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한여름 피서를 온 가족들에게 자신이 술집에서 노래 부른다는 걸 감추려고 며칠 쉬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해운대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들을 희롱하는 몇 명의 양아치들이 얼쩡거렸다. 문신이 여기저기 있고, 머리가 짧은 것이 영락없는 양아치들이었다. 가게에서 건달이라고 오가는 인간들을 한, 둘 보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질 낮은 이상한 진상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어느 여자들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경찰이라도 불러야 할 판이었다.
그때, 서핑을 하던 듯한 한 남자가 서핑보드를 해변에 내려놓고 천천히 그 양아치들을 향해 걸어갔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잔근육이 가득한 멋진 몸매였다.
남자는 양아치들에게 다가가서 정중하게 자중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곧 시비가 벌어졌다.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한 일은 그때 벌어졌다.
남자는 양아치들 여럿을 너무 손쉽게 제압해버렸다. 힘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고, 몸동작이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양아치들은 순식간에 모두 어딘가가 한 군데씩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모래밭에 쓰러져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과 동작으로 돌아서다가 영화를 보고 부탁했다.
“샤워장에 좀 가려는데, 잠시만 지켜주시겠습니까?”
“뭐, 뭘요?”
“아, 저 보드 말입니다. 길을 들여놓은 물건이라서 잃어버리면 아주 낭패거든요.”
영화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샤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보드를 가지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영화는 남자가 차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포츠트럭에 보드를 싣고 떠나는 남자의 모습은 영화에나 나오는 딱 그런 스타일이었다.
나쁜 놈. 감사의 인사로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하면 안 되는 건가.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같이 한잔 못 마셔서 환장을 하는 미모다. 그런데 커피 한잔하자고도 안 하다니. 얼마나 잘났길래.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며칠 후, 살고 있는 남천동의 아파트 단지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쓰레기를 들고 나서는데, 눈에 익은 한 남자가 마트 봉투를 가슴에 안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운대 바닷가에서 본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영화를 흘끗 보더니 마치 알아보기라도 한 듯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어머나.”
반가웠지만, 그저 ‘어머나’ 하고 말았다.
“이 아파트에 사세요?”
“예. 그쪽도…”
“3 동 101 호에 삽니다.”
바로 옆 동에 살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 4 동 1501 호에 살아요.”
“아, 거긴 높아서 전망이 아주 좋겠네요.”
“그럼 높은 데를 택하시지 그랬어요?”
“지금 여기 나온 집이 101 호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호텔 생활이 지겨워서 급하게 얻었는데, 아파트는 1 층이 생각보다 불편하군요.”
“그럼 언제 놀러 오세요. 우리 집은 전망이 아주 좋아요.”
“아, 초대해주시겠습니까? 그럼 와인 한 병 들고 가겠습니다.”
“와인 좋아하세요?”
“아닙니다. 실은 더 독한 술을 좋아하는데, 여성분들이 좋아하시니까 하는 말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대개의 허세에 쩐 사내들처럼 와인에 대해서 주절대지 않아서 좋았다.

며칠 후에는 정말로 함께 야경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커다란 바구니에 햄과 치즈와 과일을 담아가지고 왔다. 술은 와인 대신 프랑스산 사과 브랜디를 들고 왔다.
그제야 이름을 알았다.
“잔디킴. 아, 아니. 김잔디라고 합니다. 여기가 모국이지만, 비자를 내야만 여기서 살 수 있는 신세입니다.”
“아, 외국분이신가 봐요?”
“한국 사람입니다. 미국 사람 취급하면 섭섭합니다.”
“여기는 사업으로 오셨어요?”
“예. 그랬는데 한국 사정이 쉽지는 않네요.”
“영화씨는 무슨 일 하십니까?”
“전 노래 불러요.”
“아, 그러신가요?”
“왜요? 그렇게 안 보여요?”
“예. 전 모델이시거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노래 못 부르게 생겼다는 게 아니라, 워낙에 아름다우시니까.”
화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로맨틱한 남자였다. 그날 섹스를 하고 나서도 절대로 태도가 바뀌지 않았다. 흔히들 하루만 같이 자고 나면 마치 자기 마누라라도 되는 양 구는 이상한 남자들과는 달랐다.
며칠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꼭 작은 선물을 사왔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들도록 향수와 머플러, 에나멜 팔찌 등을 선물했다.
