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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차디찬 비
16. 차디찬 비


도쿄 역사를 나서는 때에 비가 나리더이다.
…늦가을 차가운 비는 내 마음속까지 쓸쓸하게 하여 몹시 춥고 쓰렸습니다.
당신은 사람들 중에 서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내가 어느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눈길을 거두었습니다.
당신은 아베씨와 악수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으나, 내게는 눈길 한 번 주고는 그냥 돌아섰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곧 찾아오리라 여겼습니다.
당신은 내가 도쿄에서 제국미술전에 그림을 출품하느라 머무는 석 달 동안에도 찾지 않으니, 이제 잊고 떠나려 합니다.
여기 더 머물 이유도 없고 몸도 마음도 지쳐서 그냥 가버리려 합니다. 최린이라는 두 글자는 이제 깨끗이 잊으렵니다.
제전에서는 당당하게 입선을 하여 기뻤지만, 그것이 조선의 남성들에게는 화가 치미는 일이었나 봅니다.
신문에서는 내 그림을 모욕하고, 심지어는 내 그림을 전시한 주최자들까지도 험담을 했습니다. 나는 그 매질이 쓰라렸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인 것을 알아서 그다지 고통스럽게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심기일전해서 다시 그림으로 세상에 나를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세상이 밀고 때리고 밟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내가 먼저 걸어가고자 했다.
나는 아직 힘이 있고, 명석하며, 내 그림으로 세상에 나설 자신이 있다. 아이들을 가르쳐서 내 한 몸이 먹고살 자신은 있다. 세상 나부랑이들한테 기죽지 않겠다.

그렇지만, 최린씨. 당신의 그 냉랭함은 너무 아프고 서럽습니다. 한때는 서로 살을 섞고 예쁘다, 살갑다 하더니, 어찌하여 그렇게 매몰차지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하여도 그렇게 매몰차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참으로 속이 상하고 가슴이 치밀어 오릅니다.

나는 돈이 필요했고, 남자들의 무책임함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당장 어디론가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마음 놓고 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만이 내게 살아가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고소?”
완규씨는 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이야기야.”
“오홋? 그거 좋은 생각 같은데?”
한때는 나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내 친구와 재혼을 한 완규씨는 오라버니처럼 좋은 친구다.
“내가 자기 때문에 이혼도 당했고, 이제는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지라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거야.”
“음, 해볼 만한 일이다.”
“법적으로 이기겠어?”
“법으로 이길지 질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재판까지 가지도 못할걸?”
“어째서?”
“최린은 지금 참의에까지 올랐으니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어서 자기 명예를 엄청나게 신경 쓸 거라는 말이야. 그래서 먼저 백기를 들고 나타날 확률이 많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재판이 끝까지 가서 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그랬으면 좋겠어. 같잖은 사내들 도덕군자인 척 위선 떠는 게 너무 가관이잖아.”
“그러면 혜석씨도 다치는데?”
완규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내가 더 다칠 거나 있어? 온 조선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정말 신문에 내도 되겠어? 신문에 나오기만 하면 우리한테 아주 크게 유리해질텐데?”
“신문에 그게 나온다고 해서 유리할까? 세상 사람들이 날 이해해줄까?”
“아니.”
완규씨는 손을 휘휘 저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아직 조선의 남자들은 여자가 혜석씨처럼 사는 걸 미치도록 싫어하거든? 게다가 여자들은 자기 남자 홀릴까 봐 더 싫어하거든?”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최린, 당사자지. 당사자로서는 그런 사건 내용이 신문에 대서특필되면 당장이라도 거금을 싸들고 나타날걸?”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직접 볼 일은 없어. 직접 만나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서 한다. 그러라고 변호사가 있는 거니까.”
완규씨는 날 아주 잘 알고 이해해주는 친구다. 마치 사토씨가 변신해서 나타난 듯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뭔데?”
“내가 지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그래서 변호사비가…”
“변호사비? 아, 이 친구 참… 혜석씨랑 나 사이에 무슨 변호사비야?”
“그럼 그냥 해준다는 거야?”
“그냥은 안 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완규씨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혜석씨 그림 좀 하나 줘라, 응?”

당신이라는 남자, 참 우습더군요.
당신의 그 기막힌 수완 덕분에 우리들의 재판 내용은 신문에는 아예 실리지도 못했더군요. 그렇게 해놓고 나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끼리 만나서 합의서에 도장 찍으면 거금을 주신다고요.
아주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서럽고 화가 나기는 해도,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택한 것이 나이고, 당신이라는 남자를 사랑한 것이 나인데, 당신을 미워하면 나를 또한 미워하는 것이니까, 나는 나를 미워하지도 당신을 미워하지도 않으렵니다.
다만, 당신이 이제라도 예전의 당신이 되어 조선을 위해서 싸웠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때의 당신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나는 재기를 꿈꾸었다.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런 환경만 주어진다면, 나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 내 이제부터의 인생을 살까.

“파리로 가겠어.”
“파리?”
“응. 아무래도 거기 가서 살아야 할까 봐. 여기서는 더 이상 못 살겠어.”
“가서 뭘 하려고?”
“공부나 하려고.”
“공부? 혜석씨 나이에?”
“나이랑 공부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완규씨와 술을 마시는 김에 내 속을 진중하게 털어놓고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마시는 바람에 다짜고짜 파리에 대한 내 생각이 튀어나왔다.
“그림 공부만 해서 정말 그림으로 먹고살아 볼 거야?”
“그림으로 먹고살 수만 있다면.”
“그게 문제네. 그런데 파리의 뭐가 그렇게 혜석씨의 마음을 끄는 거야?”
“여자도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살지.”
“정말 그럴까?”
“그럼.”
“거기 사람들은 정말 그럴까?”
“나도 확실히는 몰라.”
완규씨와 나는 술에 취해서 키득거렸다. 횡설수설은 하였지만, 내 심정은 정말 그랬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림과 음악과 토론으로 가득 찼던 화려한 세상. 그게 바로 나에게는 파리였다.

그러나 파리에는 갈 수 없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점점 더 아팠다. 금강산에서 그렸던 그림들이 모두 불에 타버린 그때부터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알았지만, 그건 그저 일시적인 충격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감기에만 걸려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한겨울이 되면서는 귀에서 윙윙대는 잡소리들이 말도 못하게 크게 들려왔다. 신경성이라고 한다.
이래서는 도저히 파리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하는 수 없이 요양할 곳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수원의 고향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서호 근처에 아담한 집 한 채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매일 병원에 다니고 산책을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인가부터 시작된 증상이 가장 큰 적이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손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손이 왜 이렇게 떨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림이 불에 타던 바로 그 시기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손이 떨린다.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곧 이어서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현기증이 나고 어지럽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두 가지는 눈과 손이다. 눈과 손이 화가의 생명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중 하나에 이상이 온 거다.
손이 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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