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지음/해냄/257쪽/9,000원)

순천 시내에서 2번 국도를 타고 벌교 쪽으로 간다. 왼쪽으로는 바다(순천만)가 오른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진 풍광 좋은 길이다. 20분쯤 달리다가 처음으로 고개다운 오르막을 만나면 바로 그곳이 우리의 첫 목적지 진트재다. ‘금치재’라는 안내 표지가 보이는데, 순천에서는 금치재, 벌교에선 진트재라고 부른다.

순천과 벌교를 가르는 기점인 이 진트재를 통해서 빨치산 정하섭은 여순 사건의 진앙지 순천을 벗어나 벌교로 잠입해 들어간다. 소설의 첫 장면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하섭의 발길을 따라서 이제 『태백산맥』에 진입해 들어가는 셈이다.

진트재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벌교 전경과 빨치산의 열차 습격 장소로 묘사되어 있는 진트재 터널이다. 우선 벌교 전경을 바라보자. 왼쪽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큰 다리로 이어지는 길이 목포와 부산을 잇는 2번 국도다. 바로 우리가 순천서 타고 왔던 길이 그리로 이어지면서 중도들판을 둘로 가르고 있다. 그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열차가 다니는 철다리. 그 언저리에서 시작된 중도 방죽이 포구까지 쭉 이어지는데, 그 방죽으로 바닷물을 막아 만들어낸 땅이 바로 중도들판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전망대의 맞은편으로 보이는 산들. 순천에서 벌교로 쭈욱 이어지는 저 어느 능선을 따라서 빨치산 정하섭은 고향 벌교로 숨어드는 것이다. 어릴 적 애틋한 눈길만 주고받았던 무당 딸 소화에게 몸을 기대기 위해서.

그리고 진트재 터널을 보려면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왼쪽 봉우리 밑으로 숨어버리는 철로를 찾아서 밭고랑 길을 한참 내려간다. 남의 무덤과 텃밭들 사이로 이리저리 내려가다 보면 숨어 있던 터널이 나타난다. 하대치 부대가 군용 열차를 습격했던 진트재 터널이다. 벌교에서 보면 터널 쪽으로는 오르막길이다. 경사진 고갯길을 올라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에서 산에 구멍을 낸 터널인 것이다. 가뜩이나 힘이 모자란 옛날 증기 기관차가 군수 물자를 가득 싣고 그 고개를 오르려면 자연히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오르막에 돌무더기를 쌓아두고 기다렸으니 열차는 멈추었고, 그 틈에 빨치산들은 열차를 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벌교 계엄 사령관 백남식은 뒤늦게 출동해서 무기를 모조리 빼앗겼음을 알게 된다. 그의 눈에 비친 습격 현장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기차 앞에는 바윗덩이들이 겹으로 쌓여 있었다. 그 바윗덩이들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다소 경사진 철길이라 하더라도 달리는 기차가 소총 정도의 공격을 받고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과 특별열차 운행이 사전에 탐지되었다는 것과 기습을 위해 그 준비가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5권 417쪽)

진트재에서 실제로 군용 열차 습격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이 터널의 지형을 둘러보면 소설 속의 습격 사건 묘사와 너무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오르막 경사도 그렇거니와 총 소리를 듣고 벌교의 군부대가 비상을 걸어 이곳까지 뛰어 출동하려면 2, 30분은 족히 걸릴 만큼 외진 곳이라는 점도 그렇다. 이렇게 완벽한 지형적 조건이 작가의 상상력을 촉발시켜 열차 습격 사건을 만들어내도록 했을 터이다.

작품의 무대는 이렇게 작가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다. 『태백산맥』 같은 대하역사소설의 경우는 그 시대적·공간적 배경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만큼 실재하는 배경의 비중도 높아진다. 그러고 보면 조정래가 여순 사건의 중심인 순천과 그 여진이 미치던 벌교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은 『태백산맥』을 낳게 한 원체험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태백산맥』 기행을 나서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작가의 상상력을 촉발한 지리적·역사적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데다가 그 조건들 속에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작품으로 녹여냈는지 그 자취를 뒤따라 걸어볼 수 있는 것이다.

- 『태백산맥 문학기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