어느 날에는 솔직하게 자신이 노래하는 곳을 말했다. 남자가 깜짝 놀랄 줄 알았는데, 전혀 변하지 않는 태도로 자신이 보러 가도 되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했지만, 그 대신 잠자리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너무 잘 부르는데, 왜 앨범은 내지 않았어요?”
“내고는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요. 정식으로 내려면 사실 만만한 액수가 아니거든요. 녹음만 해도 천만 원씩 해요. 게다가 곡 받아야 하는데, 눈에 들어야 가능하죠. 주제에 어떻게 곡을 사겠어요?”
“돈이 있으면 길을 알아요?”
“그야 돈은 없지만, 실력으로 몇 번 부딪쳐 보았으니까요.”
“그럼 내가 투자할까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가 돈을 가지고 왔다.

남자는 돈을 건네고도 역시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전과 변함없이 대했다. 김잔디가 가끔 바라는 것은 그냥 가게에 대한 이야기다. 호기심인지, 아니면 무슨 생각이 있어서인지 가끔씩 가게 사장에 대해서 물었다.
영화가 오래 다니다 보니 알게 된 일인데, 다니는 술집도 부산에서 제일 크고 고급이었지만, 부산 시내의 고급 술집들 대부분과 러브호텔 등을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천인식 회장이었다.
그는 알려지기로는 조직폭력단의 두목이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천회장이 가끔 데리고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정치가들이었다.
김잔디에게 아는 대로 대충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그는 천회장과 같이 온 손님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천회장이 왜 궁금해요?”
“나중에 사업 확실하게 시작할 때에는 이야기해줄게요. 내가 사업상 부산 사회 돌아가는 분위기나 인맥을 좀 알아야 해서요.”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잘 몰랐지만, 그가 원하는 거니까 최대한 알아두었다가 전해주고는 했다. 김잔디가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게 좋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서 손님이 왔다.



2.

미래파의 두목, 천인식 회장은 미치고 팔짝 뛸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게 무슨 해괴한 사고냐?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온다.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들어온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사채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다지고 다진 인맥도 한몫했다. 정치가들에게는 현찰이 필요하고, 가장 안전한 현찰이 바로 조직에서 주는 돈이다.
기업가들은 때로 잡혀 들어가거나 문제가 생기면 자금에 대해서 불어버리지만, 조직에서는 절대로 불지 않는다.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직은 그게 생명이기 때문이다. 검은돈을 밝히면 조직은 끝장이 난다. 그러니까 자살행위에 다름이 없다.
그래서 온갖 더러운 짓은 다 대신 해주면서 돈까지 바치면서 살아가는 게 바로 가엾은 조직이다. 그런 신세를 벗어나고자 부단히 노력해서 이제는 당당하게 금융회사로 태어나게 되었다.
제대로 줄을 잡은 덕분이다. 평소에 알던 국회의원도 엄청난 줄이라고 오히려 자기를 잘 좀 소개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재수 없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뒤를 봐주던 정치가들이나, 기관에서 범인을 잡으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다. 부산 바닥을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잡지 못하냐고 하는데, 도대체 그 범인이라는 게 실체가 없다.
전 인원을 모아놓고 범인을 잡으라고 성화를 해도 범인에 대해서 흔적조차 잡지 못했다. 가장 의심스러운 건 같이 있던 노래하던 애다. 그런데 그 애를 기관에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행동대로 데리고 있는 부하가 노크도 없이 달려들어 왔다.
“회장님. 그 계집애 말입니다.”
“뭐?”
“노래하는 계집애.”
“김영화?”
“기관에서 풀어준 모양입니다.”
“그래?”
“잡아챘습니다.”
“어디?”
“데리고 올까요?”
“경찰에서 뭐라 안 하더냐?”
“전혀 상관 안 하는 분위기던데요?”
“데려와라. 고개너머 별장으로. 내 직접 대화 좀 해야겠다.”

천인식은 남다른 대화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겁주고 공갈 협박하는 데에는 이력이 난 몸이었다. 그런가 하면 회유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를 전국적인 인물로 키워준 건 주먹질이나 잔인함, 대범함이 아니었다. 그의 장점은 빠른 두뇌회전과 사람의 심리를 파악해서 줄 것과 받을 것을 아는 기민함이었다.
천인식은 부하들이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는 기장으로 향했다. 고개너머 별장이라고 불리는 천인식의 별장은 기장의 연화리에 있었다.
