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이태훈 지음/다른세상/335쪽/16,000원)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라는 책은 스웨덴 언어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라 호지가 16년 간 인도 북부 히말라야 라다크 지방에 머물며 느낀 순수한 라다크인들의 생활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녀는 원래 티베트 고어인 라다크 언어를 연구하러 그곳에 갔지만 결국 언어보다는 라다크인들의 삶에 매료되어 그들의 일상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산들로 둘러싸인 라다크는 기후도 혹심하고 자원 또한 빈약하지만 천 년 이상 삶을 이어왔다. 가난하지만 거지와 도둑이 없는 사회, 성냄·다툼·시기·질투·경쟁·이기주의·개인주의 등 문명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삭막함을 찾아볼 수 없는 곳, 바로 서쪽 히말라야에 둥지를 튼 라다크다.

호지가 라다크를 서양 세계에 소개한 뒤로 라다크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확히 말해 이 책은 라다크를 전부 소개한 것이 아니라 과거 라다크 왕국을 이루었던 옛 티베탄들의 삶을 연구한 것이다. 분명 라다크 왕국은 티베탄들로만 구성된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호지의 책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서 라다크 하면 라다크를 세운 여러 민족 중 먼저 티베탄을 떠올리게 되었다.

세계 곳곳의 젊은 여행자들, 티베트 불교나 라다크의 지형을 연구하기 위해 찾아온 학자들로 인해 라다크의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실 라다크의 수도 레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고산지대인 데다 험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야 하는 지리적 악조건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을 망설이게 한다.

인도 델리에서 엉금엉금 기어 꼬박 40시간을 달려야만 라다크에 도착할 수 있다. 히말라야 한 귀퉁이에 전세 들어 사는 이곳 라다크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자라지 않는 암석과 모래로 되어 있다. 이런 척박한 곳에 정말 오래된 미래의 도시가 있다니 라다크인의 강인한 생활력을 어림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경작할 수 있는 녹지공간은 5%도 채 안 되고, 한 해 강수량이 20밀리미터도 안 되는, 그야말로 인간과 동물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절망의 땅. 그래서 라다크를 과거에는 죽음의 땅, 붉은 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만년설이 녹으면서 만드는 가는 물줄기가 라다크인들의 모진 생명을 지켜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다.

지난 1950년대에 나라를 중국에 빼앗긴 티베탄들은 현재 티베트와 인도의 다람살라, 시킴, 그리고 네팔의 쿰부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특유의 민족성을 지키고 있다. 물론 라다크 지역에서도 티베트 불교와 라마승들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라다크 왕국의 중심인 레 왕궁 앞에는 힌두사원이 있어 레의 인상은 다분히 인종적·종교적으로 혼잡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불과 몇백 미터만 벗어나도 아름다운 라다크 마을과 따뜻한 미소를 가진 라다크인들을 만날 수 있다. 라다크인들의 생활에는 "3투"라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보릿가루를 이용해 전처럼 부쳐먹는 "사투", 둘째는 울로 만든 옷 "파투", 셋째는 타고 다니는 조랑말 "타투"다. 이 세 가지는 라다크인들에겐 아주 중요한 삶의 일부다. 이것들 또한 자연에서 얻는 것이고, 생존의 한계상황을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것들이다. 히말라야 만년설만큼이나 깨끗하고 순수한 심성을 가진 라다크인들의 때묻지 않은 순박함은 낯선 이방인들을 감동시킨다. 이들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이들의 언어에는 도둑이나 사기꾼 같은 단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맑은 영혼들과 논두렁에 앉아 밀을 베며 먹는 새참과 짜이(우유에 홍차를 탄 것)는 라다크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편안한 휴식이다.

9월 초가 되면 작은 논에서 누렇게 익은 밀을 수확하느라 한창 바쁘다. 레를 벗어난 높은 지역에서는 8월 말이면 벌써 가을걷이를 할 만큼 라다크에는 가을과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비록 짧은 여름이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 풍성한 자연의 열매들이 무르익어 우리의 추석처럼 감사도 잊지 않는다. 우리처럼 큰 명절이나 축제는 없지만 집집마다 수확한 농산물로 간소하게 음식을 마련해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안테나와 전선을 통해 현대문명이 들어오지만 라다크인들은 조상들이 전해준 춤과 노래를 잊지 않고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 『이태훈의 뷰티풀 티베트 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