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톨스토이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남자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일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좋은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반은 사랑받으며 성장합니다. 수완 좋은 판사로 일하며, 고상하고 예쁜 여성과 결혼합니다. 그러면서 잔소리꾼으로 변해가는 아내와 적당히 사이좋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좋은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예술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찾아온 질병에 조금씩 약해지고 죽어갑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너무도 평범합니다. 200여 년 전 러시아인의 삶이나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의 삶이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렇게 즐겁고 생산적으로 살아가던 이반은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옆구리 통증으로 조금씩 무너집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사다리에서 떨어진 탓이라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그 순간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우울해합니다. 이반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과 가족, 죽어가는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던 것이지요. 초라한 자신과는 다르게 여전히 예쁜 아내에게 화가 났습니다. 죽어가는 자신에게 괜찮을 거라며 기만 섞인 위로를 보내는 의사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사흘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소리를 지르며 모든 분노를 발산했습니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야!’ 그는 절규했습니다.

이때였다. 이반 일리치가 어떤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 거기서 광명을 발견한 것은. 그는 자신의 생활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계시처럼, 아직도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일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자문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 키스를 하는 것만 같았다. 눈을 뜨니 거기에 아들이 있었다. 아이가 불쌍해졌다. 아내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코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절망의 표정을 지으면서 남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그는 아내도 불쌍해졌다. 그렇다. 나는 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니 죽으면 모두 편해질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려고 생각했지만 말을 꺼낼 기력이 없었다.

그는 아들 쪽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간신히 아내에게 말했다. “데리고 가줘. 불쌍하다. 그리고 당신도.” 그는 또 희미하게 “용서해줘.”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기를 괴롭히면서 결코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던 어떤 것이 갑자기 사방에서 한꺼번에 튀어나가는 느낌이 분명히 전해졌다. ‘모두가 불쌍하다. 괴롭히지 말아야지. 그들을 구해주자. 그리고 나도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참으로 기분이 좋다.’

그때 돌연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아픔은? 어디로 갔을까 그 아픔의 신은? 죽음은? 그놈은 어디 있을까?’ 죽기 2시간 전 이반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마음속에 넘쳐흘렀던 화와 분노, 적개심, 원망이 어느 순간 모두 잠잠해졌다.

용서하는 사랑의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반해 다가오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 그 속에서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인류에 대한 애정. 용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반은 어느 순간 아픔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잊으려고 애를 써도 잊히지 않던 아픔이 용서와 함께 잊혔습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는 탓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상처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다면 원망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욕을 들어줄 사람과 격앙된 감정을 다독여줄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화가 누그러지는 순간은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동정과 자비가 생겨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연민과 사랑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부모에 대한 자녀의 원망이 누그러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기처럼 자신들의 상처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헤매던 사람에 불과했음을 마음으로 느낄 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불처럼 타오르던 화가 서서히 연민으로 변하고 이제는 마음에서 그들을 보내주어야겠다는 결단이 일어납니다. 용서를 통해 말이지요. 용서한 후에야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은, 다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내 감정에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화를 다독여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용서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 『감정이 있으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황선미 지음 / 소울메이트 / 320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