게 옳든 그르든, 그 말로 인해서 혜석은 정말로 치명타를 맞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재미있다고 하하 웃어 줄 조선의 남자들은 없으니까. 아니, 이 세상의 남자들은 없으니까. 아직 이 세상에는.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여자는 아니죠. 뭐니 뭐니 해도 혜석씨가 가장 큰 충격을 받고 몸도 망가지게 된 건 금강산에 집을 얻어서 지내던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제전에 낼 그림들을 열심히 그렸는데 집에 불이 나서 그 그림들이 몽땅 타버렸습니다. 그 충격으로 병이 생긴 듯합니다. 손이 떨리는 병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사실 당시에는 다들 심각한 걸 몰랐습니다. 아무도 몰랐죠. 친하다고 하는 나도 몰랐으니까요. 아마 가족들도 잘 몰랐을 겁니다.”
“그녀 자신도 몰랐습니까?”
“당연히 알았겠지요. 자기 몸을 자기가 모르겠습니까? 게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고 한동안 붓을 들지도 못했는데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주변에서 몰랐을까요?”
“혜석씨 자체가 감춘 겁니다. 그녀의 자존심이 그녀를 감추게 한 거죠. 세상에 불쌍하게 보이기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프지 않은 척 지낸 겁니다.”
소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면 가슴만 아픈 일인데… 그만합시다.”

소 선생은 길게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혜석의 죽음은 그에게 많은 상처가 된 듯 했다.
그는 유작을 갖고 싶어 하는 나에게 자신이 변호사 비용 대신 받았다는 그림을 넘겨주지 않았다. 대신, 혜석의 유작을 많이 가졌다고 소문이 난 한 사람을 소개했다. 그 사람은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고, 혜석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전쟁 통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림이니까 챙겨두자는 생각으로 헐값에 산 사람이라고 했다. 소 선생의 말로는 그 남자가 절대로 혜석의 그림에 대한 가치를 알 리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그림들이 헐값에 나뒹군 이유는 혜석이 죽은 후, 그녀의 가족들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다가 전쟁으로 인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까지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고 일어나 보니 갑자기 서울에 공산군이 쳐들어와 있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고 한다. 특히 경석은 천정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하고, 잡혔다가 처형 직전에 탈출하기까지 한 상태여서 그림에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의 연락처를 받아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녀의 유작들을 잔뜩 챙긴 사람은 부산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부산에서 내가 먼저 손을 썼다면 전부 챙길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쨌거나 더 늦기 전에 유작들이라도 챙기고 싶어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차창에 기대어 내가 하는 짓들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해서 이렇게 뒤늦은 사랑을 하는 것이냐. 이제 와서 이렇게 헤매는 것이 그녀에게나 나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그녀의 유작들을 챙긴들 이제는 떠나고 없는 그녀에게 세상이 저지른 폭행에 대한 대가라도 된다는 것이냐.
그래도 찾고 싶은 심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흔적만이라도 찾아서 간직하고 싶었다. 그것이 마치 그녀에 대한 내 속죄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아까워서라고 해두자.

