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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언
19. 유언


다비식이 열렸던 마당에는 이제 빗물로 인한 짙은 매연만이 감돌았다. 어디선가 빗줄기를 뚫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지막 장을 덮지 못하고 부슬대며 내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마 덮을 수 없는 것은 내 손이 떨려서였다. 책의 마지막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어서 앞뒤가 불분명하고,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와 스스로의 일기가 뒤섞였기 때문에 행적이 확실하지 않아 보였다.

리에가 모찌와 따뜻한 말차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다 읽었어요?”
나는 아직 닫지 못한 마지막 장을 내려다보았다. 연필이 없다는 말. 그러니까 연필이 있는 한, 글을 놓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요. 보여주지 말 것을 그랬나 봐요.”
나는 책을 내려놓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떡 좀 들어요. 판이 없는 대신 꽃향기가 난답니다. 닛코의 여관에서만 팔던 떡인데, 이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요. 꽃향기가 좋아서 자주 사다 먹지요.”
나는 떡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잖아요.”
“뭐가…?”
“할아버지께서는 그 후로 여기 적힌 일들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으셨던가요?”
“많이 알아보셨대요.”
“마지막 돌아가신 곳으로 나오는 자혜원인가… 그곳은 가보셨던가요?”
“그랬다고 하셨어요.”
“그 이후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으셨네요.”
“이후 이야기는 하기 싫어하셨어요. 지금 읽으신 글들도 나 이외에는 본 사람이 없어요.”
나는 책장을 덮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 이후 이야기를 쓰시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요?”
리에는 잠시 머뭇대며 마당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언가 확실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일까.
“할아버지는 나혜석 씨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아, 그런 거였나. 하긴 내가 읽은 기록들로 보아도 나혜석은 죽은 지 몇 해가 지나서야 알려졌다. 그러니까 죽음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확실하게 죽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해요. 자혜원으로 되어 있지만, 자혜원에서도 아무도 모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확신하면 정리하려고 그대로 두신 건가요?”
“베껴두기는 했지요. 읽었으니 알테지만, 소설로 쓰려고 적은 자서전 형식의 글과 누군가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가 뒤섞인 나혜석 씨의 글을 그대로 두었어요.”
그런 것 같았다. 다른 부분은 모두 일본어였는데, 유독 나혜석 씨의 글은 한국어 그대로 필사만 했다. 그녀의 죽음을 믿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결국 할아버지는 나혜석 씨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어요. 물론, 살아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었죠. 그렇게 그냥 유품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만 챙겨서 도쿄로 돌아왔지요.”
나는 사토 야타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그리고 어떻게 지내셨나요?”
“할아버지는 도쿄도 싫어했어요. 그래서 원래 우리 고향이던 이 집으로 들어와서는 그 후로 쭉 혼자 사셨지요.”
리에는 이야기 끝에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고향집에 두문불출하는데, 가족들이 상의를 해서 동생의 둘째 아들인 저희 아버지를 양자로 보내셨지요. 외롭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거였죠.”
“가족들도 나혜석 씨에 대해서 알았나요?”

당시에는 알지 못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여기로 와서야 알게 되었죠. 그전에는 오로지 전쟁으로 인해서 세상을 등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나혜석 씨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나였어요. 난 할아버지를 좋아했죠.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가셨어도 여전히 도쿄 생활로 바빴고, 할아버지는 혼자 지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난 할아버지 집에 사는 게 좋았어요. 할아버지한테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국적도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고, 그래도 일본인인데 일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하는 걸 종종 들었어요.
난 할아버지의 조용하고 의연한 모습들이 참 좋았어요. 게다가 할아버지의 그림들이 좋았어요. 할아버지는 종종 그림을 그렸거든요.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사면 벽을 꽉 채운 그림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혜석 씨의 그림이었어요. 할아버지는 결국 나혜석 씨와 평생을 사신 거예요.
어릴 적에는 그런 걸 몰랐는데, 내가 미술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할아버지는 내 그림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내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수많은 화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셨죠.
지금도 그때의 기분이 생생해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고, 내게 인생과 예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았어요.
나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참 이상한 일이다, 할아버지가 너를 정말 사랑하시나 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좋아했지요.
할아버지에게 나혜석 씨에 대해서 처음 들은 건, 내가 방 안의 그림들에 대해서 물었을 때였죠. 가족들 중 누가 물어도 절대 대답해주지 않던 할아버지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게 그림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죠. 그날이 할아버지의 술 마시는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본 날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으셨거든요.

