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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장 - 잠적(disappear)
1.

이제 정국은 혼란과 공황상태로 들어갔다. 정부는 계엄령까지도 검토할 지경에 이르렀다. 벌써부터 공안정국으로 들어간 지 오래지만, 거기에 계엄령까지도 선포해야만 하지 않는가 하는 의견이 고위 당직자들 가운데에서 퍼져나갔다.
하지만 계엄령을 선포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국가가 입을 타격이 너무 심대했다. 글로벌한 시대에 경제와 외교를 완전히 망가뜨릴 작정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만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위기감이 고조된다면, 제2의 IMF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국내용이었지, 국외에서는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했다.
괴상한 일은, 프리랜서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알았는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너무 조여진 상황이어서 숨어들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 동안, 난처해진 조직은 공안부였다. 손을 떼고 소년부에서 일하는 두진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는 영란과 대운, 진구에게는 차라리 편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두진은 속이 편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제는 옷을 벗어야 하지 않나, 망설이고는 했다. 직업상 무력감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다.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 검사들이나 형사들에게 똑같이 닥치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는 간혹, 미궁에 빠진 사건을 잡고 평생을 보내는 수사관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두진 역시 그런 무력감과 모멸감에 시달렸다.
프리랜서가 가만히 있으면 공안부에서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마리는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있었지만, 하라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버티고 있는 마리 역시 뾰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계속해서 수사를 해도 수사는 지진부진했다.
부산에서 영란과 대운이 결혼을 한다고 알려왔다. 함께 고생을 하면서 정을 쌓더니, 결국 사랑으로 발전한 모양이다. 두진은 둘 모두에게 아무 사고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랜서를 상대하는 위험한 수사에서도 무사히 복귀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결혼식 날, 두진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비행기를 탔다. 부산은 추억도 많고, 그만큼 아픔도 많았던 도시다. 처음 프리랜서와 마주친 도시가 바로 부산이었다.

“우리 김팀장 능력 있네?”
두진이 신부대기실로 가서 영란에게 말했다.
“요즘은 연하가 대세예요.”
영란은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라도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서 잊어버리면 그게 더 좋다. 어쩌면 잊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학하는 자신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대운도 행복해 보였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검사님!”
“너무 웃지 마라. 실없어 보인다.”
“우헤헤.”
“그렇게 좋으냐?”
식사를 하려고 테이블로 가보니, 그 자리에 진구와 형식이 와 있었다.
“같은 경찰에서 그다지 많이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두진이 묻자, 진구가 씁쓸하게 웃었다.
“경찰서에서는 거의 왕따 수준입니다.”
“왜?”
“아, 그거 뭐 뻔한 거죠. 뭐, 저도 자리 옮기려고 신청해놓았습니다. 고향에 가서 지역경찰이나 하려고요.”
“이유가 뭔가?”
“뭐, 위에서 안 좋게 보니까 알아서들 기는 거죠.”
형석이 웃었다.
“그나마 저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부 좌빨들이라 그런 거 없어서 다행이고요.”
“위에서 왜 안 좋게 보나? 누구보다 열심히 수사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두진은 입맛이 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왜 그런지는 안 봐도 알 만한 장면들이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으면 대가리가 문제지, 아래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무슨 죄가 있나. 이해하기 어려운 패거리 문화다.
“자네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전 서울서 태어났고요. 제 아버님 고향이 춘천입니다.”
“춘천? 좋은 데로 가네? 나도 거기서 변호사 개업이나 할까? 그럼 자네 인맥으로 사건 좀 많으려나?”
“대환영입니다.”
형석이 끼어들었다.
“엇? 검사님. 퇴직하시려고요?”
“농담이다. 기자 정신 발휘하지 마라.”
두진이 형석의 뒤통수를 때렸다.
“다 옷 벗어도 검사님은 옷 벗으시면 안 됩니다. 도대체가 왜들 쓸 만한 인간들은 죄다 옷 벗고 이상한 인간들만…”
퍽. 이번에는 진구가 형석의 뒤통수를 갈겼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검사님한테 쓸 만해? 인간? 돌았나?”
“아, 죄송합니다.”
“아니. 쓸 만하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셨다. 두진으로서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술로 풀기 싫어서 애써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사이에 산에도 다니고, 낚시도 해보았지만 도무지 어느 한곳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공안부는 아주 초상집이던데요?”
형석이 술에 취해서 말했다.
“검사가 한둘도 아니고, 경찰력도 엄청나게 쏟아부어서 수사하는데, 전혀 그림자도 밟지 못하고 있으니 죽을 맛이죠. 기자들도 은근슬쩍 다시 오두진 검사가 훨씬 낫지 않느냐? 왜 교체해서 그날 그런 사고를 당하고, 게다가 지지부진하게 수사를 하느냐는 말들이 흘러나옵니다.”
“사실이 그렇지. 우리 검사님만큼 제대로 수사할 검사도 없지.”
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공항에서 검사님 말씀대로만 했어도 안 일어날 사고였는데 말이야.”
“지나간 시간들 돌이켜봐야 아무 소용 없는 거다. 다들 그러잖냐? 성공한 자는 앞을 바라보고, 실패한 자는 뒤를 돌아본다고.”
두진은 술잔을 들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옛날에는 양주가 더 맛있더니, 요즘은 소주가 왜 이렇게 맛있냐? 천하에 좋은 술도 소주를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다.”
형석이 웃었다.
“저도요. 인생의 쓴맛을 보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에라이. 인마. 어린놈이 무슨 인생의 쓴맛 어쩌고…”
진구가 수저로 형석의 이마를 때리려고 들었다.
“어엇? 넌 인마, 몰라서 그래. 내가 그때 너희 팀 도우느라 기사 낸 사실 때문에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가지고, 얼마나 끌려다닌 줄 아냐? 그 건으로 고등법원까지 갔다.”
“벌금 물었지?”
두진이 묻자 형석이 싱긋 웃었다.
“예. 합의 본 거죠. 결국. 그 정도로 끝낼 테니까 그만하자. 뭐 그런 거죠.”
“그래. 끝까지 가는 것보다는 낫지. 서로 부담스러운 일이니까.”
두진은 웃으면서 입에 술잔을 털어 넣었다.
“미안하게 생각하네. 제대로 끝도 보지 못할 일에 자네들 끌어들여서 여러 가지로 민폐만 끼치고 말이야.”
“아, 아닙니다. 검사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로서는 일생에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두진이 쓰디쓰게 웃었다.
“안 하는 게 좋았던 경험이지.”