바다 건너에는 예전에 너무 유명했던 어느 종교재벌의 아들이 여자들을 끼고 엽색 행각을 벌이다 난리가 났던 바로 그 섬이 보이는 자리였다. 섬 전체가 개인 소유라서 들어가지 못하는 섬이다.
하긴 이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사업인 건 맞지. 세금도 안 내지. 참견도 못하지. 하나쯤 제대로 만들면 저런 섬 몇 개 사는 거야 문제겠나.
“야. 예수 믿으면 무임금으로 졸라 일 시켜도 찍소리 않고 한다던데… 근데 우리 애새끼들은 그저 뭐 하나만 시키면 언제 통장에 입금되나 눈이 시뻘개가지고 기다려요. 그치?”
조수석에 앉은 부하에게 말을 건네자, 부하가 싱긋 웃었다.
“그야 예수가 아니라 교주를 믿는 거겠죠.”
“그래. 인마. 내 말이 그 말이야. 졸라 믿어요. 교주를. 너는 나 믿냐?”
“그럼요. 회장님. 당연한 말씀을…”
“진짜?”
“왜 그러세요?”
“그럼 나도 곧 섬 하나 사겠네. 맞아?”
“예. 회장님.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저런 섬 하나쯤 사는 건 문제가 아니죠.”
“그래. 그래. 내 말이. 근데 이게 해결되겠냐?”
“곧 해결 안 되겠습니까?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니까 일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럼 얼마나 좋겠냐? 그래도 우리가 성의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냐? 범인을 잡지는 못해도 누구인가라도 알아야지.”
부하가 돌아보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맞지 않을까요?”
“소문? 범인이 그 뭐야 프리랜서라고 하는 북한에서 보낸 놈 아니냐는 거?”
“예. 기관에 줄을 대서 물어보니까 대꾸를 않던데요?”
“대꾸 없으면 맞는 건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혹시 아닐까 싶어서요.”
“아니다. 인마. 그럴 리가 있냐? 북에서 내려온 놈이 왜 야쿠자를 건드려?”
“우리나라 들어오기 전에 일본에서 활동했다고 하잖아요?”
“그런가…?”
야쿠자들 중에는 조총련도 있고 그러니까 무언가 연관이 있으려나? 한때 일본 파친코 업계와 교류를 한 적이 있었는데, 파친코 업계에 재일동포들이 꽤 있었고 조총련계도 많았다.
“조총련은 밥맛인데…”
“당연하죠.”
“우리 손으로 잡으면 우리 확 뜨는 거 맞지?”
“예. 회장님. 그야말로 노가 나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게만 되면 회장님 위치가 이제 전국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입맛이 당긴다. 그러나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별장에 도착해서 지하로 내려가자, 노래 부르는 계집애가 오들오들 떨고 앉아있었다. 주변은 그냥 지하 홈바로 만들어진 곳이어서 살풍경하지는 않았다. 계집애는 소파에 앉아서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부하 둘이 지키고 서 있다가 구십 도로 인사했다.
영화가 얼른 일어나면서 겁먹은 눈으로 천인식을 바라보았다.
“야야. 앉아 있어라. 너 여기 내 별장 처음이지?”
영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 한잔하고 있지 그랬어?”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영화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얻어맞은 듯한 자국이 보였다. 입술 끝도 조금 터진 것으로 보였다.
“너 누구한테 맞았어?”
영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눈에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너희들이 그랬나?”
부하들이 놀라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경찰서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영화를 쳐다보고 혀를 찼다.
“에잇. 이상한 일에 말려들어 가지고… 너나 나나 참 꼴이 말이 아니다.”
이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나가들 있어라. 영화하고 나는 그런 사이 아니다.”
부하들이 얼른 구십 도로 절하고 빠져나갔다. 천인식은 진열대에서 양주를 꺼냈다.
“여기로 앉아라. 양주는 소파에서 마시면 맛없다.”
영화가 머뭇머뭇 스툴에 와서 앉았다. 천인식은 잔 두 개에다 독한 양주를 따랐다. 그리고 영화 옆에 앉으면서 술을 권했다.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고 그런 거지. 쭉 마셔라. 아이고. 나도 요즘은 진짜 힘들다.”
담배를 피워 물고 영화에게도 내밀었다. 영화가 거절했다. 술을 마셔서인지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아, 너는 가수지. 가수는 담배 피우면 안 되지. 그래.”
