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이 밝았다. 두진은 우재준과 함께 팀원들을 데리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허탈하기 짝이 없는 하룻밤이었다. 헬기까지 동원해서 완벽하게 포위망을 구축했는데, 마지막에 한순간의 실수로 그만 놓쳐버렸다.
산에서 어린이대공원 방향으로 내려온 것이 확실했다. 그 부분에 경찰 차량들이 줄줄이 있고 특공대 차량까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경찰특공대 복장으로 스며들어서 차량을 탈취하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어이가 없는 대실패다.
그리고 실패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거의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주의를 도로로 돌리자, 거기서 차량 하나가 사라진 걸, 차량에 속한 팀원들의 발견으로 알게 되었다.
302 호와 312 호에 과학수사반이 들어가서 샅샅이 스캔하고 있었다. 302 호에는 예상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지문도 나오지 않았다.
312 호에서는 대량으로 증거물들이 나왔다. 미쳐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들과 여러 가지 서류들이 나왔다. 말하자면 당장 쓸어 담을 수 있는 것들만 담아서 사라진 것이다.
“전부 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챙겨.”
두진은 영란에게 서류를 모두 챙기도록 했다. 보통의 증거들은 서류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 추적할 빌미도 서류에 있다. 무슨 서류든, 그게 가리봉동에서 처음 프리랜서를 몰아보았듯이 그렇게 실마리를 주는 법이다.
“검사님. 이거 좀 보세요.”
영란이 서류 하나를 가지고 왔다. 크게 흘려 쓴 메모였다.
‘4. MAY. 14:30. KAL’
무언가를 보고 적은 메모였다. 3 월 4 일 오후 2 시 30 분, 대한항공이라는 뜻이다. 비행기 시간이다.
“뭘 본 거지? 이 시간에 출발하는 비행기 체크해 봐.”
영란이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이 아니었다. 국적기는 대부분 오전에 출발한다. 오후에 출발하는 국적기는 드물다. 도착하는 비행기 시간을 체크하자, 중국의 하이난에서 오는 비행기였다.
“이게 뭐지?”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뜻 같아요.”
“탑승객 명단 확인해 봐.”
“아직 명단은 알 수 없지만, 예약자들은 알 수 있어요.”
“전부 뽑아.”
그때, 우재준이 팔을 잡아끌었다. 두진은 우재준을 따라서 복도 한쪽 끝으로 갔다. 분주하게 지나가는 수사관들이 흘끗흘끗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왜요?”
“그 비행기에 누가 탈 건지 압니다.”
“누구…?”
“전직 VIP.”
“그래요?”
“우리는 주요 인물들의 동선을 알고 있죠. 평소에도 아는 게 당연하지만, 특히 요즘은 바짝 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리랜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최영석 라인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윗선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 부분에 정보가 있으십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교류가 있었던 건 사실이죠.”
“서로 다른 계파로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계파가 달라 보이는 건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마치 서로 경쟁해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경쟁자로 보이게 해놓고 실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인 거죠.”
“뭉치는 게 아니라, 서로 반목해서…?”
“그렇죠. 그래야 인기가 떨어지거나, 큰 과오가 생겨서 지지층이 흔들리게 되어도 전체적으로 집단이 지지층을 잃는 일은 없으니까요.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고 하면서 나서는 거죠.”
“그럴듯한 추론입니다.”
“어쨌든 최영석이 죽기 전에 프리랜서에게 무언가 밝힌 듯합니다. 최영석이 TC라는 암호명이 누구인가는 자신도 모르니까 밝히지 못했어도 자기 위에 누가 있는지는 밝혔겠지요.”
“오유호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가를…?”
“그게 TC인데… 그 TC가 전 VIP라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적어도 그 근처겠군요.”
“그럴 겁니다. 이건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어느 집단에 의한 자본의 소유라고 보아야겠지요.”
“항간의 소문이 맞다면…”
우재준이 싱긋 웃었다.
