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는 인류 역사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종교는 설 자리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 보여주는 현실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정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이 좁아졌다고 해서 종교적 신앙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인간 실존의 근거로서의 종교적 기대가 근절될 수도 없다.

나는 철학자로서, 기독교신자로서 97세를 살아오면서 종교적 신앙에 대한 문제를 갖고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하는 때가 있다.

어떤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한 사람이 ‘무한’이라고 불러도 좋을 넓은 강가에 서서 강 저편을 응시하고 있다. 그때 한 사람이 옆에 다가와서 “나는 당신이 젊었을 때 이 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디서 헤매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시간과 더불어 살면서 어떤 영원한 것이 있는가 싶어 여러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학문과 예술이 있는 곳도 갔었고 정치나 경제적 이념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영원’은 없었습니다. 더 늙기 전에 혹시 이 강을 건너 저 피안에는 ‘영원’이 있을까 싶어 다시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강 저편에는 ‘영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강을 혼자 건널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건너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강 저편에는 ‘영원’을 확증할 무엇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요.”

“그것이 진실이라면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강 이편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강 저편으로 가겠다고 결단을 내린다면 내가 안내해드리지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인생에 걸쳐 단 한 번이자 마지막인 결단을 내린다. “나를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십시오”라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선택과 결단은 그런 것이다. 그러면 종교적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교훈이 내 인생의 진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따르는 동안에 어떤 은총의 체험을 통해 확고한 생의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은총의 체험이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윤리적 규범과 합치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그런 체험을 통해 신앙의 높은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표현이 있다. 자연이나 정신적 질서를 넘어선 어떤 부르심을 받는다, 또는 택함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런 체험은 역사를 통해 수없이 나타나며 종교의 생명적 흐름을 주도해왔다.

섭리의 체험이라는 것도 그와 맥을 같이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삶은 역사의 운명적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안에서 참자유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인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젊었을 때는 모두가 자유를 외치다가도 늙으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인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잡스러운 범인들의 삶을 버리고 초인이 돼라. 그 초인은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운명애의 철인이다”라고 외쳤다. 또한 괴테도 『파우스트』의 주인공과 같이 회의주의자였다. 회의주의자의 결론은 허무주의로 귀착된다.

그러나 그 둘, 즉 운명과 허무가 전부라면 인간과 삶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제3의 삶의 길은 없는가. 그런데 성경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보면 운명론도 허무주의도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인생관이 있다. 그것이 ‘섭리의 길’이다. 인류가 소유하는 종교적 경전인 구약과 신약은 사실 역사적인 기록이다. 그런데 그 모든 기록은 섭리에 대한 인간적 해석이며, 섭리의 주관자는 자연과 인간을 떠난 제3의 실재이다.

구약과 신약은 그 인격적 타자를 유일신으로 믿고 살아온 역사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나와 신’, ‘세계 역사와 신의 관계’를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섭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그 섭리에 해당하는 체험을 쌓아온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체험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삶의 질서인 은총의 질서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 『백 년을 살아 보니』 중에서
(김형석 지음 / Denstory / 300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