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지음 / 열림원 / 304쪽 / 15,000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콧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이란 자신과 타인의 성장을 위해 자기 자신을 최대한 넓혀 가는 것이다.”

우리는 너나 없이 평생에 걸쳐 이 사랑의 과업을 수행해 나간다. 자기 계발과 훈련을 통해 성숙하고자 하고 지성을 최대한 넓혀 자신의 우주를 키워 나간다. 그러다 종국에는 자신만의 우주를 깨고 나와 무한한 우주인 ‘영성의 세계’에까지 이르라는 부름을 받는다. 이 부름은 사랑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신의 절대적 사랑을 아는 경지까지 넓혀 가라는 부름일 것이다.

여기 ‘지금에서야’ 그 영성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라고 불리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무신론자, 미신자라고 자처하던 그가 75세에 ‘세례’라는 것을 통해 그 세계에 들어선 것은 가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다. 큰 날개를 퍼덕이며 가장 높이까지 오른 독수리의 기상을 연상케 하던 그였지 않은가. 그 독수리가 자기의 날갯짓을 멈추고 기류에 몸을 맡긴 채 활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영어로 ‘팍 던져 넣는다’의 의미를 갖는 ‘plunge’ 즉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경험이었다.

그는 ‘자기 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빛뿐 아니라 어둠까지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최근 외동딸의 암 투병과 실명, 그리고 사랑하는 손자의 중증자폐에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을 깊이 통감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어릴 적 감기에 걸렸을 때 기다리던 어머니가 돌아와 그의 이마를 짚어주시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 순간 어머니의 그 차가운 손과 39도의 신열로 뜨겁던 그의 이마 사이에 아주 엷은 막이 느껴졌던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超薄形)의 상태’를 뜻하는 형용사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짚은 손’에서 그것을 느꼈던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아주 얇디 얇은 막이었습니다. 내가 어머니를 이렇게 그리워하는데 어머니가 날 이렇게 사랑하는데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앵프라맹스의 단층이 있습니다. 목숨을 건 남녀 사이에도 그것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조금 전 자기와 지금의 자기 사이에도 있지요.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는 누구나 그리고 매 순간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물의 간구로 그가 비로소 깨달은 것 그것은 그 틈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딸을 통해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그는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가 치유되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자신이 영원한 생명인 신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사랑을 통해 내가 내 딸에게로 가 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어머니의 손이 내 이마에 빈틈없이 와닿는 느낌을, 그 영원한 촉감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영성의 세계’까지 자신을 넓혀 간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길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책 제목은 대담하게 붙였지만 나는 아직도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모두가 주목하는 것은, 지성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본 거대한 독수리의 활강이 우리가 여태 본 적이 없는 장엄한 비상으로 이어지는 장관을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 최종옥 북코스모스 대표 / ceo@bookcosm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