“우리는 아닙니다. 장담할 수 있어요.”
“연락을 취해야 할까요?”
“연락할 수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시면 전화를 끊어두십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연락해야지요.”
“그런 걸 싫어하시고, 또 연락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공항으로라도 나가야겠군요.”
“글쎄… 공항에서는 시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테러를 시도한다면 시내에서 하겠죠. 공항이나, 그 근처 도로는 자신이 빠져나갈 길이 확보되지 않으니까요. 거긴 그야말로 연륙교로 이루어진 독립된 공간 아닙니까?”
“그렇다면 확실히 시내로 들어선 다음에 공격하겠네요.”
“사흘 후에 귀국이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됩니다.”

먼저 공항에 나갈 팀과 시내에서 바통을 이어받을 팀을 나누었다. 공항의 특성상, 함부로 몰려들어서는 안 되니까 조용히 체포조와 경호조를 깔기로 했다. 저격수를 배치할까 생각하다가, 만일의 경우 사고가 날 수도 있어서 배제했다.
공항에서부터 공항가도와 연륙교는 점검해본 결과 전혀 위험성이 없었다. 탁 트인 시야에다가 눈을 피해 접근하기도 어렵고, 다시 빠져나가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연륙교를 건너서 시내로 접근하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것도 동네로 들어서서가 될 확률이 높다.
“꼭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지. 언제나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수가 있어서 프리랜서한테 당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좀 철저하게 파악해보자.”
“프리랜서가 흘리고 간 증거물들을 보면, 여러가지 도구가 있어요. 변장 도구들도 놓고 갔어요. 다시 준비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 특히 중요한 건, 바로 저격용 총을 써먹지 못하고 놓고 가야만 했다는 거예요.”
영란의 말이 맞다. 일단 저격용 총을 버리고 갔으므로 저격의 위험은 제거되었다. 이제 접근해서 시도할 생각을 할 것이다.
“혹시 납치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겠죠?”
대운의 생각도 틀리지는 않지만, 납치를 해서 어디로 끌고 갈 상황은 아니다.
“이제 그러기는 어려워졌다고 봐야지.”
“그렇죠? 그럼 차로 접근해서 공격하거나, 차를 세워서 공격하겠죠?”
진구가 지도를 펼쳐서 가져왔다.
“여기서 체크해보면 노루목이 나올 겁니다.”
공항로를 빠져나오면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다가 한남대교에서 우회전을 하는 코스가 맞다. 그러니까 위험한 부분은 바로 한남대교에서부터 강남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저택까지의 수많은 길목과 교차로가 공격지점이 된다.
“한남대교 남단에서부터 시작해서 저택까지의 동선에 전 인원을 깐다. 틀림없이 이 중 어느 지점에서 접근할 거니까 차량이고 행인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우리 감시망 안에 두어야 한다.”
“엄청난 차량일 텐데요?”
“알아. 그러니까 우리도 엄청나게 달라붙어야지.”
“검문을 해요?”
“검문만 하겠냐? 의심 가는 놈은 무조건 체포해. 뒷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꽉꽉 조이라는 말이야.”
두진은 주먹을 쥐고 중얼거렸다.
“다른 거, 뭐 또 없나?”
영란이 노트북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엄청난 자료들이 여기 들어 있어요. 그런데 전부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이지, 앞으로가 없어요.”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야. 과거에서 잘 짚어봐. 그러면 현재 뭘 하는지도 알고 미래에 뭘 하려고 했는지도 알 수 있어.”
대운이 증거물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특공대 차량에서 탈취한 연막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뭐에 쓰려고 그랬을까요?”
“연막탄이야 유용하니까.”
진구가 다른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건 뭐죠?”
“뭔데?”
진구가 두진에게 사진을 보였다. 사진 속에는 작고 동그란 자석처럼 생긴 물체가 보였다. 특공대에서 문을 부술 때 사용하는 소형 플라스틱 폭탄이다.
