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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인터뷰
21. 인터뷰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길고 지루했던 장마가 이대로 끝난 것처럼 맑은 하늘에 햇살이 밝았다. 대신 이제는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가게에 그만두겠다고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수면제에 기대서 며칠을 자고 또 잤다. 잠이 오지 않으면 책을 읽었다. 고맙게도 내게는 읽을 책이 많았다. 특히 나혜석에 관한 책은 일본어로 된 책까지도 전부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쓸데없이 메모를 해가면서 지냈다. 같은 기사를 두 번 청탁 받아서 쓸 리도 없고, 논문을 쓸 것도 아닌데. 나는 그래야만 할 것처럼 며칠을 방 안에 처박혀서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죽였다.
그사이에 집이 나가고 주변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은 그런 준비보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귀국해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귀국하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도, 아무리 속이 심란해도, 인간은 먹고 본다. 죽을 것만 같은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먹고 싼다. 아침부터 배가 고파서 냉장고를 뒤져서 이것저것 꺼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경희였다.
“나와.”
“어디를?”
“아래층이야.”
“나 이제 일어났어.”
“씻고 차리고 나와.”
“무슨 일인데 그래?”
“인터뷰 잡았다.”
“응?”
나는 경희가 나를 도우려고 기사를 작성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급하게 인터뷰를 하자고 들지는 몰랐다. 그런데 신문 인터뷰에 뭘 차려입으라고 하나.
찬물로 샤워를 하고 대강 머리를 만진 다음 집을 나섰다. 만일을 생각해서 꼼꼼하게 내 기억들을 적은 메모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차에 오르자, 경희가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너, 이런 거 안 가지고 있지?”
“뭔데?”
나는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갖가지 기사와 내 그림의 사진과 목록 등이 빼곡했다.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조리 찢어버리고 태워버린 것들이었다.
“이걸 다 어디서 구했어?”
“다 가지고 있었지.”
경희가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이 징그러운 걸 네가 가지고 있겠니?”
나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희는 시원스럽고 덜렁대면서도 언제나 용의주도한 친구였다. 그러면서도 어느 때는 언니나 엄마처럼 챙겨주는 속 깊은 면을 가지고 있다.
“가다가 옷 좀 사자.”
“옷?”

회사로 가는 길에 옷을 사서 갈아입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까지 했다. 너무 요란하게 굴어서 나보다 더 긴장한 듯 보였다.
“각오했지?”
“그래. 각오 했다. 그런데 네가 더 비장해 보인다.”
“그래? 내가 너 죽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나 안 죽어.”
나는 경희에게 웃어 보였다. 어쩌면 우리만 비장하지, 한국에서는 그게 뭐 어때서? 이럴지도 모른다. 화단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야 한국에서 워낙 비일비재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화면빨 좀 받아야 하는데.”
“무슨 화면빨? 내가 사진 모델이냐?”
“사진이 아니거든?”
“그럼?”
“내가 기획 좀 했다.”
“무슨 소리야?”
“신문이 아니라, 공중파다.”
“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생각을 해봐라. 이미 한 번 떠들었다가 사그라진 사건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신문 가십란에 기사 좀 난다고 해서 눈이나 돌리겠니?”
“그렇다고 어떻게 공중파를 잡아? 그럴 만한 이야기가 될까?”
“되게 해야지. 내가 얼마나 사방으로 헤헤실실거리면서, 온 선배들 다 연락하해가면서, 아부를 떨어서 이루어진 건 줄이나 아니?”
경희는 연신 떠들어댔지만, 나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해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귓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일은 커져버렸다. 이제 정말 돌아설 수 없다. 이왕 돌아설 수 없으면 일이 더 커지는 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경희네 회사에 도착하자, 정말로 방송용 카메라를 든 주재원들이 인터뷰실 안에 들어서 있고 음향이니 조명이니 여러 가지가 급조되어 있었다.
경희는 어색하게 앉은 내게 찬물을 한 잔 가져다주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기억해라. 전번 사건으로 사람들이 다 알려니 생각하지 말고 처음 말한다는 심정으로 세세하게 이야기를 해야 해. 대본 봤지? 내 대본 그대로 차근차근 말해.”
나는 물을 마시고 자리에 앉아서 경희를 바라보았다. 속이 진정되기를 바라면서 경희의 방송용 멘트를 들었다. 경희는 지난 사건에 대해서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미술상이나, 화단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더니,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소송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소송인가요?”
“내 그림들을 되찾기 위한 소송입니다.”
“지금 주장하시는 그림들은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모두 이서정 화백님의 그림들로 알려져 있는데요. 어떤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시는지 자세히 좀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어요?”
“얼마 전에 문제가 일어났던 걸 이미 기자님도 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렇지만, 항간에는 너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도운 걸 가지고 갑자기 자기 그림이라고 들고 나서서 문제를 일으킨 것 아니냐 하는…….”
“도운 적 없어요. 모르는 사람인데 뭘 도왔을까요?”
“이서정 화백과 모르는 사이였다고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처음으로 전시회를 했어요. 그림이 좋다고 갤러리 사장님께서 전시회를 하면 구매상들한테 소개도 하고 그러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어렵게 전시회를 했지만, 그림은 하나도 팔리지 않고 갤러리를 빌린 값조차 건지지 못했어요. 사실 많이 어려웠어요. 그동안 그림만 그리느라 빚도 좀 생기고, 그 상태에서 이제 더는 버티기도 어렵고… 갤러리에 나머지 돈을 내야 하는데… 그 돈을 마련하려면 다시 빚을 내야하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림을 한꺼번에 파실 생각을 하신 건가요?”
“아니요. 전 그런 방법을 모르니까 위탁판매나 그런 걸 생각했어요. 그런데 갤러리 사장님께서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요.”
“갤러리 사장님께서요?”
“네. 좋은 방법을 알려주더군요. 그림은 또 그리면 되니까 괜찮은 가격에 그림에 대한 권리 일체를 넘긴다면 갤러리 비용만 아니라, 그림 그리느라 고생한 값도 좀 받을 수 있고, 또 앞으로 그릴 수 있는 여윳돈도 좀 챙길 수 있다고요.”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요?”
“받아들였어요. 전 그 당시에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고 당장 돈도 필요해서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일 같아요.”
“그런데 그 그림들이 다시 전시가 된 거였죠?”
“네. 화단에 충격을 줄 만큼 새로운 경향으로 소개되면서 이서정 화백의 그림으로 둔갑했죠. 그리고 호당 천만 원을 호가하는 그림이 되었더군요.”
“그런데 그 그림들이 다 팔린 상태에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아는데요? 본인이 문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셨죠?”
“당시에는 그랬어요. 내 그림 작업을 옆에서 본적이 있는 친구가…”
“그 친구라는 분이 지현우 씨 맞죠?”
“네, 맞습니다.”
“직업이 남자분치고는 특이하게 큐레이터시고요?”
“네. 그 친구가 화단의 비일비재한 사건이라고 신문 인터뷰를 하면서 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이서정 화백의 그림이 실은 내 그림이라는 기사가 뜨고 서로 명예훼손이니, 그림들이 결국 가짜니 해서…”
“그런데 이제 와서 소송을 한들 그게 승산이 있을까요?”
“내 그림이니까 도로 돌려받고 싶어요. 그리고 당시에 받았던 돈도 돌려드리려고요.”
“아, 그러니까 그림을 다시 회수하게 해달라, 받았던 돈은 돌려주겠다, 이런 거죠? 말하자면.”
“네, 맞습니다.”