2.

두진이 마리의 전화를 받은 것은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단풍 구경을 갈 겸 해서 휴가를 내고, 지리산에 올랐다가 서시천 강가로 빠져 섬진강을 향해 걷던 날이었다.
‘오검사님?’
“누구요?”
‘마리예요. 내 한국말 많이 늘었죠?’
“많이 늘었군. 무슨 일입니까?”
‘잠시 만나서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괜찮아요?’
“내게 지금도 볼일이 남았소?”
‘오검사님 아니고는 제대로 아는 게 있어야 말이죠.’
“무슨 뜻입니까?”
‘프리랜서가 부산에 나타난 것 같아요.’
“뭐요?”
‘휴가 중이시라면서요? 부산에 잠시 와주실 수 없어요?’
“휴가 다 끝나가는데…”
‘아니면 계신 곳으로 우리가 갈게요.’
“여기로 온다면 만날 수 있겠습니다.”
‘거기로 갈게요.’

화엄사 입구의 개울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리는 의외로 귀국했던 하라와 함께 나타났다. 하라는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일본에서 야쿠자들이 단합대회를 한답시고 부산에 들어왔어요.”
마리는 탁자 위에 일본의 폭력배들 사진을 펼쳤다.
“그래서 하라씨도 부산까지 쫓아왔죠. 한국의 조직들과 손잡고 돈놀이를 하려는 것으로 파악이 되었는데, 그 회합 장소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하라씨가 나한테 연락을 했고요.”
“무슨 일이라는 겁니까?”
“두목 하나가 실종되었어요.”
“실종?”
“코모도 호텔에 묵었는데, 밤에 여자와 함께 지내다가 한 잔 더 한다고 밖에 나갔다가 행방불명이랍니다.”
“경찰에 신고했나요?”
“야쿠자들이 경찰 찾을 리가 없잖아요? 자기들끼리 찾는다고 부산스럽다고 해요.”
“그게 프리랜서와 무슨 상관입니까?”
“실종된 작자가 다케다와 동지라는데요?”
“그거야 뭐 원래 우익과 야쿠자는 오래전부터 손을 잡았으니까.”
“같이 있던 여자는 그 자리에서 같이 실종된 게 아니라 부산의 조직들에게 잡혀간 듯하다는 게 하라씨의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그게 프리랜서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지 똑바로 말을 좀 합시다.”
“하라씨가 한국의 기관에 연락해서 폭력배들로부터 신병을 확보했는데, 그 여자가 진술한 내용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어요.”
마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이패드를 내밀었다. 두진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사진과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이름은 소영화, 동래에 있는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였다. 그녀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특히 인물이 출중해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며칠 전에 술집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시니까 몇 명이 미리 준비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틀 전, 접대부 아가씨들과 함께 술자리로 불려나갔다. 손님들은 일본 사람들로 폭력배들이라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노인이 그녀를 마음에 든다고 찍어서 그날 밤에 함께 잠자리를 해야만 했다. 매너도 좋고 꽃값도 후한 사람들이어서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다. 호텔에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노인네가 출출하다면서 호텔 음식은 맛이 없으니까 부산의 유명한 식당 알면 같이 가자고 해서 나갔다.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는데, 눈앞에 모범택시가 와서 섰다. 모범택시를 탔는데, 갑자기 독한 스프레이를 안면에 맞고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혼자 택시 안에 앉아 있었다.

