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鄭奎雄)
* 서울 출생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 중앙일보 문화부장 편집국장대리 논설위원 등 역임.
*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등 역임.
* 저서 - 『휴게실의 문학』, 『글동네 사람들』, 『글동네에서 생긴 일』, 『나혜석 평전』, 『추리소설의 세계』, 『글속 풍경 풍경속 사람들』 등
* 역서- 『케네디 가의 여인들』(펄 벅), 『애너벨 리』(에드가 앨런 포 시선집), 『지하철 정거장에서』(에즈라 파운드 시선집) 등


<연재를 시작하며>

‘나혜석 평전 - 내 무덤에 꽃 한 송이 꽂아주오’(중앙 M&B)를 펴낸 것은 2003년 12월이었다. 나혜석기념사업회(회장 유동준)로부터 청탁을 받은 것이 그해 정초였으니 꼬박 일 년 동안 그 일에 매달렸던 셈이다.

그 얼마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나기까지 30여 년 동안 수많은 유형의 글을 써왔으나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다소 막막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평전’이라는 장르가 지니는 제약성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사업회에서 건네받은 자료와 내가 구한 자료 등 많은 기록들을 검토하면서 나는 차츰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크나큰 흥미와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나혜석’이라는 이름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최초의 여자 유학생’, ‘시와 소설을 함께 쓴 여류 화가’, ‘독립운동가’, ‘최초의 여성해방론자’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화려한 ‘찬사’들은 ‘불륜녀’라는 딱 한마디 말로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하기야 요즘에도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속된 말로 ‘바람을 피웠다’면 여자의 편이 돼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혜석이 겪었던 1930년대의 시대배경과 요즘의 세태를 비교한다면 지금은 그런 일을 겪은 여성이라도 얼마든지 아픈 과거를 덮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

나혜석은 그렇지 못했다. 스물네 살에 결혼하여 자식 넷을 낳고 평탄하게 예술과 집안 살림을 병행하던 그녀는 남편과 유럽을 여행하던 중 남편과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파리에서 최린과 몇 차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넷이었다.

자식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내쫓긴 나혜석은 자신이 가진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만을 무기로 홀로 서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냉혹했다. 마침내 나혜석은 누더기 차림으로 거리를 떠돌다가 행려병자로 길에서 숨을 거두니, 나이 쉰둘이었다.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만약’ 세상이 그녀의 예술가적 재능만이라도 높이 사서 그녀의 재기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보였던들 그녀가 그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까.

나혜석 평전을 집필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글 속에서는 내게 주어진 자료와 기록을 벗어난 섣부른 추측과 소설가적 상상력은 허용되지 않았다. 오랜 언론계 생활을 거치는 동안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따위의 이른바 ‘육하원칙’에 길들여진 탓도 있겠지만 자칫하다가는 평전의 본질을 훼손시킬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록과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는, 나혜석을 주인공으로 하는 픽션을 써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책이 출간된 뒤 나혜석기념사업회의 유동준 회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제까지 나온 어떤 책보다도 나혜석의 진면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과분한 찬사였으나 미진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기록과 자료에 얽매어 나혜석의 감춰진 내면을 파헤치는 데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몇몇 후배 문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직도 나혜석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나혜석에 대해 품었던 구상을 실현해볼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이렇게 해서 쓰게 되었다. 이제 이 글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2014년 1월 정규웅


1. 아르코에게


그날부터 매일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가을날의 차가운 비는 매일 바람과 함께 내 방의 창을 두드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한 날들 내내 불면의 밤을 지냈다. 언제나 배가 고팠고, 불면의 밤은 내 머릿속까지 비에 잠겨들게 했다.
어쩌면 당신을 몰랐던 날들이 내게는 더 행복하고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하루하루를 살아지는 대로 살았던 패배의 시간들이 내게는 훨씬 더 편안했다.
세상과 싸우는 일은 내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지만, 우리는 그 시스템에 저항할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었다 하지 않고 저들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는 거대한 저들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어리석음을 겪었고, 그 대가로 타국 땅에 유배되어 와서 굶어죽지 않고 잘 버텨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당신을 알기 전까지는. 그 무덥던 어느 여름날 이전까지는.