경희는 다시 방송용 멘트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화단에 종종 있는 일이라는 소문도 있다면서, 소송의 결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리고 녹화는 끝났다.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솜처럼 풀어진 몸을 이끌고 경희네 회사를 나섰다. 경희는 뒷마무리를 위해서 분주했고, 나에게 기다리라고 했지만, 기다리고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 가슴이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뛰어서 도저히 어디에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다시 불면의 밤이 시작되려나 하는 불안감이 다가왔다.

경희가 몇 번 전화했지만, 방송 후에나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방송이 나가는 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방송은 역시 경희가 기획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경희와 나의 인터뷰는 많이 편집돼 있었고, 도쿄주재원이 만난 예전 화단 사건의 주인공인 나는 이제 와서 다시 돈을 탐내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세상은 역시 내 예상대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거잖아.”
경희는 전화에서 쿨하게 웃어제꼈다. 그래, 맞다. 이제 시작인걸.
“술 마실래?”
“그럴까?”
나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섰다.

“흥미진진하다. 이제 어쩔래?”
경희는 맥주집 창가에 앉아서 나를 건너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집 나갔어.”
“그래?”
경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이 나갔다는 말은 이제 귀국한다는 말이 된다.
“수면제 먹지 마.”
“안 먹어, 이년아.”
경희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잡았다.
“이겨라.”
“이길게.”

경희와 헤어져서 밤거리를 걸었다. 술기운이 있는데도 정신이 너무 말짱했다. 사실은 수면제를 먹을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 이 남자. 방송을 보았구나.
“선배.”
“언제 귀국해?”
“며칠 걸려.”
“티켓 끊고 전화해.”
“그래야 해?”
나는 조금 엇나가게 말했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니까. 이제 와서 내 남자노릇을 할 필요는 없는데.
“소송 준비를 혼자 할 수 있겠어?”
“아, 참. 돈이 모자라.”
“알았어. 어떻게든 해볼게.”
“그래. 고마워.”
“신조어 탄생이다.”
“무슨?”
“갤러리게이트라고 하더라, 신문들이.”
“이름 멋지네.”
“널 잡아먹으려고 들 것 같은데?”
“잡아먹으라고 해. 그러라고 가는 거니까.”
현우는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저번처럼 달아나지 않아서 좋은 모양이다. 그냥 달아나는 나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었지.
“아, 그런데…”
“응?”
“어쩌다가 마음이 변한 거야?”
“몰라. 그냥 억울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불면의 밤을 이겨내려고 수면제를 치우고 어둠 속에 누웠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을 만나고 나서 이제까지 매일 비가 내렸다. 요 며칠 비가 그친 것은 당신이 나를 축하라도 해주려고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나도 당신처럼 이 세상의 모든 저주를 받게 된 것에 대한 위로였을까.
세상의 모든 저주와 비난을 각오하고 당신은 세상을 향해 금지된 것들을 말했다. 기억난다. 당신이 한 말들. 수많은 금지된 말들.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무서운 진실들. 그 무수한 비난과 저주를 받아들이면서 당신은 멈추지 않았다.
나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내일은 화구를 사야겠다. 며칠이라도 여기 머무는 동안 잠이 오지 않으면 그림을 그려야겠다.
나는 화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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