“이 장면을 보면 프리랜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마리와 하라는 수법에서 프리랜서를 떠올린 듯했다. 게다가 다케다와 연관이 있다고 하니까 더 의심하는 것 같았다.
“뭔가 안 맞는데요? 프리랜서는 이제 다케다 수준의 인물을 쫓을 상황이 아닙니다. 이미 그 윗선을 찾아서 올라갔지 않습니까?”
“전 대통령은 TC가 아니었어요. TC는 어느 인물이 아니라 단체를 뜻하는 거예요.”
“그 TC에 대해서 아십니까?”
“그거야 모르지만, 어쨌든 주시할 만하잖아요?”
“나야 뭐 이제 프리랜서에 대해서…”
“공안부는 수사를 하는 게 아니라, 꿰어 맞추기를 하고 있어요. 북쪽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고 거기 맞추려다 보니까 실체에 접근할 수가 없는 거죠.”
마리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래서 아무 보탬이 안 되네요.”

마리와 하라를 만나고 헤어져서 서울로 왔다. 이미 잊은 일이다. 청소년 범죄들로 바쁘게 며칠을 보냈다. 청소년 문제는 해결하는 보람이 컸다. 작은 사건들이지만, 해결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뉴스를 접했다.
‘발견된 시체는 즉시 신원이 밝혀졌습니다. 일본인으로 67 세의 노구치 가즈오씨입니다, 시신은 전체적으로 심하게 훼손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그에 반해서 죽기 직전에 지독한 고문을 당한 듯한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두진은 정신이 퍼뜩 들어서 뉴스를 바라보았다. 전화가 울렸다.
‘마리예요. 내 예상이 맞았죠?’
“글쎄요.”
‘여기 수사본부에 김영란씨하고 있어요. 내려오시지 않겠어요?’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3.

수사본부에서는 눈치가 보여서 광안리의 바닷가에서 영란과 대운을 만났다. 마리가 자기네 안전가옥을 빌려주었다.
영란이 사건 전체에 대해서 설명했다.
“납치되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한 듯해요. 발견되었을 때에는 을숙도 아래 뚝방도로의 트럭 짐칸에 눕혀져 있었는데, 멀쩡해 보이도록 똑바로 눕혀져 있었어요.”
영란이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끔찍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있어요. 결국 직접적인 사인은 장파열이지만, 고문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아주 전문적인 것이었어요.”
“전문적이라는 게 뭐야?”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부분만 찾아서 고문하는 방식 있잖아요? 손톱 밑, 입안, 귓속, 눈꺼풀…”
“이 사람에 대해서 자료 있나?”
영란이 파일을 건넸다.
“하라씨가 준 파일인데, 다케다와 동지이기도 하지만, 자유경제련(自由經濟聯)의 회원인 것으로 보아서 신분이나 위치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단체인데?”
“십여 년 전부터 생긴 단체인데, 이론이 우경화하는 것과 맞춰서 생긴 단체입니다. 주로 경제인들의 집합인데, 그 회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춰져 있다고 해요. 노구치가 회원이라는 것도 마리가 알려줘서 알았어요. 하라도 모르더군요.”
“경제단체가 비밀에 감추어져 있다?”
“국제적이라고 하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끼어 있을 거라던데요?”
“그래서 야쿠자들은 돌아갔나?”
“야쿠자들은 사건 해결을 위해서 악착같이 부산에 머물고 있어요. 자기들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겠죠.”
“마리가 프리랜서라고 단정할 만하군.”
두진은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갔다. 바닷가를 내려다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다시 빠져들지 말자. 그 굴욕을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머리에서는 그렇게 말하는데, 가슴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잡고 싶다. 이제는 협조도 바랄 수 없고, 다들 색안경을 끼고 보아서 이제나저제나 옷 벗을 날만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은 검사니까, 아직은 대한민국의 검사로서 널 잡고 싶다.
다시 들어서며 물었다.
“마리가 그 명단 구할 수 있다던가?”
“없다던데요? 확실한 파악이 안 되는 단체랍니다.”
“모사드에서까지?”
“예. 마리 정도의 직급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비밀 파일이랍니다.”
“거기 한국인이 끼어 있다?”
“명단은 모르지만, 그렇게 들었다고 해요.”
두진은 프리랜서의 그림자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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