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성자들은 도시마다 시장 광장 한가운데 소박한 십자가를 세워 그곳이 ‘십자가 시장’으로 알려지도록 했다. 지금도 유럽의 많은 옛 도시들에서 그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생각은 십자가가 세속의 모든 일들을 다스려야 하고, 모든 거래와 이해관계와 관심들이 십자가의 그늘 아래 있어야 한다는 데서 나왔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17). 사도 바울의 이 말에서 ‘흔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문자 그대로 ‘낙인’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 동일시하는 낙인이 자신의 몸에 찍혀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느끼거나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분을 생명으로 의지하고 숨 쉬듯 들이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적인 삶은,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인식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존재 전체에 십자가를 적용함으로써 완벽해진다. 그분의 죽음을 따름으로써 죽음으로부터 나와서 온전한 생명으로 나아간다.
이런 죽음과 부활의 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온 자연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가을에 진홍빛을 띠는 나뭇잎들은 다가올 봄의 부활에 자리를 내주는 자연의 죽음에 비유된다. 그러나 죽음 후에 더 윤택한 생명이 찾아오는 것에 주목하라. 꽃이 지고 난 자리에서는 씨주머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씨주머니 또한 차츰 느슨해지다가 결국 벌어지고, 씨앗들은 흩어져 땅에 묻혀 죽는다. 그러나 그렇게 묻힌 씨앗에서 풀과 나무와 꽃과 열매들이 새롭게 부활해 나오지 않는가!

자연계에서 이 원리는 너무도 분명하다. 꽃이 꽃을 피우는 데 지나치게 정성을 쏟느라 겹꽃으로 자라면 꽃송이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겠지만 씨를 맺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한다. 자연은 꽃 하나에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금하고 있다. 우리의 영적인 삶 역시 더 깊은 죽음으로 내려갔다가 더 기운찬 생명을 체험하러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성장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구원의 참속성인 열매를 맺지 않는 한, 가장 즐거운 영적 체험들 곧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들뿐만 아니라 권리들마저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헌신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죄가 되지 않는 일에서도, 심지어는 의로운 일에서조차 자신을 포기하는 위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영원한 이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계신 그리스도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애착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들에는 많은 경우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 육신의 삶에는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종교적인 체험들에도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평강과 기쁨과 종교적인 위안에조차 집착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열매가 더 풍성해지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행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꽃이 시들어야 할 때가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수고는 땅에 묻혀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어떤 일에 부르시고는 초기 단계에서 그 일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신다. 우리가 낙담에 싸여 이렇게 부르짖기 전까지 말이다.

“제가 헛수고를 했습니다. 공연한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일이 결실로 지면을 가득 채울 때까지 불길 속에서 불사조와 같은 것이 나와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차 무덤이 더 좋은 부활을 보장하는 길이 되고, 죽음이 승리 속에 삼키워질 때까지 만물에 십자가의 흔적을 새기신다. 실제로 우리는 우주 자체가 그 소멸을 통과해 마지막 부활의 영광 속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 결과 예수의 흔적이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 새겨지도록, 그리고 우주 끝까지 위대한 구원의 노래가 울려 퍼지도록 말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사랑하는 자여, 당신은 예수의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가?

- 『십자가 그 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