“문이나 벽 부술 때 사용하는 거잖아.”
“특공대에서 연막탄이랑 이거랑 세 개씩 잃어버린 건가요?”
“확실하지 않아. 다시 확인 좀 부탁해봐.”
“작은 건데 왜 챙겨 가지 못했을까요?”
“일부만 챙겨 갔을 수도 있지.”
문득 특공대에서 수량을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다시 확인해야 제대로 말할 거야. 연결해 줘.”
특공대를 압박해서 확실히 해야겠다.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거기 대비해야 한다. 폭탄은 비록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고 소형이지만, 누구 하나를 살상하기에는 충분하다. 게다가 연막탄 역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무기다.



2.

부슬부슬 여전히 내리는 빗속을 성하는 천천히 걸어갔다. 눈에 뜨이지 않는 허름한 군청색 작업복에는 ‘일신공업사’라고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촌스러운 바지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연장 가방처럼 보이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충무로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예전에 작업하던 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마치 한 번 포탄이 떨어진 자리는 다시 폭격하지 않는다는 아주 쉬운 논리에서였다. 그리고 빈 공장이 많아서 작업하기가 용이해서였다.
두진의 기습으로 많은 걸 잃었다. 저격용 총을 잃었고, 자료들과 노트북 한 대를 잃었다. 게다가 가장 뼈아픈 것은 플라스틱 폭탄을 세 개나 챙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두 다섯 개가 있었고, 그 양이면 기습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랑 두 개여서 인명살상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차량이나 건물을 공격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없다.
직접 폭발물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살상능력을 높이려면 꼭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쇠구슬과 뇌관이다. 직접 만들어서 성공할 자신이 없다. 도화선을 연결해서라면 자신이 있지만, 무선으로 사용하고 싶었다.
성하는 공장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대에 가서 앉았다. 얻어놓은 지 꽤 오래되는 공장이지만, 필요한 기계 몇 개를 들여놓아서 작업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성하는 메고 온 가방에서 묵직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지름 5 mm짜리 쇠구슬이 가득했다. 쇠구슬을 작업대에 올리고 이번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네모진 물건을 꺼냈다.
U.S.A M18A1. 흔히 크레모아라고 불리는 클레이모어. 물론 장난감이다. 안에 들어 있는 것들도 모두 플라스틱 비비탄이다. 그러나 작동방식은 똑같다. 다만, 플라스틱 구슬이 튀어나가는 것이 진짜 클레이모어와 다를 뿐이다.
클레이모어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된 구슬을 모두 털어냈다. 그런 다음 그 자리에 쇠구슬을 차곡차곡 채워 넣기 시작했다.
원래 이 클레이모어는 스위치를 켜놓아도 유선 격발이다. 즉, 격발기와 클레이모어를 연결하는 선은 50 미터짜리 도화선이다. 그게 있어야만 전기충격을 주어서 폭발시킬 수 있다.
모자란다. 선을 너무 길게 하면 실패할 수 있다. 그런데 거리가 더 필요하다. 사방이 확 트여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든 시야가 확보되는 장소에서는 탈출로를 확보하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다.
그렇다고 탈출로가 확보되는 시내로 들어선 후의 장소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차량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고, 어느 장소를 골라서 매설할 수도 없다. 게다가 다른 차량들이 방해가 된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수사팀에게 빼앗긴 서류들과 노트북으로 인해서 계획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강력부에서 잔뼈가 굵은 검사 오두진은 생각보다 영리하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기관원이나, 모사드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국 내의 폭력단을 상대하던 검사 하나 정도는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여서 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는 다른 정치적이거나, 관료적인 검사들과 전혀 달랐다. 진급을 못하고, 평검사로 옷 벗을 때까지 지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할 것 없는 상대였는데, 그런 상대가 가장 무섭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성하 자신이 어느 방면으로는 뛰어나도, 역시 세상을 그다지 오래 살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결국 이제는 서로 누가 더 머리가 좋은가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예상한 장소를 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더 먼 거리가 필요하다. 원래 있는 상태를 훼손해서 능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작전반경을 세 배 정도로 넓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바로 무선이다. 클레이모어를 무선으로 터뜨리는 게 아니라, 격발기가 무선으로 신호를 포착하고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을 찾으면 성공할 수 있다.