부산에 도착해서 다시 또 관청들을 드나들며 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차디찬 바람이 부는 부산 바닥을 한참이나 헤매고 난 후에야, 송도해수욕장 근처의 언덕 위에 자리한 그 남자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한옥 한 채가 그 집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서 집이 없는 데다가, 우거진 숲도 아니고, 앙상한 나무들만 몇 그루 심어져 있어 무척 쓸쓸해 보였다.
그 남자는 일하는 사람 서너 명을 두고 혼자 사는 듯했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고 다들 일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백발이 보기 좋은 노인이었다. 한복이 잘 어울리고 손에 들고 있는 곰방대도 근사하게 어울렸다. 노인은 나를 사랑채로 들였다.
“흠, 외국 양반. 그 그림들이 왜 탐이 나시우?”
나는 일본 사람이라고 하면 반감이 생길 수도 있어서 미국인임을 강조한 터였다.
“내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 그림 주인이 당신 친구라?”
“그렇습니다.”
“소 변호사가 이야기하기로는 여자라던데?”
“여자 맞습니다. 하지만…”
“흠, 난 뭐 사실 그 그림들에 대해서 잘 모르겠소. 유명했던 화가라고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었고 뭐, 여자가 그린 그림을 대단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고. 중요한 건 내가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는 거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냥 헐값에 누가 판다기에 사두었지. 필요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귀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오. 뭐, 보관한다 생각하고 샀지.”
“누구한테서?”
“일본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왜놈 손에 있는 것도 싫고 해서 말이야. 어쨌거나 우리 조선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이니까.”
나는 속이 뜨끔했다. 내가 일본 사람이라는 걸 알면 팔지 않을 수도 있어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림들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그야 보아야지. 보아야 가져가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오?”
노인은 몸을 일으키면서 밖에 대고 소리쳤다.
“그림들 좀 가져오너라.”
일하는 사람들이 창고를 향해 달려가는 게 보였다. 곧 창고 문이 열리고 먼지가 뿌옇게 쌓인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참. 그림 말고도 뭐 원고뭉치가 있던데, 그것도 한번 보시려오?”
나는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워, 워, 원고…”
“보시오. 필요하면 드리리다.”
나는 꾸벅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혔다. 아직 얼마를 달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온갖 사기질을 해서라도 돈을 만들 것이다. 내 손에 넘어오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림들이 줄줄이 놓여지자, 나는 울컥하는 감정에 그림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혼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그림들을 보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여기 이거 말이오.”
노인의 음성이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멀거니 돌아보니, 색 바랜 보라색 보따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나는 보따리를 향해 달려갔다. 원고와 신문 기사 따위를 잔뜩 모아놓은 보따리였다. 그게 전부 혜석이 남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의 유작이 몇 장이라도 담겨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요. 내가 이것들을 전부 해방 직전에 샀는데, 사실 맡다시피 산 거지. 그때는 왜놈들이 식겁을 하고 쫓겨 갈 때니까 뭐, 안 사주면 가져가지도 못했을 거요.”
“그래도 전쟁 통에 잘 보관하셨습니다.”
“부산이니까.”
노인이 볼을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여기까진 빨갱이 놈들이 못 왔거든.”
“아, 그렇지요.”
“미군이라고 안 했소?”
“군인은 아닙니다. 국무성에 소속된 공무원이기는 하지만요.”
“아, 그렇다면 정말 고맙수. 챙겨 가시구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드려야 할지…”
노인이 피식 웃었다.
“주고 싶은 대로 주시구려.”
“예?”
“아, 보관료라 생각하고 창고 사용료나 몇 푼 주고 가라는 말이외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러나 헐값에 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준비해 놓은 돈을 모두 내놓았다.
“준비된 것이 이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이 생길지는 몰라서 그만…”
“어, 이게 그렇게 귀한 건가?”
“저한테는…”
“친구라면서?”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조선인이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 사람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허허, 그렇구만. 덕분에 내가 횡재했수.”
노인은 껄껄 웃었다.

나는 부산항의 사무실 하나를 얻어서 그림들을 죄다 옮겨놓고 거기서 반출준비를 했다. 어쨌거나 그림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반출허가가 나와야만 가져갈 수 있었다. 물론 문화재로 지정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쉽게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누구 그림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호텔에 묵고 있었지만 차마 호텔로 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석유난로 하나에 의지해 매일을 지내면서 그녀의 그림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림들은 이제까지 발표되지 않은 습작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발표가 되었던 그림들도 있었다. 공통점은 어느 것이나 그녀의 말년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그림들은 멋지게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무섭게 그려졌다. 선이든 색이든 너무 강해서 그 힘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완전히 굳은 유채 위에 다시 덧입힌 흔적들이 그림마다 가득했다. 이런 경우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렸다는 걸 말해준다.
나는 그림들을 내내 바라보면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추운데도 불구하고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걸 느낄 만큼 움직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그녀의 그림들과 뒹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남긴 원고뭉치는 아직 풀어보지 않았다. 너무 일찍 열어보기에는 아까운 마음이었다. 충분히 내 손 안에 있는 것을 즐기고 싶었다. 우선 그림들부터 질리도록 음미하고 나서 열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조바심을 충분히 즐기고 난 후에 나는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혜석의 글이 실린 잡지들과 신문조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직접 쓴 육필원고들이 몇 권 보였다. 낡고 빛이 바랜 원고뭉치들은 낯익은 혜석의 글씨들이 확실했다. 나는 그녀의 글들이 전부 발표된 것인지 미처 발표하지 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의 육필원고들이 내 손에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세상에 이 글들을 내놓아서 다시금 그녀를 세상에 발가벗겨 내놓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나는 원고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글들에서 내가 읽지 못한 말년의 글들이 많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사이에 나는 여기저기서 잡지와 신문을 구해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하나만은 전혀 읽은 적도 없고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었다.
김명애. 그게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고의 제목에 김명애라고 쓰여 있었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일까. 원고를 들춰보니 완성된 원고는 아니었다. 형식도 혜석이 기존에 쓰던 것이 아니고, 여러 번 덧붙이거나 지워진 글자들이 많았다.
나는 원고를 들고 창가로 가서 난로를 끼고 앉았다. 그리고 이 원고가 소설이 아니라, 그녀의 일기인 것을 알았다. 왜 그녀가 자신을 김명애라고 칭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글 속의 그녀는 김명애가 아니라 자신이었고,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어느 부분은 산문이기도 하고 어느 부분은 일기체였다. 아주 간혹, 대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는 금강산을 나와 아베와 함께 도쿄로 가서 최린을 다시 만나던 때부터 쓰기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 시간까지 쓰다가 중단되어버린 것을 알았다. 시작 문장은 겨울에 시작된 것이었고, 그녀의 마지막 문장도 역시 겨울에 끝이 났다.

도쿄 역사를 나서는 때에 비가 나리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