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소개 회원가입 단체가입안내 KB카드 VVIP 회원인증 이용안내 회원FAQ 도서요약 공지사항
키워드
전체카테고리 보기
ID/PW찾기 l 보안접속
이용권 등록 회원가입
책에서 배우는 경영사례
북 & 프리즘
사랑하는 가족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수필이 좋다
영혼의 보금자리
리더들의 자녀교육
책에서 만나는 건강정보
가슴이 따뜻한 이야기
소설이 좋다
연재소설 프리랜서
연재소설 나혜석
골프 칼럼 베스트 7
서평칼럼
책 속으로
떠나자! 책 속의 여행자
생활 상식
우리말 잡학사전
영어잡학사전
 
90일간의 세계일주
아름다운 만남
북 미리보기
 
나눔을 실천하는 기업
섀클턴의 파워 리더십
법령과 함께 떠나는 1박2일
 
안티베어 카툰
 
지난컨텐츠 보기
전체세미나
마포나비
주식투자 -하제누리 편
책으로 소통하는 세상
저자와의 만남 동영상
컬럼니스트 최종옥의 서평칼럼
가정통신문
1학년 | 2학년
3학년 | 4학년
5학년 | 6학년
독서퀴즈 | 교과어휘 퀴즈
독서이력 | 독서교실
글쓰기  
 
 
18. 나들이
18. 나들이


화가에게 손이 떨리는 것은 불편하기는 해도 견딜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리는 시간이 늦어지고, 팔과 어깨가 많이 아프지만 아주 못 그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화가에게 눈만큼은 거의 사형선고와 같다. 엄청나게 두꺼운 알로 된 안경을 껴야만 풍경이 보였다. 그러니까 캔버스는 볼 수 있지만, 풍경을 볼 수가 없었다. 먼 풍경을 볼 수 없으면 캔버스가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수원집을 처분했다. 한동안은 지낼 만한 돈이 손에 들어왔다. 돈을 쥐고 길을 나섰다. 자꾸만 나빠지는 눈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나빠져서 이 세상이 아예 보이지 않기 전에 마음껏 이 세상을 보리라.

먼 산 위로부터 서서히 비안개가 내려앉더니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흔들어서 산 전체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비가 내리기 전이면 어김없이 바람에 잎사귀들이 전부 뒤집어지면서 하얀 빛이 나게 된다는 걸 길을 나서고서야 알았다. 비안개가 산허리 아래에서부터 잡힌다는 것도 길을 나서고 나서야 알았다. 강물 위를 흐르는 물안개는 맑은 날을 예고한다는 것도 길을 나서고서야 알았다. 화가였을 때는 모르던 것들이 매일매일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섬진강가의 커다란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장날에는 크게 장이 서기도 한다는데, 오늘은 장날이 아니어서 쓸쓸하기만 했다.
보퉁이를 다시 등에 메고 일어서다가 멀리 다리 아래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들을 보았다. 저렇게 가는구나. 한때는 아무리 예뻤어도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구나. 하긴 먼저 간 사람도 있는데.

차가 있는 곳은 차를 타고, 걸어야 할 곳은 걸으면서 전라도를 돌아다녔다. 그 사람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길에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지리산 주변길을 이리저리 돌고, 섬진강을 따라 걷고, 계곡을 따라가다가 화엄사에서 하루를 묵고 지성껏 불공을 드렸다.
그동안은 생쌀을 가지고 다니면서 씹었지만, 어제부터는 이가 너무 아파서 그만두고 구례 읍내의 방앗간에서 찐쌀로 만들어 보퉁이에 넣고 다녔다.
돌고 돌다 보니 그 사람에게 가는 길을 잃은 듯도 하다. 하기사 저승이 먼 곳이기도 하고 지척이기도 하겠지. 구비구비 길들은 참 끊이지도 않네.

승구씨.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십 년이 훅 가고, 자고 일어나니 또 훅 십 년이 가고 그랬네.
이렇게 혼자 누워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하기도 하지.
미안하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남자들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지. 남자고 여자고 사람은 다 그런가. 내가 사람에 대해서 너무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아가다 보니 너무 쉽게 떠나보내게 되네. 떠나보낼 때는 당장 죽을 것 같더라도, 산 사람은 또 잘 살아. 죽은 사람만 안타까운 거지.
무덤에 무슨 잡초가 이렇게 많담. 아무도 관리 안 해주나 보다. 내가 몸이 아파서 제대로 해볼 수가 없네. 흙도 패이고 참…
언제인가는 나도 이렇게 땅속에 들어가 눕겠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만 같아.
어제는 내 친구가 죽은 걸 신문 보고 알았어. 승구씨도 명순이 알지? 명순이가 도쿄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죽었다고 나왔어.
참 허무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죽기 전에 다시 또 올 수 있으려나 몰라서 오래 앉아 있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냥 나무 아래에서 내리는 대로 비에 젖어 앉아 있었다. 무덤가에 내리는 비는 마치 그 사람이 울고 내가 우는 것만 같아서 서글펐다. 비랑 같이 울고 앉아 있다가 해가 지는 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일어나고서야 공동묘지라는 걸 알았다. 참 많이들도 죽어있구나.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많았구나. 나도 다를 게 있나.