3.

기상청에서는 이상 저온이라고 했다. 피어났던 꽃들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심지어는 여의도의 벚꽃들조차 벚꽃놀이를 하기도 전에 피면서 그대로 떨어져버렸다.
이상한 봄이었다. 우중충하고 추운 봄이었다. 바람이 불어도 4월이면 그렇게 살이 에이는 바람이 아니어야 하는데, 뼛속까지 시릴 지경으로 냉기가 도는 바람이었다.
사람들은 움츠러들었고, 사회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너무나 큰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게 되고, 서로 지역과 사상이 부딪쳐서 싸우다 보니 문화와 생활경제는 바닥을 기었다.
두진은 수사팀의 중심으로 이런 사회 분위기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른 때처럼 편안하게 수사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당장 하루를 까먹어서 이제 D-DAY 까지는 이틀이 남았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에도 정신이 없는 가운데, 가장 염려하던 상황이 터져버렸다.

“이건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재준이 사무실로 가져온 건, 언뜻 보아도 암호를 푸는 난수표였다. 복도로 이끌고 나가더니 내놓은 물건이다.
“이게 뭡니까?”
“난수표입니다.”
“요즘도 이런 게 있나요?”
“있을 수도 있지요.”
멍하니 우재준을 쳐다보았다. 우재준도 난처한 얼굴이었다.
“아침에 국장님께서 직접 전달해주신 겁니다. 이례적인 일이죠.”
“이걸 어쩌라는 겁니까?”
“프리랜서에게서 압수한 증거품 중에서 나온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걸 국민들이 믿겠습니까?”
“믿게 해야지요. 그래야 수습이 되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전부 죽어나갈 판 아닙니까? 나라 꼴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이 시대에 난수표가 웬 말입니까?”
“이메일이나 북쪽에서 만든 사이트 등에서 일정한 암호를 내보낸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협조할 수 없습니다.”
두진은 난수표를 받지 않았다.
“그럼 다른 수사결과를 발표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
“다른 수사결과?”
“프리랜서의 노트북을 조사한 결과, 북한 사이트에 접속한 아이피 주소가 나온 것으로라도 해주셔야겠습니다.”
두진은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다니. 그래서 입을 틀어막으려고 들다니. 모든 게 북한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만 하면 통하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정부였다.
북쪽에서 한 짓이다. 그러면 모든 걸 정리할 수 있다. 만일 그런 결과에 의문을 가지거나, 틀렸다고 말하기만 하면 곧바로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몰릴 수 있게 만드는 마술지팡이.
한마디만 그렇게 해주면 매스컴은 일제히 거기에 대해서 마치 이벤트를 열듯이 지식인층이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분석을 내놓고 분위기를 띄워줄 것이다.
“난 그런 엉터리 수사결과는 발표할 수 없습니다.”
두진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우재준이 난처한 듯 따라오면서 설득하려고 들었다.
“나도 엉뚱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니까요?”
두진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내가 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사무실 쪽 인원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책상으로 가서 앉다가 말고 다시 일어나서 양복을 들고 돌아나왔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이러지 말고 같이 좀 더 대화합시다.”
우재준이 다시 따라붙었다.
“이런 일은 검사님한테 영향력이 큰…”
두진은 대꾸도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사무실을 나와서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담배라도 실컷 피우려고 가는데, 우재준이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었다.
차가운 날씨였다. 비는 그쳤지만, 대신 바람이 불었다. 양복을 입고 옷깃을 올린 채,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숨처럼 내뿜었다.
