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중 오두막 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들라면 읽고 싶은 책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읽고 있을 때라고 법정 스님은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내 영혼은 투명할 대로 투명해지며” 책의 기상이 나를 받쳐 준다고. 그렇다면 법정 스님의 구도와 진리의 길에 함께해 온 책들은 무엇일까? 모두가 잠든 밤 홀로 깨어 산중 오두막을 밝혀 온 책들은? 그 책들 중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들어있다. 이 책의 무대인 크레타 섬을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 법정 스님은 산문집 『텅 빈 충만』에 이렇게 썼다.

산중에서도 태풍은 매년 한두 차례씩 거쳐야 하는 일이다. 이런 날 다락에 올라간 내 손에 잡힌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책장을 펼치자 거기에도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의 카페에 나가 있을 때 세찬 비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카페 안에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거기서 책속 화자인 ‘나’는 한동안 조르바를 홀린 듯이 바라보는데, 이때 조르바가 그에게 묻는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도대체 무엇이요?’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질문처럼 들렸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 낸 게 무엇인가. 그것이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는 글을 쓰고, 불교서적을 읽으면서 영혼의 구원을 찾는 사람이다. 동시에 죽은 활자를 먹고 관념을 살찌우는 지식인의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터키와 대립하고 있는 자국 그리스의 상황 때문에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느끼지만, 정작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인생의 그림자가 아닌 본질로 뛰어들고 싶다. 그런데 마침 크레타 섬의 갈탄광 하나를 빌리게 되어 거기서 새 생활을 시작해 보려 하던 중에 조르바를 만난 것이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나’를 본질로 데려가 줄 새로운 여정에 썩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조르바를 만나 그의 언어를 배운다. 약간의 미친 듯한 그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그의 춤을 배운다. 춤추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조르바는 말한다. “인간은, 춤추는 자유이다. 신은 인간의 관습과 규율을 초월하는 용서하는 이, 관대한 왕이다. 그러니 삶과 우주를 대하는 데는 이것저것 따지고 잴 필요가 없다. 오직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이해한 바를 그대로 믿으며 충실히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탐독했고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진리를 깨닫고자 했으나, 돌에 글자를 새기듯 무엇보다도 그의 삶에 깊은 자국을 남긴 이는 조르바였다. 1883년, 터키 지배하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장차 주교가 될 아이’라는 예언을 믿고 어려서부터 성직자처럼 살고자 노력했다.

조르바가 말하길, 먹은 걸로 무엇을 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사람은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두 번째 사람은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세 번째 사람은 하느님께 돌린다. 조르바는 두 번째 사람이고, ‘나’는 먹은 걸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쓰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조르바에 따르면, ‘나’의 모델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육신을 부처로 만들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이’였다.

아테네 법과대학에 입학한 카잔차키스는 아토스 산에서 신과의 만남을 시도하기 위해 순례를 떠났다. 하지만 신이 만든 세상을 악으로 배척하고 산속에서 정신과 몸을 학대하는 고행자들의 실체를 보고 이제까지의 세계관을 수정한다. 그때부터 카잔차키스는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 러시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그리고 멀리 중국과 일본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니체에서 붓다로, 붓다에서 레닌으로, 레닌에게서 오디세우스로 진리를 좇다 마침내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카잔차키스, 아니 조르바는 신으로부터 구원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인간이 수도원에 갇힌 신을 구해 내야 한다고 외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가 살았던 크레타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1995년 여름 볼일로 파리에 갔다가 그리스로 날아갔다. 다시 그리스에서 크레타로 가려면 밤배를 타야 했다. 지중해의 물빛은 투명한데, 에게 해는 신화를 잉태하고 있는 듯 신비롭고 어두웠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성루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었는데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중에서
(문학의숲 편집부 엮음 / 문학의숲 / 488쪽 / 18,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