날은 덥고 에어컨은 고장이었다. 냉장고의 생수를 꺼내 마시면서 땀으로 지끈거리는 샌들을 벗어던졌다. 의자에 앉아서 손바닥만 한 선풍기를 틀고 두 발을 책상 위로 올려서 뒤로 기대앉았다.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축 늘어져서 꼼짝도 하기 싫다.
들어오면서 창틀에 던져놓은 핸드폰이 진동을 시작했다. 알고 있다. 빨리 일어나서 핸드폰을 받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는 걸.
핸드폰을 받았다.
“희짱. 어디 있어?”
귀여운 척은. 웃기는 놈.
“집.”
“지금 나오면 내가 태워다 줄 거야.”
“아직 씻지도 않았어. 먼저 가.”
“기다려 줄까?”
“그러지 말고 먼저 가서 청소나 좀 해.”
핸드폰을 책상 위에 집어던지고 땀에 젖은 옷을 벗었다. 찬물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귀찮아도 머리에서 땀내가 날 지경이어서 시간을 좀 더 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화장을 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밤낮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밤낮으로 돈이 필요하니까. 두 조 반. 방 안에 싱크대와 벽장이 있는 초라한 마루바닥의 집. 베란다에 줄줄이 구두를 늘어놓고 살아야 하는 방이지만, 겨울이면 난방이 되지 않아서 전기장판에 의지하고 지내야 하는 방이지만, 유흥가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한 달이면 육만 엔을 받는다.
한때는 이런 낯선 도시에서의 궁핍함이 무서워서 영혼을 팔아먹으려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영혼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저들은 생각하는 나를 귀찮아했다. 자기네처럼 사고하고 대화하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게는 이제 몸뚱아리밖에는 팔아먹을 게 없다는 뜻이 된다. 그걸 알고나서는 미련 없이 한국 땅을 떠났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고등학교 동창생 하나밖에 없는 타국 땅에 와서 한국에서 오는 뜨내기 여행자들에게 술을 팔아서 먹고산다.
도쿄에서의 내 신분은 ‘스나쿠의 미세코’다. 그러니까 누구도 왜 여기로 와있느냐고 묻지 않아서 좋다. 가끔 궁금해서인지, 나와 동침을 위해서인지, 고국에서 온 아저씨들이 묻기는 한다.
“여기 어쩌다 와 있어요?”
나는 대답한다.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꼭 다시 묻는다.
“바텐은 아르바이트인가?”
나는 녹음기처럼 말한다.
“생활비가 비싸서요.”
아저씨들은 대부분 더는 묻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 만 엔짜리 지폐를 놓고 가기도 한다. 호의로 그러든지, 내 웃음이 마음에 들어서든지.
그래. 몸뚱아리라면 자신 있다. 난 아직 건강하고, 내 미소에서는 빛이 난다. 내 웃음은 완벽하다. 매력적이고 뭇 사내들의 가슴을 뒤흔든다.
망상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지루하게 술에 얼음을 타주고, 재떨이를 갈아주고, 담뱃불을 붙여주는 사이에 시간이 흐른다. 열시가 넘어가면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스나쿠는 손님이 집에 가지 않는 한, 문을 닫지 않는다. 새벽이든 날이 밝든 계속해서 술을 따라주고 재떨이를 갈아준다.
“손님 많네?”
언제 들어왔는지 경희가 앞에 와서 앉는다. 바로 앞에 앉은 손님 옆에 천연덕스럽게 앉더니 백을 올려놓고 담배를 찾아 문다.
대꾸 없이 재떨이를 놓아주었다.
“맥주 한 잔 줘.”
“맥주?”
“그래. 맥주. 이제 독한 술 안 마시기로 했어. 출근해서 너무 힘들어.”
“그럼 술을 끊어야지. 맥주면 뭐가 다르니?”
“맥주 한 잔이니까.”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놓아주었다. 내 유일한 친구 경희. 신문사에서 파견나와 있는 주재원. 지사라고 해야 주재원 셋에 현지인 둘이 전부인 작은 사무실에 목숨 걸고 일하는 -스스로의 표현대로라면 안 짤리려고 이빨로 물고 늘어지는- 도쿄특파원.
“내일 낮에 놀지?”
쓸데없이 지방에 취재 가는데 심심하니까 같이 가자고 하면 거절해야지.
“일주일에 하루 쉬는데 제대로 쉬겠어?”
“며칠 쉴 수도 있어.”
“무슨?”
“취재비 줄게. 난 그런 일에 젬병이라서 말이야.”
“돈을 준다고? 며칠 쉴 정도로?”
“어쩔 수 없지. 내 능력 밖이니까.”
“네 능력 밖인데 내 능력 안이라고 말하는 거야?”
경희가 싱긋 웃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잠시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님을 너무 혼자 내버려두면 만 엔짜리 지폐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버린다.
“끝나면 전화해. 사무실에서 밤 새울 거니까.”
경희가 알아차리고 맥주를 반쯤 마신 상태로 그냥 일어나버렸다.