“나도 한 대 줍시다.”
우재준이 옆에 와서 섰다. 두진은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담뱃값도 오르고 해서… 담배 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정말 어렵네요.”
우재준도 한숨처럼 담배를 내뿜었다.
“이번 일은 위에서 이미 결정이 되어버린 일입니다. 난수표가 너무 무리라면 아이피 주소라도 그렇다고 해둡시다.”
두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발표는 검찰총장의 중간수사 발표로 될 것이고, 나나 오검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두진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산에 다니기 좋아하던 시절에는, 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언제나 같은 생각이 들고는 했다. 내가 저 쓰레기통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구나.
너무 심하게 뒤틀린 도시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되었다. 검사라는 직업이 세상을 그렇게 보게 만들었고, 날마다 대하는 밑바닥 깡패들이 같은 깡패가 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참혹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인생을 참혹하게 바라보게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내 인생이 쓰레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번 사건은 진저리가 나도록 참혹한 악마들의 장기판이다.
“내가 말입니다.”
두진은 먼 도시를 바라보았다.
“누구들 눈에는 장기판의 졸로 보이겠지만… 내가 검사라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검사.”
우재준은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어떻게 발표하든, 나는 상관 않겠습니다. 나한테까지 기자들이 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두진의 말에 우재준이 싱긋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두진이 다시 사무실을 향해 돌아서는데, 우재준이 뒤에서 말했다.
“미안합니다. 오검사님.”
대꾸 없이 걷는데, 다시 한 번 더 우재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심입니다. 미안해요.”

기분으로는 어디 가서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당장 그럴 계제가 못 되었다. 심정이 어떻든 머릿속이 어떻든 상관없이, 시간은 바작바작 흘러갔다.
대형지도를 펼쳐놓고 병력 배치를 점검하는데, 텔레비전에서는 검찰총장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가 나오고 있다. 내용은 우재준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전화 한 통 받은 바가 없는데,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건, 평검사 하나 정도는 무시한다는 실증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전에 몰두했다. 올림픽대로를 나오는 순간, 동선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 도로 왼쪽은 강이니까 걱정이 없고, 오른쪽에 있는 숲이 문제가 많았다.
숲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병력을 줄줄이 세워놓고 도로에도 군데군데 검색대를 만들어 놓았다가 공항에서 출발한 승용차가 도달하기 30 분 전부터 갑자기 검색을 시작하면 차량에서든 보행자들 중에서든 걸려들 확률이 높다.
“아니죠. 프리랜서가 검색대 정도로 그렇게 쉽게 걸려들겠어요?”
영란이 반대를 표명했다.
“그보다는 잠복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잠복?”
“검문검색팀과는 따로 잠복조를 두어서 감시해야 할 것 같아요.”
“인원을 퍼부어도 동선이 너무 길어서 다 커버하기 어렵겠다.”
“지방 병력까지 지원요청을 해서라도 잠복조를 깔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지방에 지원요청해서 검색 병력으로 돌리고, 서울 병력은 잠복조로 가면 되겠다. 지방경찰청에 지원요청해.”
빈틈이 없나를 다시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다. 그러는 중에 이번에는 검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안하게 생각하네. 내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었네.”
검사장은 침울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랍니까?”
“그야 뭐 자네가 협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협조적이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가. 검사는 독립적인 행정기관이다.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어도, 검사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검사가 외부와 협조적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자네가 그동안 너무 많은 걸 비공개로 해서 윗분들 심기를 많이 거슬렸네. 보고도 제대로 않고, 특히 결정적인 게 바로 프리랜서와 자네가 접촉한 내용에 대해서 똑바로 보고하지 않은 점일세.”
우재준이 결국 입을 연 모양이다. 믿고 함께 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런 때에 이유를 만들게 할 줄은 몰랐다. 실망감으로 속이 쓰렸다.
