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2003년, 국내 가공유 시장은 몹시 시끄러웠다. 딸기 우유, 바나나 우유 등 가공유에 당분이 너무 많이 들어가 소비자들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언론의 지적 때문이었다. 이듬해에는 식품에 들어가는 유해첨가물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특히 음료에 과일 빛깔을 내는 색소의 유해 여부가 연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2006년 7월부터 매일유업 기획팀에서 하반기 신제품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발팀의 팀원들은 얼어붙은 가공유 시장에 어떤 방법으로 도전해야 할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발팀의 이인기 과장은 유치원생 딸이 그린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왜 반달을 빨간색으로 칠한 거니?”
“아빠, 이건 반달이 아니라 수박이에요.”
“수박? 수박은 파란색이잖아.”
“에이, 아니에요. 수박은 원래 속이 빨갛잖아요.”
그 순간 이 과장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회의석상에서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우리 색깔이 하얀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 봅시다.”
“하얀 바나나 우유? 바나나는 노랗잖아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껍질은 노랗지만 속은 하얗잖아.”

그때까지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바나나 우유는 껍질 빛깔처럼 노란색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바나나 우유는 노란색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과장이 내놓은 아이디어의 초점은 역발상에 있었다. 즉 정직하게 흰색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이인기 과장의 아이디어는 팀원들 사이에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기존 제품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깨트리려면 엄청난 투자가 따라야 하고 성패 여부도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상토론 끝에 팀원들은 당분과 색소의 유해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색소를 뺀 우유에 도전한다면 경쟁력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좋다. 진짜 웰빙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 보자.” 그렇게 해서 정직을 모토로 한 신제품 개발이 결정되었다. 개발팀은 신제품이 무색소라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흰색 바나나 우유를 정직하게 보여주기 위해 투명용기를 사용했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라는 신제품의 이름에는 기존 바나나 우유 제품에 대한 네거티브가 담겨 있으면서도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은밀한 상징이 시장에서 어떤 돌풍을 일으킬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신제품 개발이 확정되자 본격적으로 제품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쟁상품보다 질적으로 뛰어난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야 했다.

바나나 우유에서 맛을 내는 과즙은 세 가지가 있다. 연구소에서는 색깔이나 성질이 각기 다른 세 종류의 과즙을 우유와 혼합해 테스트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혼합비율을 찾아냈다. 그런데 연구팀이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우유 빛깔이 거무튀튀하게 변하는 갈변이 일어난 것이다.

“갈변을 잡아야 산다.”
그때부터 갈변을 잡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문제는 식이섬유 때문이었다. 연구팀은 4개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과즙에서 식이섬유를 완전히 제거해 우유와 혼합하는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무색소 무가당 우유에까지 도전하고자 했다.
“기왕이면 우리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자.”

소비자들은 백설탕이 들어간 기존 제품의 단맛에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비만과 당뇨의 주범이 된다. 그렇기에 웰빙을 지향하는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는 저지방에 결정과당을 사용함으로써 고객들의 건강까지 지켜 주고자 했다. 그런데 결정과당은 상쾌하기는 했지만 단맛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거 참 잡을 것이 너무 많네.”
저지방에 무설탕에 갈변 없는 과즙까지, 순수한 바나나 우유를 만드는 과정은 실로 난관의 연속이었다. 문제는 가격경쟁력에도 있었다. 원유를 쓰면 지방이 늘어나고, 탈지분유를 쓰자니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다. 거기에다 값비싼 결정과당만으로 단맛을 내려니 기존 제품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드리면 열리는 법, 연구팀은 혼합탈지분유를 사용해 유당의 함량을 높임으로써 단맛을 보강하는 데 성공했다.

“휴, 이제 단맛 문제도 넘어섰다.”
연구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뒤이어 우유 속에 있는 미생물 처리가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다. 어떤 방법으로 살균하느냐에 따라 제품의 유통기한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초고온 살균기(UHT)에 의한 열처리로 해결될 수 있었다.

이처럼 하얀 바나나 우유를 만들기 위해 연구팀은 수없이 쓴맛을 보아야 했다. 이런 산고를 거쳐 2006년 12월 6일,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가 탄생했다. 고객에게 솔직하게 다가서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바나나 우유였다.

『대한민국 마케팅 성공신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