습기 가득한 새벽공기 탓에 거리는 안개인지 비인지 모를 수증기로 번들거렸다. 빛을 잃은 네온사인들 사이로 파랗게 땅거미가 물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스물네 시간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아카사카의 도토루에는 여전히 젊은 손님들이 가득했다. 커피와 토스트를 시켜놓고 히히덕대는 연인들을 바라보면서 경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경희는 가슴에 한 아름 책자와 봉투를 끌어안고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 책자와 봉투를 놓더니 커피를 마시면서 가리켰다.
“열어 봐.”
“뭔데 그래?”
“네 전공.”
나는 책자부터 들췄다. 미술책이었다. 도판이 아니라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의 군데군데 눈에 익은 그림들이 들어가 있었다. 굳이 미술 전공이 아니어도 누구나 알 만한 화가였다.
“나혜석은 왜?”
“요즘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는데 네 전공이면서 전혀 관심 없는 거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책을 덮어버렸다.
“나 전공 바꾼 거 모르니?”
“미친 년.”
경희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송곳니를 내보였다.
“너 몰래 그림 그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니?”
“왜 이러는데?”
경희가 봉투에서 신문기사들을 줄줄 꺼냈다.
“나혜석에 대해서 잘 아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그게 전부다. 그림들을 본 적은 있다. 힘 있고 여성의 그림이라고 보기 힘든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미술사에서 배우기로는 말년이 불행했던 화가였다고 기억한다.
“이번에 긴자 마루이 백화점에서 전시회 열리고 있는 거 아니?”
몰랐다. 그 옛날 화가의 전시회가 갑자기 일본에서 왜 열리나? 일부러라도 안 가는 전시회 이야기를 꺼내는 경희의 속마음은 무얼까.
“이제까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나혜석의 새로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경희가 신문기사를 여기저기 펼치면서 가리켰다.
“기존에 나와 있는 작품들도 위작이 많다고 난리인데 새로운 작품들이 왕창 쏟아져 나왔다는 말이야. 덕분에 본사에서 이 작품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취재하고 조사해 내라고 하는데, 우리 지사 안에 미술 전문가가 없어. 무슨 얘기인지 감 오지?”
“미술 전문가라고 해서 위작을 판단할 수 있겠니?”
“넌 알잖아.”
경희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넌 한때 그런 일을 했잖아. 위작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알지 않니?”
나는 멍하니 경희를 쳐다보았다. 친구라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히 남의 아픈 부분을 찌르냐. 아무리 직업이 직업이라고 해도 심하잖아.
경희는 다시 책자와 신문기사들을 끌어모았다.
“이거 없애지 마라. 내가 모은 게 아니라 나혜석기념회에서 보내준 거다.”
“가져가면 되잖아?”
“이게 어디서 언니 말을 씹어 뱉고 지랄이야?”
경희가 카달로그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가져가서 자세히 읽으라는 말이야. 짭짤하게 챙겨줄 테니까 상세히 인지하고 내일 이 언니랑 같이 전시회에 가자는 말이야.”
나는 멀거니 경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걸 가져가서 나혜석이 누군지 공부 좀 하고, 전시회에 가서 그림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라는 말이지? 그걸 전시회에 가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논란이 일어나도 돼. 가짜 같다, 어쩌고 해도 된다고. 이해했어?”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아도 그냥 그러라는 말이야?”
“그렇지. 이제 좀 돌아가네.”
경희가 손가락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댔다. 한국 사회 돌아가는 거, 이미 무수하게 겪어서 알 만하다만, 그래도 참 낯설다.
“근데 너 저녁은 먹었냐?”
“일찍도 물어보네.”
“가자. 언니가 열무냉면 사줄게.”
경희는 내 커다란 핸드백에 책자와 신문들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나는 멀거니 경희를 바라보았다. 피차 그닥 잘 되는 건 없는데도 언제나 씩씩하기 짝이 없는 친구. 본사로 들어가면 짤릴 수도 있는 계약직이라서 절대 귀국 안 한다는 친구. 그래도 왜인지 안 불쌍한 친구. 그래서 신기한 친구다.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고 그냥 쓰러져 잔 듯했다. 햇빛에 눈이 부셔서 눈을 떴다. 주섬주섬 일어나서 커튼을 쳐버리고 커피를 내린 다음 경희가 준 신문 뭉치를 들척였다.
