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응급실을 나서고 나서야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봄비로 인해 아침 햇살 대신 차가운 한기가 숲을 에워싸고 있었다.
규희는 몸을 움츠리고 파우치 아래로 나섰다. 우산이 없잖아.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너편 공중전화 부스에서 천천히 우산을 손에 든 레인코트 차림의 성하가 걸어왔다. 짧은 머리칼이 비에 젖어 반짝였다. 바람이 불었지만 성격상 언제나 깔끔하게 자른 머리칼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었다.
“우산은 왜 손에 들고 와?”
성하는 웃으면서 우산을 펼쳐 들었다. 반듯하고 단정해서 차가운 느낌이 드는 얼굴이어서 조금 웃는다고 인상이 바뀌지 않는다.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인데. 매너 좋고 매사 깔끔하고 좋은데. 저 얼음장 같은 얼굴을 보고 누가 그렇다고 믿겠어?
“밥 먹자.”
성하는 파우치 안으로 들어서면서 규희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우산 접어. 그리고 조금만 참아. 교대 한 시간 전이야.”
성하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금연이야.”
성하가 길 건너를 가리켰다.
“벤치에 가서 피우고 올게.”
“병원 전체가 금연이야. 아저씨.”
성하는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멀거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응급의사라는 건 피곤한 거구나.”
“응급만 피곤하겠어? 의사라는 자체가 피곤한 직업이야. 매일 누군가의 고통을 만나고 살잖아.”
성하의 옆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또 이발했어? 길지도 않더만.”
성하는 말없이 자기 머리를 만졌다. 공공장소에서 뺨에 입을 맞춘 게 어색했던지, 성하의 시선은 규희를 향하지 못하고 공연히 길 건너 벤치로 향했다. 바보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규희는 한 술 더 떠서 성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홱 잡아당겨서 이번에는 입술에다 키스를 해버렸다. 읍읍. 성하가 당황했다.
그리고 얼른 규희를 밀어내더니 주변을 살폈다. 새벽의 응급실 앞이라 구경꾼은 없었다. 바보같이.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규희는 재미있다는 듯이 이번에는 옆구리에 착 달라붙으면서 성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겉모습만 보면 이렇게 애인한테 수줍어하고 부드러운 남자라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나 아침으로 뭐 사줄 거야?”
“원하는 것.”
“아침인데?”
“아침에 먹을 수 있는 걸 원할 거잖아.”
“아니. 술 마실 거야.”
성하가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보았다.
“술 마시고 자기 끌어안고 푹 잘 거야.”
성하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섹스도 할 거다? 아침 섹스.”
성하의 몸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기분 좋은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가슴까지 부드럽게 올라왔다.
이 남자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는 규희가 먼저 얼었었다.
‘이렇게 반듯하고 멋진 남자가 나한테 말을 걸은 거야?’
자기 아니어도 맥주 한 짝 정도 개수의 여자가 챙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 하나가 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가 너무 진중하고 정중하게 말해서 같이 ‘저녁 정도는 좋잖아?’ 싶었다. 스타일 좋고 잘생겼으니까.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가면 갈수록 순진하고 매너 좋고, 부드러운 남자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여자관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깔끔해서 의아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바이어라서 시도 때도 없이 외국으로 출장을 다닌다는 점이었다. 비행기표나 여권의 도장으로 따져보면 전 세계적으로 출장을 다녔다.
그나마 이번 봄에는 한 달 정도를 -별일이 없는 한- 휴가라고 했다. 규희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휴가를 몽땅 몰아서 사용한다고 했다. 그 한 달의 거의 다 지났는데, 너무 행복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남자라면 내 이상을 포기하고 결혼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규희의 이상을 성하는 이해 못했다.
‘너무 위험해.’
성하는 처음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엄청나게 위험한 장소로 간다는 걸 알아야지.’
그렇지만 규희에게는 그게 의사가 된 목적이라는 걸 알고 말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로 편안하게 서로의 시간이 맞으면 같이 지내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면 헤어지고는 했다.
규희는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한국에서 반년간 페이닥터로 응급실 근무를 하다가 나머지 반년은 빈곤에 허덕이는 오지로 나가서 의료봉사를 하며 지낸다.
“아침 술 플러스 섹스, 오케이?”
규희가 속삭이자, 성하는 얼굴을 붉히면서 웃었다. 같이 지낸 지가 언제인데 그 말이 쑥스럽냐? 쿡쿡 장난치듯 웃던 규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요란한 경광등과 함께 119의 구급차들이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악! 뭐야?”
규희는 구급차를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다가 돌아보니 남자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규희는 큰소리로 소리쳤다.
“기다려. 오래 걸리더라도 가지 마!”

환자는 분신을 시도한 노동자들이었다. 휘발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고 불을 붙인 화상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 들어왔다. 세 명 모두 의식도 없고 호흡에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모두 심폐소생실을 거쳐서 응급중환자실로 이동 시켰다. 이미 아침 해는 떠오르고, 교대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교대로 들어온 인턴과 함께 정신없이 처치에 힘을 쏟았다.