“그래서 이제 제가 손 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새로운 팀이 맡아서 진행할 걸세. 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공안팀이 대대적으로 구성되어서 새로 시작하겠지.”
“이틀 후에 중요한 작전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갑자기 팀이 교체되면…”
“그때까지는 자네가 계속 수사하고 있어야겠지. 인수인계할 사항만 해도 엄청나지 않나? 뭐 몇 달 걸리겠지?”
검사장의 넌지시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아직 더 수사를 할 시간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장을 지휘할 수는 없게 되는 것 아닌가.
“내일부터 당장 지휘권을 넘겨야 합니까?”
“그래야 할 걸세. 강부장 알지?”
공안부 부장검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압니다.”
“내일 연락하면 가서 지시를 듣게.”
“알겠습니다.”
미련 없이 일어났다. 어쩌면 차라리 잘되었을 수도 있다. 프리랜서라면 지긋지긋하다. 한 발 건너서서 바라보면 마음이라도 편할지 모른다.
‘어쩌면 나보다 잘할지도 모르지.’
두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4.

D-DAY. 새로 온 공안부 부장검사 강현수는 두 명의 검사와 함께 전체 수사를 지휘했다. 수사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체포작전이었다. 경찰에서는 경기도의 지원까지 받아서 대대적으로 체포팀을 만들고 올림픽대로에서부터 철통같은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그와 별도로 두진은 영란과 대운, 진구만을 데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들 자기 상사가 맥이 없어지니까 줄 끊어진 연처럼 맥이 풀려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프리랜서를 잡고 싶은 심정은 두진이나 팀원들이나 다 같았다. 작전에 직접 나서지 못하고 공항에 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꼭 자기들 손으로 잡고 싶은 욕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공항에 가서 도착 구역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경호팀에서 시비를 걸었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가주십시오.”
“그냥 조심하시라고 말만 전한다는데 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요?”
“일반 출구로 나오지 않습니다. VIP 통로로 나오시니까 저희가 전달하겠습니다.”
경호팀에 이미 가이드라인이 내려진 것 같았다. 허탈하게 그냥 물러나서 흡연실로 가서 단체로 담배를 물었다.
“괜찮겠지?”
두진은 지휘계통이 바뀌고도 괜찮은지 걱정되었다. 그동안 최대한 완벽하게 했다고는 해도, 프리랜서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기 공항이라도 경계해야죠?”
대운이 말하자, 영란이 담배 연기를 쫓느라 손을 흔들어 대면서 말했다.
“우리 아니어도 주변에 쫙 깔렸으니까 우리야 그냥 지켜보다가 돌아가야지.”
신세가 한심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구경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느낌 참 안 좋다.”
두진은 관자놀이를 만졌다.
“무슨 일이든 사심이 들어가면 망치는 법인데 말이다.”
다들 허탈하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이러고도 나라가 돌아간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공항 주차장을 벗어나서 이제 막 도로로 들어섰다. 앞의 차량은 경호차량으로 경호원들이 타고 있었고 뒷 차량에는 전직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지금 막 도착했어. 금방 갈 거야. 서울은 무슨 일로 도로 겨울이 온 듯이 춥구만. 하이난이야 따뜻하지. 요즘이 골프하기 딱 좋아.”
전직 대통령은 춥다면서도 두꺼운 스웨터를 도로 벗어버렸다. 차 안의 히터가 너무 뜨거웠다. 앞의 운전기사에게 한마디 했다.
“좌석 히터는 꺼라. 뜨겁다. 인마.”
“네.”
전직 대통령은 흘끗 공항을 돌아보았다.
“활주로 새로 만들었다더니 청사도 새로 지었더라.”
앞좌석의 비서가 돌아보았다.
“예. 중국행 비행기니까 셔틀을 타셨겠네요?”
“그래. 잘 해놓았더라.”
말끝에 중얼거렸다.
“내가 있을 때 처리했어야 했는데…”
“제2 청사 말입니까?”