대부분의 기사는 전시회에 대해서 비우호적이었다. 나혜석의 유작들은 그렇지 않아도 반 이상이 가짜라고들 하는데, 거기다가 새로운 그림과 판화들까지 쏟아져 나왔다고 하니 당연히 화단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우호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나혜석기념사업회’였다.
책자들을 들췄다. 평전도 있고 도판도 있었는데 일일이 읽고 싶지는 않았다. 대충 보니까 잘나가다가 말년을 불행하게 보낸 신여성 같았다.
‘그런 인생이야 줄을 섰지.’
말년 잘 보내는 거야 유명인답게 부자 남편 만나서 아들딸 잘 길러내는 걸로 마감하는 것 아닌가. 암이라도 걸려서 단명하지 않으면 잘 살았다고 하겠지.
평전 읽는다고 전시된 작품의 진위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진위 여부는 세밀하게 조사를 해야 가능하지 기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받으면서 커튼 사이를 보니 어느새 사위가 침침해졌다. 비가 내리려나. 초가을의 더위가 지겨웠는데 비라도 내리면 좋지.
“마루이백화점 앞으로 열한 시까지 가.”
‘와’가 아니라 ‘가’야?
“난 오늘 교토 간다.”
“뭐? 그럼 나 혼자 가라는 거야?”
“문자로 전화번호 보내줄게.”
“누군데? 너희 기자야?”
“아냐. 가서 만나면 알아.”
뭔가 미적지근해서 다시 물으려는데, 경희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카사카역의 지하도를 걷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걸 알았다. 비는 지상에서 내리지만, 지하도까지 질척거리고 사람들마다 젖은 우산을 들고 들어서기 때문에, 결국 비는 지하도까지 스며들게 마련이다.
우산을 펼쳐들고 아카사카의 부티크 거리를 걸었다. 마루이백화점 앞까지 걸어가서 비를 피해 현관 안으로 들어선 다음, 경희가 보내준 문자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바로 어깨 뒤에서 울렸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다가,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나여서 놀랐어?”
그는 여전히 정갈한 머리칼에 적당히 깎인 얼굴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 칼라에 검은 양복도 변함이 없었다.
“선배가 왜…?”
나는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그와 마주하게 된 오늘의 이 짧은 시간을 저주하고 싶었다. 지현우인 줄 알면서도 나와 마주치게 한 경희와 친구라는 것도 하늘에 대고 저주하고 싶었다.
“내 일이 이런 일이잖니?”
현우는 커피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언제나 차갑게 느껴지는 반듯한 웃음. 한 번도 내 편에 서서 이야기해주지 않은 잔인한 솔로몬.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남자.
“내 생각에는 진품일 확률이 거의 없어.”
현우는 태블릿을 내 앞으로 내밀어보였다.
“한국전쟁 때 사라진 그림들, 수원에서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는 그림들이 여기 전시회에 다 있는 거야. 이런 그림들을 일본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 자체가 가능성이 전혀 없어.”
태블릿에는 한 젊은 사내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었다. 세월에 사진의 색이 바래서 거의 세피아칼라로 보였는데, 복장은 더 오래된 듯 구식 양복 차림이었다.
“누군지 알겠어?”
“모르겠네요.”
“사토 야타. 화가야. 나혜석을 사랑한 남자.”
“지금 이 사람이 전시회를 열었나요?”
현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내 앞으로 이번에는 팸플릿을 내밀었다. 생각해보니 경희는 전시회 팸플릿은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팸플릿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사토 리에. 사토 야타의 손녀.”
팸플릿 뒷면에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사진이 동그랗게 실려 있었다.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음직한 나이 어린 손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할아버지는 늙었어도 강인해보였다.
팸플릿을 뒤집자, 아무 그림도 사진도 없는 흰 바탕에 전시회의 이름만 덩그러니 박혀있었다.

아르코에게(R-子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