전라도에서 부산 가는 길은 옛날같지 않았다. 대전까지 기차로 올라가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나는 그 옛날처럼 물어물어 버스와 트럭을 옮겨 타면서 부산으로 향했다. 그래도 길이 예전보다는 좋아서 어렵지 않게 부산으로 갔다.

날이 제법 서늘해지는 계절인데도 부산은 따스했다. 바람이 간혹 심하게 불었지만, 그다지 차갑지는 않았다.
부산은 언제나 머물기보다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이었다. 동래에 살기도 했지만, 동래를 부산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동래는 그저 살아가는 땅이고, 부산은 언제나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승구씨 집을 찾아가던 날에 사토씨와 함께 며칠을 부산에서 보냈다. 그때의 기억으로만 나는 부산을 인식한다. 사토씨와 함께 다녔던 길을 찾으려고 해보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너무 변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부산은 그동안 많이도 변해 있었다.
사토씨와 부산에서 지냈던 때에는 송도유원지가 으뜸이었다. 동래 온천을 많이들 찾았지만, 사토씨는 유독 바다를 좋아해서 바닷가로 나가서 술을 마시고는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토씨가 그때 알아봐서 잡아 준 트럭이 출발한 건 송도였는데, 우리가 술을 마시고 걸어 다녔던 그 고갯길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초가집들이 드문드문 있던 그 고갯길을 걸어가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는 했는데. 그 길이 도대체 어디에 있던 길일까?
어딘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이름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사토씨, 달맞이 길 기억나요?

당신과 연락이 끊긴 지도 참 오래네요. 당신이 없으니 나는 수다가 많이 줄었어요. 사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내 속을 다 털어놓는다는 것 정말 어렵잖아요. 부부 사이라도 그건 참 어렵다는 걸 나이 들면서 깨달았어요.
늦었지만요.
늦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내 행동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같이 깨달았어요.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들 중에서 금지된 것들을 나는 쭉 말하고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말아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알았어요. 내가 사토씨한테 한 말들도 참 가슴 아프게 할 만한 말들이었다는 것을요.
가끔 당신이 정말 그리울 때가 있어요. 내 판단이 흐릿해지거나, 알기는 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만두고 싶을 때, 그럴 때가 있잖아요. 길을 알아도, 그 길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을 때 말이에요. 그럴 때는 누군가가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으면 했지요.
용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죠. 용기는 누구나 억지로 자기 몸 안에서 쥐어짜듯 끌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나는 자기 최면을 걸듯 내 자신에게 강해지라고, 강해지라고 외치고는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내게 매일매일 손가락질을 하고 돌팔매질을 할 때에도 나는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고 머리를 빗으면서 다짐하고는 했죠.
나는 강해질 테야.
나는 강해질 테야.
우습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철딱서니 없는 어느 여자의 치기일 테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힘이 나고는 했어요. 그 힘으로 하루를 지내고는 했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람 하나가 아무리 강해도, 세상을 어찌 이기겠어요? 처음부터 이기리라 생각하고 싸우기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저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내가 먼저 걸어나간 것뿐이지요.
이해하시겠어요? 사토씨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세상도 잘 아니까 내 말을 이해할 거예요. 세상은 참 무섭더라고요.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온 세상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서로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 두들기고 짓밟더군요.
내가 덕분에 아주 유명해졌지요. 화가 나혜석보다 화냥년 나혜석으로 더 유명해졌어요. 뭐라고 해서 그런 줄이나 아세요?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틀린 말은 아닌데, 세상은 그걸 곧게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 아니, 신중하게 생각이나 해보고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그랬거든요.

정조는 취미다.

일엽이를 만나러 갔다. 한때는 명순이와 나와 더불어 세상과 맞서자고 만나기만 하면 떠들던 친구였는데, 이제는 속세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아버렸다.
‘너 좋아하던 세상 사내들은 다 어쩌고?’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일엽은 서슴없이 말했다.
‘내게 사내가 있었던?’
다 잊었다는 말이겠다.

봄볕에 의지해서 산을 올랐다. 갈수록 몸이 약해져서 나들이를 다니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명순이 소식을 일엽에게 전하고 눈이 더 상하기 전에 얼굴이나마 보자고 만나러 갔다.
수덕사를 지나서도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정혜사가 나오고, 그 뒤에야라 견성남이 나온다. 도중에 작은 초가집 여관이 있어서 신기했다.
일엽은 이제 완전히 스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대단도 하다. 나는 예수와 부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이제야 겨우 부처를 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까 말까 했다.