그날은 단풍 위로 눈이 내린 날이었어요.
할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방으로 부르셨어요. 할아버지 방은 사실 방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컸어요. 집 뒤편에 마치 온실처럼 만들어진 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집 안 사람들과 동떨어진 다른 집처럼 보였죠. 집 안 사람들은 조심스러워서 할아버지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마음대로 들락댈 수 있는 건 집 안에서 유일하게 나였죠.
할아버지는 나를 할아버지의 책상 앞으로 오게 해서 자신이 쓰시던 의자에 앉게 하고는 색이 바랜 보자기에 싸인 두툼한 책들을 보여주었어요. 그러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씀을 하셨어요.
“리에야,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사람이 쓴 글들이란다.”
그 사람이 쓴 원고들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게 놀라운 거였지요. 그때까지는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그것도 여자를 사랑했다는 게 상상도 가지 않았거든요. 메마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약간 외톨이 같은 분이셨고,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사람들에 관해서도 무관심한 스타일이었으니까요.
가족들이 모여서 나랏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이야기하면 할아버지는 거의 무반응이었어요. 옛날이야기라든가, 자기 생각도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셨죠. 그냥 빙긋이 웃고는 아주 가끔 한 마디씩 하셨어요.
“인간들이 그렇지.”
그랬던 할아버지께서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하니까 놀랄 수밖에요. 원고들은 원본들이 아니었어요. 잡지들도 있고, 허름한 메모조각들도 있었죠.
나는 할아버지가 이런 걸 왜 내게 보여주나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한국말로 쓰여진 것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아, 일본어로 된 책자도 있기는 했어요. 신문기사도 일본어가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한국말이었어요.
“읽을 수가 없잖아요.”
“배우렴.”
왜 배워야 하냐고 묻지 못했어요. 할아버지가 실망하실까 봐 그랬죠. 사실 난 한국에 대해서 별로 몰랐어요. 심지어는 한국의 서울이 남쪽인지 평양이 남쪽인지도 잘 모르고 자라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서야 남쪽에 서울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어요. 할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배웠다기보다는 도대체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사랑한 여자는 누구일까 하는 관심에서였고, 그 여자가 한국 여자라니까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한국말도 배우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매일 조금씩 내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글로 받아 적었고요. 왜냐하면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지도 못하고 글을 쓰지도 못하셨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내게 그런 걸 다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당신이 이제는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우리 가족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시력을 잃어 가셨던 것 같아요. 워낙 꼿꼿하게 행동하신 분이라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어요.
언제부터였는지도 몰라요. 그저 가족들은 이제 건강이 악화되어서 몸이 서서히 무너지시는구나 생각한 거지요. 젊어서 워낙 고생을 하셔서라고 하는데, 사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고생을 하셨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그 시절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던 것과는 달리 그다지 고생하지 않은, 말하자면 나약한 인텔리였던 것 아닌가 싶어요.
재미있는 건 할아버지가 한 사랑이 그냥 짝사랑이었다는 거예요. 모든 걸 다 알고 나니까 갑자기 할아버지의 인생이 가여워지기 시작했어요. 어떤 여자를 사랑했고, 그게 혼자만의 사랑이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지나온 인생길이 너무나 쓸쓸하고 막막한 것이었어요. 우리 세대의 누가 알겠어요? 전쟁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나라를 잃거나 빼앗는 따위의 일들을. 아마 여희씨 시대에는 더 모르겠지요.
나는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가 그동안 보여 온 태도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할아버지는 이 세상이 미웠던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이 미웠던 거예요. 그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죄다 미웠던 거예요. 그래서 하는 짓거리들이 싫고 생각들이 싫었던 거예요. 그렇게 세상과 등을 돌리게 된 할아버지의 인생을 나는 그제야 이해했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그것도 평생을 가슴에 품었던 여자를, 그렇게 무참하게 할퀴고 짓밟은 세상이 미워서 눈길조차 주기 싫었던 거겠죠.
가슴이 많이 아팠죠. 할아버지는 매일 내 가슴을 아프게 했어요. 매일매일 조금씩 이야기를 해주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써나가야 했으니까요.
거기 쓰여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전부 내가 조금씩 받아쓴 것들이에요. 그리고 다른 노트는 없어요. 그 노트에 써드리고 그대로 할아버지 방에 놓고 일어나고는 했죠.
“리에, 제대로 쓴 거니?”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물었는데, 저는 그때, 이 노트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어요. 이제는 내가 제대로 썼는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에요.
방을 나설 때마다 슬그머니 할아버지를 돌아보면 할아버지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노트를 가슴에 안고는 잠이 들었어요. 바보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화가 나기도 하다가, 안타깝기도 하다가, 그 시절의 저는 할아버지 때문에 매일이 슬펐죠.
그런데 참 이상도 하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정말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죽기 전에 차곡차곡 쓴 글을, 매일 가슴에 안고 잠이 들던 그 노트를, 이제 당신이 더 이상 살아 있을 희망이 없어지던 날에는 그만 태워 없애달라고 하는 거예요.
“리에, 내가 죽으면 이 노트를 없애다오. 저 그림들도 다 함께.”
나는 깜짝 놀랐죠.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어요. 얼마나 소중한 그림들이고 글들인데, 이제 와서 다 없애야 하느냐고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국으로 보내자고 했어요. 책은 한국에서 싫다고 하면 일본에서 내가 출판하겠다고 했죠.
“넘겨주기 싫구나.”
“그럼 넘겨주지 않으면 되잖아요.”
“누구에게라도 주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라도, 라는 말에는 나도 포함된 거였어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뜻이었어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갖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이죠.
난 할아버지를 이해했어요. 이해는 했어도 그대로 할아버지의 말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그림들이 아깝고, 노트의 사연이 안타까웠어요. 무엇보다도 그걸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온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그림이나 글들이 너무 가치 있는 것들이라고 여겨져서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궁리를 했죠.
나는 결국 할아버지를 속였어요. 똑같이 생긴 엉뚱한 노트들을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단풍 나무 아래에서- 태웠어요. 그리고 진짜를 숨긴 채 지내왔죠.
할아버지는 그림들도 꼭 태워달라면서 그림을 태울 준비를 하려고 들었지만, 그 얼마 후에 할아버지는 미처 그림들을 태우는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마지막 돌아가실 때에 내게 말했죠.
“리에, 그림들을 꼭 태워야 한다.”
난 약속했어요. 꼭 태우겠다고.

