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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살을 에이는 바람
17. 살을 에이는 바람


올해는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다. 정초를 지나자마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곧 살을 에이는 추위가 몰아닥쳤다. 추위는 내 몸을 더욱 오그라들게 했다. 손이 떨리면서도 그림을 다시 하려고 매일을 매달렸다. 더 오래 걸리고 더 힘이 들었지만, 여기서 지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하루 열대여섯 시간씩 달려들었다.

아침에 명순이 찾아왔다.
“일본 간다.”
“가서 어쩌려고?”
“여기서 어쩌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저녁을 해먹고 장작을 때면서 아궁이 앞에 나란히 앉아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거니?”
“너나 일엽이나 나나…”
세상 온갖 놈들이 잡아먹지 못해 안달들이 났지.
“세상에서 어떻게 쓰러지고 어떻게 망가질까만 기다리는 것 같아.”
“일엽이는 이제 세상 눈에서 벗어났지.”
“그러네.”
나는 일엽이가 찾아와서 비구니가 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달아나는 것이냐고 나무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어쩌면 일엽이는 살아남는 길을 택한 현명한 친구인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미워하는 걸까? 정말로 우리가 세상에 그토록 피해를 입히는 걸까?”
“피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명순이와 일엽이와 나를 세상에서는 신여성 삼인방으로 불렀다. 우리가 서로 친구라는 것도 그렇게 묶어 부르게 된 이유일 것이다. 명순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 등단한 여류소설가이고, 일엽이는 ⟪신여성⟫을 창간한 여성운동가였다. 나까지 셋은 자유분방한 연애로 세간을 놀라게 했고, 세상은 가십란을 통해 연일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소위 언론인이나, 사회적인 지도자들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세간에 이런 여성들의 풍조가 만연하면 큰일이 날 것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가정과 사회에 악형향을 끼칠 것이니 곧 사회를 망가뜨릴 거라는 이야기를 너도나도 앞다투어 했다.
다들 사회를 너무나 사랑하는 명사들로서, 국민들을 지도하는 입장으로 하는 말들이다. 그리고 다들 옳은 이야기라고 침을 튀겼다.
“세상 사람들 내뱉는 말이 상처가 많이 되어서일까? 하필 비구니라니.”
“우스갯소리로 어떻게 참느냐고들 하잖아.”
세상은 잔인하다. 당연히 잔인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잔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일본에 가면 무얼 먼저 하려는 거야?”
“글을 쓰겠어. 난 글로 이겨낼 거야. 무시 당하지 않을 거야.”
명순은 불씨들을 뒤적여 불꽃이 일어나게 하면서 다짐처럼 말했다.
“저 불꽃들을 봐. 다 죽어 있는 듯하지만, 언제고 다시 살아나서 불꽃들이 확 피어나잖아.”
“우리한테도 그런 기회가 있을까?”
“기회 따위는 없어.”
나는 명순을 흘긋 돌아보았다. 기회가 없다면 무엇에 희망을 거는 걸까.
“기회라는 건 사실 주변 환경이 만들어주는 거잖아. 그렇지만 우리한테는 아무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불꽃이 일어나지 못하게 찬물이나 끼얹지 않으면 다행이지.”
명순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 우리가 선택한 길이니까. 쓰러지면 뭐 어때?”
그래. 그렇지. 쓰러지면 어때?

한 이부자리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명순은 떠났다. 명순이 떠나기 전에, 내가 생각나서 한 가지를 부탁했다.
“도쿄에 가면 사토씨 소식 좀 알아봐줄래?”

명순은 사토씨를 찾지 못했어요. 사토씨가 일본에 없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나는 이제 그렇게 떠나간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다지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당신이 보고 싶어요.
미안해요. 사실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오로지 당신이 일본 사람이어서였어요. 그 외에 당신에게서 인간적인 흠이나 싫은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당신은 기꺼이 내 친구가 되어주었잖아요. 내게 깊은 호의를 보여주었잖아요. 내 그림을 이해해주고, 내 글과 내 생각을 모두 이해해주었잖아요.
그런 당신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다시 시작했어요. 전시회를 해보려고 해요. 아직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고 해요. 세상에 당당하게 내 모습을 다시 보여주려고 해요.
내가 누구인지, 나혜석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려고 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화가로서 세상에 다시 멋지게 나타나고 싶어요.
이럴 때 당신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실패. 지난 여섯 달 동안을 그토록 힘들게 나 자신과 싸우면서 내놓은 그림들은 처참하게 외면당했다. 전시회장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고, 신문들은 모두 나서서 혹평을 가했다. 심지어는 와보지도 않은 기자들까지도 혹평에 가세했다.

나는 완규씨를 찾아갈까 생각도 했다. 내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다. 수중에 가진 돈도 별로 없다. 전시회에 돈을 너무 집어넣었다. 이제 내가 차고 앉은 이 집 하나만 달랑 남았다.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다.

완규씨. 더는 당신을 찾지 않기로 했어요. 전번 일로만도 완규씨는 친구 이상으로 내게 도움을 주셨지요. 남매간이라도 해주지 못할 일을 너무나 잘 해주셨어요.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당신의 호의만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고 할 일이 있는데,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당신의 부담이 되는 건 싫었어요.
사람은 헤어질 때가 되면 헤어져야지요. 모쪼록 아무 하늘 아래에서라도 아주 잘 살아가기를 바랄게요.

전시회가 끝이 나고, 모든 것을 정리해서 수원 집으로 돌아와 앉은 날, 내게는 다시 한 번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내가 전시회에 미쳐 있는 사이에, 내 아들 선이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폐렴. 그게 그렇게 내 아들의 생명을 빼앗아갈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던가.
나는 집 앞의 호숫가에 주저앉아 밤이 새도록 울었다. 가슴이 터지도록 통곡했다.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면서 울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혜석에게는 모성이 없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이 세상에 자식이 사랑스럽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겠느냐. 자식이 나보다 귀하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겠느냐.

선이 떠난 지 벌써 한 달, 이 모든 슬픔을 잊기 위해서 다시 붓을 잡았다.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나는 그림을 그려야만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 눈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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