담배를 피우면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고생은 너만 한 거 아니다. 우리도 진짜 힘들었다. 뭐, 그렇다고 널 원망하는 건 아니다. 사내자식들이 너한테 화내고 그러는 건 쪽팔리는 거지.”
영화는 애매한 표정이 되어서 천인식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무사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조금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 사내 놈, 너 이용해먹은 놈은 잡아야 하지 않겠냐?”
영화가 움찔했다.
“그게 전부다. 내가 말한 그대로다. 너한테 피해 안 가도록 내가 알아서 할게. 너야 노래나 다시 부르면 우리도 좋고 너도 좋고 그런 거지.”
슬쩍 뱀눈이 되어서 영화를 째려보았다. 영화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말해봐라. 그날, 네가 노구치를 꼬여낸 다음에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자. 그래야 그놈을 잡지. 그놈 잡아야 우리가 산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야 속정이 들어서 아쉽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냐? 우선 살고 봐야 할 거 아니냐?”
영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드러난 허벅지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우고 어디로 갔었어?”
영화가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전 정말… 몰랐어요. 그저… 차에만 태우라고 해서 태웠는데… 죄송해요. 정말이지, 해칠 건 몰랐어요. 그냥 사업상 꼭 만나려고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안다. 그래. 그래서 어디로 갔는데?”
“을숙도로 갔어요.”
“그냥? 노구치씨는 뭐하고?”
“기절했어요.”
“너는 뭐하고?”
“저도 옆에서 맞은 것만으로도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겨우 정신을 차리니까 을숙도였어요.”
“그랬어?”
천인식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다음에는 차에서 노구치씨를 끌어내서 트럭에 태웠어요.”
“무슨 트럭?”
“거기 트럭이 있었어요.”
“넌 뭐했고?”
“전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사람… 총을 가지고 있었어요.”
“똑같네.”
“네?”
“경찰에서 한 이야기랑 똑같아.”
영화가 놀라서 퍼뜩 천인식을 올려다보았다. 천인식의 눈이 뱀눈처럼 변해서 무섭게 영화를 쏘아보았다.
“그런 거 말고 우리끼리 진짜를 이야기해야지. 지금 한 이야기에서 네가 경찰에서 한 이야기랑 다르게 이야기한 건 네가 꼬드겨서 데리고 나갔다는 거밖에 없잖아.”
“회장님이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 안다. 같은 동네 산다고도 말했지? 경찰에서 말이다.”
“예. 옆 동에 살아서 알게 된 사람이에요.”
“경찰에서 그 집을 털었더니, 아무것도 없더란다. 지문 하나 안 나왔다더라.”
“전 호수만 알고 집 안에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어요.”
“아, 그렇구나. 하여간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트럭에 싣고 사라져 버리고 넌 차에 혼자 남아 있던 거지?”
“네. 그러다가 정신이 들어서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랬지. 그랬어.”
천인식은 잠시 말을 끊고 영화를 노려보았다. 영화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천인식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너, 지금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되냐? 그렇게 말하면 경찰은 믿어도 내가 믿겠냐?”
그때, 나직한 음성이 지하실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믿어도 돼. 사실이니까.”
천인식이 놀라서 홱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영화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지하실 입구의 계단 위에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검은색 위아래 옷을 마치 영화 속의 도둑들이라도 되는 듯이 입고 선 사내는 머리에도 털실로 된 모자를 덮어쓰고 있었다.
“너, 너…”
“날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어렵게 시간을 냈다.”
천인식은 순식간에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했다. 그래서 재빠르게 잔을 깨서 영화의 목에 들이댔다.
“너 이 새끼.”
“무례하게 굴지 마라. 네가 그렇게 멍청한 놈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실망시키지 마라.”
사내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내가 여자 찾아서 여기까지 왔을 거라는 착각도 하지 마.”
“네가 노인네를 죽인 범인이냐?”
“노구치? 질긴 노인네였어. 그래도 내가 이겼지. 내 고문기술이 훨씬 더 질겨서 말이야.”
사내는 계단 아래로 내려서더니 태연히 끝 쪽 스툴에 걸터앉았다.
“건달이 뭐 그래? 잔을 깼으면 찔러버려야지. 그리고 폼 나게 죽는 게 건달 아닌가?”
천인식은 머리 회전이 빨랐다. 상대는 북한에서 내려왔다던 테러리스트가 맞다. 아니면 이렇게 쉽게 별장을 들어올 수 없다. 영화를 돌아보았다. 영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덜덜 떨고만 있었다.
