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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나는 그저 이런 생각으로 산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나 끼치지 말자. 그런 한도 내에서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 하며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 인간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 과잉 기대도 말고 과장된 절망도 치우고, 서로 그나마 예쁜 구석 찾아가며 참고 살자 싶다. 큰 기대 않고 보면 예쁜 구석도 꽤 있다.

그러나 이건 결국 자기변명이다. 그래야 남들이 나도 참아줄 테니, 어차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살 것도 아니면서 인간의 본질적 한계, 이기심, 위선, 추악함 운운하며 바뀌지도 않을 것들에 대해 하나 마나 한 소리 하지 말고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존재답게 최소한의 공존의 지혜를 찾아가자는 소리다. 사실 의미를 따져 묻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세상은 완고하고 인간은 제각기 어리석다.

게다가 ‘다름’은 몹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제발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노력을 해나가자고요.”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될 정도로 백인 경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로드니 킹이 그로 인한 LA 폭동 때 평화를 호소하며 했던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타심이 크지도 않고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스트도 아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법관의 일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마음을 무겁게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살아가며 만나는 불합리한 일, 안타까운 일, 분노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신문을 읽으며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분명히 난 내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관심 없으며, 누가 뭐라든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다 가고 싶을 뿐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분명히 내 일이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들이 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책없이 줄줄 흐르며 내 몸과 마음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도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공부하는 젊은이가 부잣집 사모님 앞에 잘못 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앞이 아득해진다. 한남대교를 지날 때마다 십 년 넘도록 마주치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은 여전히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그 현수막을 아이 아빠가 16년째 새것으로 바꿔 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모두가 경험한 순간이 있다. 눈앞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시퍼런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순간, 몸이 떨리고 무섭고 무력하고 울음조차 안 나오는 시간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평범한 일상에서도 이런 순간들을 피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상처 주고 상처받아 피 철철 흘리는 사람들을 늘 만나야 하는 법정에서는 또 어떻겠는가.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상궁 마마님(드라마 <대장금> 중)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격려를 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 『개인주의자 선언』 중에서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80쪽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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