“너.”
일엽은 내 행색을 보고 놀랐는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내 위아래를 바라보면서 입술만을 깨물었을 뿐이다.
“스님.”
내가 먼저 그녀를 스님이라 불러주면서 웃어 보였다.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니 내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잘 지내시는 것 같네.”
일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내 손을 부여잡았다.
“정말 잘 왔다.”

일엽이와 양지바른 암자 앞 뜨락에 앉아 실없는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엽이는 이미 명순이가 떠난 것을 알고 있었다.
“명순이 마지막에 너무 어려웠나 보다.”
“그래. 그렇다더라. 나도 암자에 다니러 온 시주한테 들어서 알았다.”
“결국 그렇게 가네.”
일엽은 싱긋이 웃었다.
“누군들 가지 않겠니? 돌고 도는 것이 우리들 생명인데. 남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너도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
“아픈 건 이제 이골이 났다.”
“그림은?”
“글쎄… 돌아다니기도 지쳤으니 이제 어쩌면 어딘가 앉아서 그림을 그릴지도 모르지.”
“많이 다녔니?”
“아주 많이.”
“그 몸으로 어디를 그렇게 다녔니?”
“그냥. 세상 구경 다녔지. 늦기 전에 다니려고 그러지.”
“늦기 전에…”
우흐흐. 나는 일엽을 보며 웃었다. 눈이 안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엽은 다 안다는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넌지시 권했다.
“그림을 그려야지.”
“그래. 그래야지.”
“오다가 여관 하나 보았지?”
“아. 수덕여관?”
“거기 묵을 수 있나 알아볼테니까 붙어 앉아서 그림을 좀 그려봐.”
“그럴까?”
“넌 속세에 미련도 참 많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면서도 여전히 속세를 잊지 못하는구나.”
“내 아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잊니?”
“그렇지.”
일엽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가보지 그랬니? 사람들이 아무리 독해도 설마 하니 엄마한테 애들 못 보게야 하겠니?”
나는 쓸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나러 갔었어.”
“그런데?”
“아이들이 무서워해. 혼이 날까 두려운 것 같아. 실제로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사실 나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끔 아이들이 사는 집 근처에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허둥지둥했다. 그러다가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가서 다시는 아이를 찾아오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야 했다.
“이제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진심이었다. 이제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걸 알아서 내 스스로 가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 내 아이들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속세와 연을 끊겠니?”
“그래. 그렇구나.”
일엽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순이도 그렇게 떠나고… 나는 이제 아주 속세를 벗어나서 사니… 너만이 외롭게 세상과 싸우는구나.”
“그렇지 않아.”
나는 이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든 몸은 투지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나는 진 거야.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나는 싸울 만큼 싸웠고,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했어. 그건 변하지 않아. 난 정말 맹렬하게 싸웠어.”
일엽은 가만히 내 등을 두드렸다.
“그림을 그리렴.”

일엽이 수덕여관을 주선해주어서 그곳에 머물면서 몸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여관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자고 했지만,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그림 대신 무수히 많은 글들을 쓰고 또 썼다.
일엽에게는 세상에 졌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여전히 세상에 하고 싶은 말들을 내뱉었다. 세상이 금지하고 있는 말들을, 나는 내 글을 멈추지 않고 발표했다. 신문이나 잡지들은 언제나 내 글을 받아주었다. 그들이 내 글에 공감해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그들은 흥미로 내 글을 원했다.
상관없었다.
나는 내 글을 읽는 몇 사람이라도 내 글에 공감할 수 있다면 쓸 수 있는 데까지 쓸 작정이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 간다고 해도 누군가는 내 뒤를 이어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그러기를 바랐다. 이제 내가 어쩌면 이렇게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많이 가졌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쓰고 또 썼다.
때로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부쳐도 수신인에게 들어갈지 들어가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쓸 수 있는 대로, 누군가에게든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썼다.
글은 미약하나마 내 마지막 무기였다.

여름이 지나면서 생활비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가는 돈은 많은데, 들어오는 돈은 너무 작았다. 원고료라고 몇 푼을 받아봐야 원고지와 잉크를 사고 나면 없었다.
식량은 일엽이 종종 가져다주었다. 나물이나 콩, 쌀을 가져다주는데, 사실 나는 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출가한 몸인 일엽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야금야금 줄어드는 생활비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나는 수덕여관을 떠나자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오그라들어서 죽느니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자꾸만 남쪽의 풍경들이 그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
일엽은 내 사과를 그저 웃으며 받아들였다.
“결국 그림은 하나도 그리지 못했어.”
“그래도 글은 많이 썼지 않니?”
“그럼 뭐해? 난 화가인걸.”
“그래서 이제 가려니?”
일엽은 내가 보따리를 챙겨든 것으로 이미 모든 걸 알아챘다. 그래도 말리지는 않았다. 그저 몇 푼의 여비와 함께 먹을 것을 싸주었다.
“언제라도 다시 오렴.”
“그래. 꼭 다시 너 보러 올게.”
나는 일엽의 얼굴을 오래 보고 서 있을 자신이 없어서 서둘러 암자를 떠났다.

