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스러움에 대하여
‘나는 핀란드입니다.’ 핀란드의 관광지나 관광 상품을 보면,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 나라 대도시에 놀러 가면 관광지 주변에 사는 주민은 번화한 명소를 늘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관광객들에 치여 쉽게 지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헬싱키의 관광지에서는 생의 속도에서 잠시 비켜설 수 있다. 관광객이 지나치게 몰리지 않으니 주민의 일상이 방해받을 일도 적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어느 오후 헬싱키 대성당 계단 중간 어디쯤 앉아서 시간을 보내거나 시벨리우스 기념물에 고개를 넣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는, 그런 ‘나’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도심 속 파스텔 아파트
나는 새것이 주는 산뜻함보다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날로그의 낡은 감성에 더 열광한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헬싱키에는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집들이 원형 그대로 밀집한 동네가 있다. 바로 에이라, 뿌나부오리(붉은 산), 울란린나(울라의 성), 뭉끼사하리(도너츠 섬) 등이다. 독특한 이름도 썩 마음에 들지만 너도나도 즐겨 찾는 곳이 아니라 한적하고 은밀한 나만의 공간 같다. 헬싱키에는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건축물이 많지 않은 대신 의외로 컬러풀한 옷을 입고 있는 집들이 눈에 띈다. 사람으로 치면 보타이까지 깔끔하게 매고 이제 막 나들이 준비를 마친 신사 같다고나 할까.

여름을 그리는 핀란드 사람들
핀란드의 겨울이 ‘구속’이라면 여름은 ‘해방’이다. 좀 극단적인 표현 같지만 정말 그렇다. 바짝 메마른 길 위를 가벼운 옷차림으로 당당히 걷는 기분이란.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온몸으로 햇살의 기운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 핀란드에 여름이 오면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바로 피크닉을 즐기는 핀란드 인의 모습이다. 핀란드에서는 잔디 비슷한 것들이 보이는 곳에서는 언제든 피크닉이 가능하다. 평소 자동차 안에 돗자리나 해먹을 챙겨두면 야외로 나갔을 때 요긴하게 사용한다.

식상한 멘트 같지만 핀란드는 ‘호수의 나라’다. 도시 주변에 멋진 호수와 바다가 있다는 것은 핀란드 인에게 분명 큰 축복이다. 수영복 위에 간편한 옷만 걸친 채 산책하듯 나가서 물놀이를 즐기고 그대로 바람에 몸을 말리며 집으로 걸어간다. 한국에서 내가 매년 도심 정체를 뚫고 피서지에서나 겨우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이 그들에게는 집 앞 슈퍼에 가는 일처럼 너무 쉽다. 이 축복이 더 빛나는 이유는 남녀노소 모두가 자연스럽게 섞이고 즐기며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진정 ‘즐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영혼까지 자유를 얻는 기분이다.

하늘에서 준 선물
11월이 되면 이곳은 어둠이 짙게 찾아오고 부슬부슬 비까지 내린다. 공포적 요소를 다 갖춘 셈인데, 그나마 눈이 오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어릴 때는 조금만 쌓여도 그것을 뭉쳐가며 좋아했을 만큼 간절히 눈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원 없이 소원풀이를 한다.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는 반가움도 잠시, 인정사정없이 퍼붓는 날에는 그 속도감에 무서울 때가 있다. 우산 없이 다니면 순식간에 인간 눈사람이 되고 마는데 핀란드 사람 대부분은 그냥 다 맞고 다닌다. 모든 악조건을 달고 있는 계절 같지만 핀란드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어디 흔하랴. 백야의 한여름 밤을 누비는 것도 좋지만 눈과 별이 쏟아지는 한겨울 밤 뽀드득 눈 위를 걸으며 강아지만 한 크기의 토끼들과 눈이 마주치는 일은 핀란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 『여기, 핀란드로부터』 중에서
(김은정 지음 / 라이온북스 / 332쪽 / 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