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노벨상 수상 작가인 엘리 위젤이 나치 수용소에서 한 10대 유대인 소년이 탈출을 시도
하다 잡혀와 공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 10대 소년이 교수대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엘리 위젤은 소리 없이 터져나오는 피묻은 절규를 허공에 던집니다.
“오,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바로 그때 그는 전혀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나지막한
음성이 자신의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엘리 위젤은 이 신비로운 음성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소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엘리 위젤은 그 소리를 물음
부호로 자신 안에 파묻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잔혹한 홀로코스트에서 행운의 생존자가 된 그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유명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에서 그는 수용소에서 있었던 그 신비
한 음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뜻밖에 그리스도인이었던 모리악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당신과
같은 유대인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리악은 그 음성
의 주인공은 임마누엘(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그 소년처럼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중동 선교의 꿈을 가지고 이라크로 떠났던 김선일씨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참혹하게 참수를
당했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리고 특히 그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해온 이 땅의 그리스도
인들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주님께 묻고 싶은
물음이 있다면 도대체 왜 이 많은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그를 그렇게 버리셨는가”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 순간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한 선명한 영상을 우리는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몸부림치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시는 나사렛 예수의 모습입니다.

서울 합정동 양화대교 건너편에는 천주교와 기독교 두 개의 성지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개신교 성지인 양화진 길 건너 천주교 성지를 일컬어 우리는 절두산 순교 성지라 부릅니다.
'절두'란 머리가 잘렸다는 뜻입니다. 조선 말기 대원군 시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들이
이른바 병인박해 사건(1886년)으로 무려 8000여명의 머리가 같은 동족에 의해 잘려졌던 것입니다.
그 중 28명이 성인으로 추대되어 안치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 옛날이나 참수형은 똑같이
반인륜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 절두성지를 비극의 터로 간주합니까? 그들이
흘린 피는 거룩한 순교의 피가 되어 오늘 한국인들의 신앙과 그 거룩한 영향을 만들어온 영감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참수형으로 그의 선교 생애를 마무리했습니다.

이런 관점과 시각에서 본다면 김선일 형제의 죽음의 의미는 슬픔과 분노를 넘어 갑자기 그 차원
을 달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순교의 관점
에서 승화시켜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그 자랑스런 순교 유산을 이 땅만이 아닌 전쟁
의 상흔으로 찌든 이라크까지 확산해 나가야 합니다. 이라크 사랑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된 김선일
형제의 흘려진 피로 이제 우리는 수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어질 중동의 영광스런 선교 미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날 이라크 기독교사에 한국인 선교사 김선일의 이름이
소중하게 기억되도록 그의 죽음을 승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담임)


- <국민일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