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셰어/개마고원/339쪽/12,000원)

필자는 작년 연말 고교동문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후배 국회의원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기대와 희망을 잔뜩 안고 출발한 17대 국회가 기존 정치판과 마찬가지로 진흙탕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던 참이어서 필자는 그 후배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야, 17대 국회도 16대 국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더라."라고 핀잔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 후배 국회의원은 복잡한 감정이 교차된 표정으로 한 동안 나를 쳐다보다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자리를 파한 후에도 내내 그 후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초선 의원인 그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법안들도 계속 제출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의정활동을 해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계층"의 일원인 탓에 아마도 필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치인을 비난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돌리곤 한다. 오늘날과 같은 다양성의 시대에는 정치인들이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데도 일반 국민들은 왜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들을 정치인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정치인들은 많은 문제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듯 행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무런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변명하곤 하는 것일까?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국민들은 정치 계층에 대해 실망하고 정치기구와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게다가 정치 기구의 시스템 내에도 "미래가 없다"는 정서가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일반인들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결국 민주주의 질서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하원의원인 헤르만 셰어는 최근 자신이 저술한 <정치인을 위한 변명>에서 분권헌법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명발전이라고 강조하며, 사회 발전을 위한 정치인들의 노력과 일반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법과 권리가 없으면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라고 지적했다.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구속력 있는 원칙 없이는 어떤 사회도 지탱할 수 없는데 국가기관이 바로 그러한 원칙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제를 수행하는 개인을 정치인이라고 부른다. 만일 정치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성실하고 유능하게 처리한다면 우리는 평화와 안정,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사회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사적인 부의 축적과 권력 유지를 위해 이기적인 권력 놀음에 몰두한다.

그로 인해 오늘날 정치인의 위신은 처참하게 땅에 떨어져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정치인은 가장 신뢰받지 못한 계층으로 전락했다. 물론 정치인의 위신과 사회 체제의 성과 사이에 반드시 긴밀한 연관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 환경 악화가 불만과 불신을 초래하고 민중의 분노가 정치인에게 표출되며 특히 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의 소속 정치인들이 비난의 표적이 되곤 한다.

정치인들이 일반인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인들이 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권력 놀음에 빠져 사회의 목적과는 동떨어진 자기 목적만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정치인들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때로는 과도하게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부 의사들이 진료비를 조작했다고 해서 모든 의사를 탐욕적인 사기꾼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한 언론 미디어들은 정치인들의 좋은 점보다는 서로 헐뜯고 싸우는 내용들을 보도하는 데 더욱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눈에는 정치인들이 늘 자신 또는 당파의 이익을 위해서만 목소리는 높이는,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로 인식되곤 한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 정치인들의 과오나 잘못된 정치 구조의 책임이 크다. 많은 정치인들이 처음에는 서로 다른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정치를 시작하지만 점차 소속 정당이나 특정 이익집단의 노선을 따르고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로 대체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해지고 만다. 우리나라의 과거 정치사를 보더라도 보스 정치와 계보 정치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조직이나 구조가 중요했을 뿐 정치인 개개인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미디어의 발달로 개인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소속 정당의 요구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켜나가는 올바른 정치인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고 우리는 이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고 많은 비난을 쏟고 있지만 정치인들의 야망, 특성, 신념, 적절한 활동 여부 등에 따라 우리 사회는 진보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다.

정치인들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평가는 정치인들이 초래한 점이 적지 않지만 한편으로 언론미디어의 흠 들추어내기, 정치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조건적인 불신 등이 이를 확대재생산해낸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앞으로 정치인을 열린우리당 사람이니 한나라당 사람이니 하는 식으로 집단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뚜렷한 신념과 의지를 가진 개별 정치인으로서 이들을 지켜보고 격려하고 이루어낸 성과에 대해서는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우리 사회를 자유와 평화, 정의와 희망이 가득한 사회로 만들도록 해야 한다.

- 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