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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닌 여인과의 데이트
결혼 생활 21년 만에 나는 우리 부부 사이에서 사랑과 친밀함이 식지 않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아내 아닌 다른 여인과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었다.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시작하면 부부 관계에도 활력이 넘칠 거라며 이 방법을 적극 추천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은가? 다름 아닌 아내였다! 어느 날, 아내는 내게 다가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이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당신 자신이 더 잘 알아요." 그리고 이런 말까지 했다. "인생은 너무 짧아요. 그러니 당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제일 많이 사랑해." 나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아내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은 제 말을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여인과 좀 더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우리의 부부관계도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워질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내의 말은 옳았다.

아내가 나에게 데이트하라고 부추긴 여인은 바로 내 어머니였다. 올해 칠순이 되시는 어머니는 20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 지금까지 홀로 지내신다. 나는 가능하면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5년 전에 다시 고향으로 이사오면서 지금부터라도 더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음과 달리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날이나 휴일이 아니고서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5년 동안 그렇게 생활하자 어머니도 많은 부분을 포기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우리 둘이서 함께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자고 전화하자, 어머니는 좋아하시면서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얘야, 왜 그러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니?" 하고 물으셨다. 여느 노인들처럼 우리 어머니도 예외적인 일은 무엇이든 좋지 않다고 생각하신다. "아니에요. 그냥 몇 시간만이라도 어머니랑 단 둘이 보내고 싶어서요." 어머니는 몇 초 정도 생각하다가 말씀하셨다. "그래, 정말 좋을 것 같구나."

약속한 금요일, 퇴근 후 어머니 집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평소와 다르게 긴장이 되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도 데이트 시간만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했는데, 마치 그때처럼 떨리는 것이다. '진정하자. 지금 나는 어머니와 데이트 좀 하라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야. 그런데 도대체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내가 예약한 레스토랑이나 영화를 어머니가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머릿속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멀리서 어머니 집이 보이자 나는 어머니가 이 데이트를 얼마나 고대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코트를 입고 현관 앞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머리까지 곱게 말아 올리시고 말이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으셨다. "친구들한테 오늘 우리 아들이랑 데이트한다고 자랑했더니 모두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더구나. 그 늙은이들, 아마 오늘 내가 너하고 어떻게 보냈는지 듣고 싶어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한밤중에 나한테 전화할 거다." 차에 오르시면서 어머니는 유쾌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며칠 전에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크고 분위기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편하게 식사하고 대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팔짱을 끼셨는데, 올라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정말 연인인 듯한 기분을 내려고 그러시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는 어떤 요리를 시킬까 생각하며 열심히 메뉴판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어머님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메뉴판을 접고 어머니께 미소짓자 어머니도 내게 미소를 지으셨는데, 그 미소 속에서 나를 부러워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어머님은 정말 내가 부러운 듯 "네가 어릴 때는 내가 메뉴판을 읽어 줬는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180도 변해 있었다. 보살펴 주던 사람이 보살핌 받는 사람으로, 보살핌 받던 사람이 보살펴 주는 사람으로. 나는 말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께서 절 위해 주문해 주셨으니, 이제는 제가 어머니를 위해 주문해 드려야죠."

우리는 주문한 요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서로의 삶에 대한 소박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만 영화 관람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데이트를 마치고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렸다. 어머니는 차에서 내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저녁을 살 기회를 준다면, 너와 한 번 더 데이트를 하마."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날 저녁 집에 들어가자 아내는 "데이트 어땠어요?"하고 다그쳐 물으며 궁금해 죽겠다는 듯 내 옆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좋았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러자 아내는 '거 봐요, 내 말이 맞죠?'라고 말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어머니와 규칙적으로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다. 매주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데이트를 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한 데 가기보다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기분 내키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은 극히 드물었고 대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털어놓거나 아내와 아이들 자랑을 늘어놓으면 어머니는 다 듣고 계셨다가 친척들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에피소드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과거도 이야기해 주셨다. 덕택에 나는 어머니가 2차 대전 중에 공장에서 일하셨다는 것과 당시 생활이 어땠는지도 알게 되었고, 거기서 일하시다가 어떻게 아버지를 만나셨는지, 그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두 분이 데이트를 하시고 사랑을 꽃피우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머니의 지나온 세월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어머니의 역사일 뿐 아니라 나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니는 건강이 많이 약해지셔서 그런지 앞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많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주 오래오래 살고 싶단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손주 녀석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보고 싶어."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느 가장처럼, 수첩의 모서리까지 빼곡하게 스케줄과 약속, 일정을 적어 두고 산다. 그리고 직업과 가족과 이런저런 관계들을 내 삶 속에 끼워 맞추려고 버둥거리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다고 투덜거린다. 그런데 어머니와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나는 삶의 속도를 좀 늦추는 것이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임을 배웠다. 또 말로만 들어왔던, '양질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의 말대로, 다른 여인과 데이트를 즐기는 것은 우리 부부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 여인과 데이트함으로써 나는 더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더 좋은 아들도 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지만.

고마워요 어머니.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인생을 바꾼 100가지 이야기 2>(앨리스 그레이 편저, 두란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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