천인식은 자기가 들고 있던 깨진 잔을 버렸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시팔.”
“쯧. 아무리 급해도 잔을 깰 때는 끝에만 비스듬하게 쳐야 손을 안 다치지.”
“원하는 게 뭔데?”
어차피 목숨이 걸렸다면 대차게 나가자. 한, 두 번 목숨 걸어보는 것도 아니다.
“그래. 말이 통하네.”
사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기분 더럽게 나쁜 웃음이었다.
“너한테 내 생각을 말해주려고 왔어. 난 이제 여기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네가 내 뜻을 존중해주기만 한다면 말이야.”
사내는 영화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기관에서 저 여자를 풀어주게 한 건, 바로 너한테 보내서 네가 저 여자한테서 내 정보를 캐내게 하기 위해서야. 그런데 넌 저 여자한테서 알아낼 게 하나도 없어. 내가 알려준 게 없으니까.”
천인식은 얼결에 영화를 돌아보았다. 영화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사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뜻은 간단해. 우리는 다시 마주치지 않는다. 네가 저 여자를 풀어주고 다시는 주위에 얼씬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인연이 끊어지는 거야. 난 너한테서 원하는 게 없어. 그래서 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거야. 넌 영리해서 내 말을 알아들었지?”
천인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다. 무슨 말인지.”
“여자는 알아서 어디든 갈 거야. 약속하는데, 여자가 무사하면 너도 무사하다.”
“하, 하지만…”
“노력해. 기관이나 경찰에서 여자 안 건드리도록 네가 힘을 써야 해.”
사내가 스툴에서 일어났다.
“만일 여자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난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 네가 영문을 알든 모르든 무조건 난 너한테 책임을 묻는다.”
사내는 돌아서 뚜벅뚜벅 계단으로 향했다. 뒤에서 확 덮친다면?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알아. 네가 영리하다는 걸.”
천인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건달 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을 판단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았다. 허튼수작을 하다가는 정말 골로 간다.
사내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렸다.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천인식은 정신없이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선 순간, 입을 딱 벌렸다.
집 안에는 온통 피칠이 되어 있고, 부하들이 저마다 어딘가를 부여잡고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고 있었다. 제대로 서 있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죽은 놈도 없다.



3.

우재준은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온 인원을 동원해서 별장을 감시했는데, 프리랜서는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랬는데 모를 수도 있었다.
여하튼 여자가 들어간 후, 일박 이 일을 꼬박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출입이 없었다. 그랬는데 어이없게도 천인식의 태도가 바뀌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변화였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이 병원 신세를 졌다. 이렇게 되면 프리랜서가 별장을 드나들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주변에 배치했던 저격수들의 영상과 곳곳에 설치했던 CCTV를 전부 확인해도 들락댄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안에서 소란이 있었던 듯한 움직임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확대를 해보니, 여지없이 집 안에서 싸우는 모습이다. 아니, 싸우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픽픽 쓰러지는 영상이다.
너무 멀어서 검은 옷의 사내는 모습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진입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공안부에서 여자를 지켜보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밀고 들어갔을 것이다.
허탈하게 화면을 보고 또 보는데, 공안부에서 전화가 왔다.
‘프리랜서 맞지요?’
“그래 보입니다.”
‘물샘 틈 없이 감시했다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낸들 알겠냐?
“지금 분석 중입니다.”
‘분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잡아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프리랜서가 맞다면, 이제 다시 오두진을 이용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예?”
‘오두진은 프리랜서가 해칠 생각이 없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다. 검사지만 레벨이 달라서 프리랜서에게 존중을 받는 것 같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때요? 오두진이 지금 부산에 있어요. 프리랜서를 그만큼 아는 인물도 없고, 그가 직접 현장에 나타난다면 프리랜서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오두진을 끌어들여 보세요.’
무슨 수로? 이제 우재준이라면 벌레처럼 볼 텐데.
‘직접 접근하기 난처하면 뭐 주변을 이용해서 접근해 보세요.’
“다시 수사팀에 합류하도록 하는 겁니까?”
‘그렇게 유도해 보세요. 우리는 모른 체하겠습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희 국장님께서 오검사를 몹시…”
‘상부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아마 국장님께서도 오케이 하실 겁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어째야 하나 생각했다. 우회해서 접근하라고 하면 지금으로서는 마리밖에 없다. 대단하다고 세계적으로 소문난 모사드의 병신들 말이다.
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