“아니. 저거 전부 챙길 수 있었다고. 인마야.”
“네?”
“신경 꺼라. 이미 늦은 일이다.”
전직 대통령은 입맛을 다셨다. 어마어마한 사업이었는데, 온 국민이 들고일어나니 방법이 없었다. 결국 민자도로에 지하철 하나로 만족하고 말았다. 제기랄. 지나고 보니 그냥 눈 딱 감고 밀어붙일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승용차는 이제 막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이 도로도 민자도로다. 제대로 처리한 도로인데, 처음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더니,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
이게 조선 사람들 특징이다. 시간이 흐르면 된다. 바르르 떨고 일어나다가 이런저런 일들로 부대끼다 보면 한참 지난 일이 되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뭐든 일을 하려면 욕심을 내야 하는 법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는데, 먹을 걸 먹지 못했나 싶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사회화한다. 경영학까지 나가지 않아도,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만 하면 다 알 만한 경제인데 말이다.
‘미친 척했어야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가 남는다.

두 대의 승용차는 공항을 벗어나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의 경호차량이 톨게이트를 벗어났다. 전직 대통령을 태운 차량도 그 뒤를 따라서 톨게이트를 벗어나고 있었다.
순간, 쾅 하는 고막을 치는 소리와 함께 전직 대통령이 탄 차량을 향해서 양쪽의 콘크리트 누대 위의 잔디로부터 엄청난 양의 파편이 쏟아졌다.
이어서 방향을 잃고 마찰음과 함께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뒤에서 다가오던 차량들은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톨게이트 못 미쳐서 이리저리 돌았다.
쿵. 전직 대통령이 탄 승용차는 일차적으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돌면서 길가의 안전지대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차량을 들이받았다.
펑. 커다란 차량의 탱크가 우그러지면서 탱크에 달려 있던 굵은 호수가 꿈틀대는 구렁이처럼 튕겨져 올랐다. 그리고 그 끝에서 악취를 풍기는 분뇨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분출되어 나왔다.
세워져 있던 차량은 분뇨 수거용 차량이었고 이미 방금 전의 폭발로 인해서 탱크에도 구멍이 나 있던 참이었다.
사방으로 분뇨가 퍼져나갔다. 갈색의 액체는 전직 대통령의 차량과 그 주변의 하늘과 아스팔트 위로 미친 듯이 뿜어지면서 일대를 순식간에 분뇨로 뒤덮었다.
그 가운데 전직 대통령의 차량은 어떤 폭발물에 의해서 폭발된 것인지도 알 수 없도록 분뇨덩어리로 변해갔다.
끼이익. 앞차가 놀라서 정지하고 경호원들이 뛰어나왔지만, 이미 전직 대통령이 탄 차량은 형체만 남기고 자취를 완전히 감춘 지경이었다.
경호원들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경호원들은 전직 대통령이 탔던 승용차를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갈색의 분뇨 호스가 아직도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춤을 추며 뿜어내는 분뇨로 인해서 전혀 접근할 수가 없었다.
경호원들은 마침내 분뇨의 춤이 끝나고 나서야 코를 막은 채 미끄러운 도로 위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양복 윗도리를 벗어서 힘들게 분뇨덩어리들을 밀어냈다.
승용차는 양 옆의 유리창이 완전히 깨어져서 사라져버렸고, 철판과 시트도 폭발과 작은 파편구멍들로 인해서 벌집이 되어 있었다.
그 안에 탔던 전직 대통령도 그의 비서도, 그리고 운전기사도 모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서진 모습으로 시트와 함께 섞여 있었다.
또르르. 작고 반짝이는 쇠구슬이 차 바닥을 굴러서 아스팔트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작은 파편들은 다름 아닌 쇠구슬들이었다. 주변의 분뇨들 사이에서도 반짝이는 쇠구슬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호원들은 코를 막은 채, 망연자실해서 세 구의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