약속을 지킬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그림과 노트들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내가 집안을 이끌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못했죠. 할아버지의 방은 나 이외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지냈으니까요. 그때부터 할아버지 방을 나만 드나들면서 생활했어요.
할아버지는 유산으로 남긴 것이 없었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꽤 부유했지요. 유신 시절에 정치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가, 패전 이후에는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벌었어요.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벌었지만, 돈이 명예도 지켜주었어요. 누구도 대놓고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위력이 있었지요.
그렇게 해서 지금 여희씨 앞에 그림과 글들이 나타나게 된 거랍니다.

“왜 그동안은 그렇게 세상 몰래 간직하시다가 이제 와서 전시까지 하셨어요?”
“확신이 없었어요. 할아버지의 뜻을 아까운 마음에 따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컥 세상에 내놓기도 무서웠어요. 과연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게 옳은가 하는…”
“이제는 왜…”
내 물음에 리에는 슬며시 웃었다.
“내가 아파요. 그래서 이제 그만 평생을 미루어왔던 일에 대해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어요. 그냥은 도무지 불태울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세상에 나혜석 씨의 그림과 글들을 넘겨주는 것은 싫었어요.”
리에는 나직이, 하지만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나와 할아버지가 서로 적절하게 합의를 한 게 아니겠어요? 전시회를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아버지의 인생을 기념해드리고, 그다음에는 할아버지의 뜻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그림과 글들을 넘겨주지 않는 거니까요.”
나는 리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장난처럼 결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믿어지지 않아요?”
나는 물끄러미 리에를 바라보았다. 태도로는 속마음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일본사람이다. 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러는 것일까.
“사실은 내 생각이에요.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할아버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들었죠. 그래서 나 역시 할아버지처럼 세상과 나 사이에 철조망을 가지게 된 사람인지도 몰라요. 덕분에 세상 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아왔죠. 멀리 떨어져서 보니까 더 잘 보여요. 그래서 항상 세상 사람들의 내심을 지켜보게 되었죠. 나는 그림을 전공했지만, 이후로 그림을 그리거나 하지도 않았고 직장생활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림을 사고파는 게 내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한국의 화단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도 잘 안다는 뜻이었다.
“여희씨 일에 대해서도 벌써 알았어요. 누구 한 사람 일을 알려고 든 것이 아니라, 그림이나 화단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라도 모으고 수집해야 하니까요. 심지어 모조품 밀수에 대해서까지 다 정보를 모으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의 나라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넘겨주지 말자는 거였어요.”
“한국 화단에요?”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말이에요. 그게 누구든.”
“하나만 솔직하게 듣고 싶어요.”
나는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림들은 진품이던가요?”
리에가 웃었다.
“가짜라면 무엇 하러 태우겠어요?”

책을 두고 돌아서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비식이 열렸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는 내게 리에가 말했다.
“그만 바라보세요. 그리고 잊어버려요. 세상은 변하지 않으니까 자기를 지켜요.”
나는 리에를 돌아보았다. 리에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달아나서 살고 있는데 그런 말 하실 필요 없잖아요.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노트를 바라보다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아마도 노트는 태워질 것이다. 그것은 리에가 쓴 노트이고, 리에 이외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달라고 할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갖고 싶었다.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나는 우산을 든 채 자꾸만 리에와 노트를 번갈아 보면서 길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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