길을 나서고서야 내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손과 눈만이 아니라, 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서야 느릿느릿 걷게 되었다. 내가 할머니처럼 걸어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처음 길을 나선 날은 많이 울었다. 하지만 내 성격이 그런 것인지 금방 익숙해지고, 다시는 내 병으로 인해서 울지 않았다. 나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리라.

오빠한테 들렀다. 오빠는 내가 집에 있는 걸 싫어해서 오빠네 집 구석방에서 몰래 지내고는 했다. 새언니는 그래도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나를 내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알면 불같이 화를 내니까 많이 힘들어했다.
오빠는 나를 많이 미워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최린을 고소한 것에 대해서 특히 화가 나 있었다. 변명하지 않았지만, 내가 최린을 고소하기로 한 것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숨어서 지내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멀쩡한 처녀였는데, 지체 높으신 집안 도련님과 연애를 하게 되었다. 처녀의 집안이 형편이 없었기 때문에 지체 높으신 집안에서는 아이까지 생긴 처녀와 도련님을 결혼시키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 혼인을 시키고, 처녀에게는 다시는 도련님이나 아이를 찾으러 나타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이만은 데려다가 호적에 올려주었다.
그러니까 한 여자는 아이가 도련님 집안의 아이가 되는 조건으로 숨어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새로 혼인을 한 여자는 졸지에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아이를 자기 딸로 호적에 올리고 키우며 살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조선 남자들의 행패가 이해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런 행패를 숨죽이고 살면서 고스란히 감내하는 처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동등한 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진실한 사랑이든, 한때의 불장난이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불평등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게 옳은 거라고 우겨대는 신문과 방송은 대체 무엇인가.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들인가. 아니면 자기들에게 유리하자고 우겨대는 꼴들인가. 조선의 사내들은 배울 만큼 배운 작자들도 많은데, 사상이나 민족에 대해서 떠들 때는 그렇게 잘 떠들면서 어찌 지극히 당연한 이치에 대해서는 모두들 모른 채로 일관하는가.
나는 그래서 더 최린을 고소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나와 오빠 사이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오빠가 주선한 양로원으로 가야만 했다. 작은 양로원에서 죽을 날을 받아놓은 노인들 틈에서 하루하루를 지냈다. 나 역시도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승구씨. 오늘 아침에는 올해 들어 첫눈이 내렸어. 눈이라고 해야 차가운 싸라기가 바람에 날리는 정도지만, 그래도 내게는 첫눈이네. 겨울이 일찍 오려나 봐. 이제 막 십일 월에 들어섰는데 눈이 오다니 말이야.
춥지? 승구씨 있는 곳도 제법 추울 것 같아. 난 이제 다리가 너무 말을 듣지 않고 손이 전보다 더 많이 떨려서 거동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야. 그래도 자꾸만 밖으로 나돌게 되는 걸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떠돌이인가. 이제는 그림을 그릴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바깥 풍경이 보고 싶어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야.
내가 아직 할머니 소리를 들을 나이도 아닌데, 길에 나서면 다들 할머니라고 불러. 덕분에 도움은 많이 받는 편이야.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날 도와주는 거니까 동냥이지 뭐야. 슬프지 않아. 그런 것.
오늘은 첫눈도 왔으니까 지팡이를 짚고 길로 나서보려고 해.
아. 승구씨. 나 이제 글은 이번으로 마지막이야. 이제 그만 쓸 거야. 사실 더 이상 쓸 만한 도구도 없어. 이럴 때, 사토씨라도 있으면 연필이라도 좀 선물해달라고 부탁해볼 텐데. 승구씨도 알지? 마음씨 좋은 내 편, 사토씨. 연필은 그만두고라도 소식이라도 알았으면. 이제 쓸 게 없네. 연필이 없어.
번호 제목 날짜
21 21. 인터뷰 2014년 07월 09일
20 20. 장마 2014년 07월 02일
19 19. 유언 2014년 06월 25일
18 18. 나들이 2014년 06월 18일
17 17. 살을 에이는 바람 2014년 06월 11일
16 16. 차디찬 비 2014년 06월 03일
15 15. 흔적 2014년 05월 28일
14 14. 돋아나는 가시 2014년 05월 21일
13 13. 폐허 2014년 05월 14일
12 12. 머나먼 길 2014년 05월 07일
맨 처음으로 이전 10개 1 2 3 다음 10개 맨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