그때서야 기자들이 몰려들고 기자들을 헤치고 경찰들도 나타났다. 곧이어 유족들이 들이닥치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울부짖는 소리, 신음 소리, 흐느끼는 소리. 병원은 불행으로 가득해졌다. 원래 불행이 가득한 곳이 바로 법원과 병원이 아닐까 싶다.
규희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고 복도로 나섰다. 이제 생사는 자기 손을 떠났다. 화상 전문의가 와서 다음 단계를 진행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의 고통에 가슴이 아팠다. 깨어나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차라리 코마 상태일 때가 더 나을 수 있는 게 화상의 고통이다.
하지만, 코마 상태가 길어지면 위험하지. 그게 화상 환자의 딜레마다. 화상으로 인해 고통받다가 겨우 손발을 움직이게 되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상 환자도 있었다.
복도 멀리에서 성하가 커피를 들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 그렇지, 참. 기다리라고 했었지. 깜빡 잊었던 게 미안해서 달려갔다.
그러다가 덩치 큰 두 사내를 거느리고 서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중년인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보나마나 뻔한 상황 같습니다. 기자들은 유이사가 맡기로 했습니다. 예. 그렇죠. 죽으면야 빨리 정리되겠지요. 그 편이 가장 좋겠지만……”
규희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저희 손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규희가 걸음을 멈추고 중년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중년인이 전화를 하면서 뚱하니 규희를 쳐다보았다.
“새 노조가 제 손에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하하. 예. 경찰에도 손을 쓰겠습니다. 네네.”
중년인은 전화를 끊으면서 규희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사람을 꼬나봐?”
성하가 다가와서 규희의 손에 커피잔을 건넸다.
“식어버렸어.”
규희는 커피를 받으면서도 눈은 무시무시하게 부릅떠져서 중년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이 아가씨? 의사야?”
규희가 중년인을 쏘아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죽는 게 제일 낫다고요?”
“왜 남의 전화는 엿듣고 지랄이야? 무슨 내용인지나 알고 그래?”
“알지! 영태건설 어용노조!”
“뭐? 말조심해! 이 아가씨야! 우리가 분신하라고 종용이라도 했어?”
성하는 규희를 말리려고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규희가 중년인을 향해 커피를 확 끼얹었다.
으앗. 중년인이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거구의 두 사내가 규희에게 달려들었다.
“이년이 미쳤나?”
순간이었다. 두 거구의 사내들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쿠당탕 뒤로 나가 떨어졌다.
중년인이 규희를 잡아채려고 손을 뻗는데, 그 손을 성하가 잡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새끼손가락 하나를 잡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영향인지 모르지만, 중년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성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기자들 오는데 그만 싸우시고 우는 시늉이라고 해야지요?”
중년인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년인은 다시 성하를 돌아보며 인상을 긁었다.
“안 놔?”
성하가 손을 놓았다. 중년인은 넘어졌다가 이제 막 일어나는 두 사내를 돌아보았다.
“뭐해? 병신들아.”
중년인은 소리를 낮춰서 사내들을 닦달했다. 사내 둘이 일어나서 규희와 성하를 향해 다시 다가들려고 했다.
“야. 그만들 둬.”
중년인이 눈치를 보냈다. 사내 둘은 금방 공손한 자세가 되어서 중년인과 같이 기자들을 향해 복도를 걸었다.
규희는 신기하다는 듯이 성하를 돌아보았다. 성하가 싱긋 웃었다.
“커피 다시 사올까?”
“방금 저 양아치들을 자기가 넘어뜨렸어?”
“아냐. 너무 비만인 데다가 흥분해서인지 제 결에 넘어갔어.”
성하는 복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병원 바닥치고는 너무 미끄러운 거 아닐까?”

축축한 도시의 구석진 골목에 있는 ‘24시간해장국’ 집에 마주 앉아서 소주를 마셨다. 규희는 취해서 횡설수설 했지만, 술을 마시면서도 도무지 취하지 않는 성하는 조용히 규희의 주정을 들어주고 있었다.
“복수 노조를 교묘하게 이용해 처먹는 게 요즘 기업들이야. 그중에서도 저 영태건설은 아주 소문난 악질들이야. 깡패들을 회사에 끌어들여서 노조를 만들어 놓고 진짜 노조를 별의별 수작으로 눌러버리고 어용노조를 운용해서 노동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거야.”
성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태도로 그냥 듣고 있었다.
“성하씨.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성하는 그때마다 대답 대신 웃어주었다.
“뭐야? 씨. 안 듣는구나?”
“듣고 있잖아.”
“그럼 반응이 있어야 할 것 아냐?”
숟가락으로 이마를 때렸다. 성하는 이마를 맞으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벌써 여러 번 때렸다.
울기 시작했다.
“너무 비루한 것 같아. 산다는 거 말이야. 그 화상환자들 정말 아플 거야. 죽을 수도 있는데, 죽기를 바라는 놈들이 있다는 게 현실이야.”
성하가 옆으로 이동해 앉았다. 그리고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나 사랑해? 그럼 나처럼 좀 생각하고 나처럼 좀 세상을 쳐다보면 안 돼? 성하씨는 잘나가는 남자라서 안 되는 거지?”
공연한 시비를 벌이고 울다가 화도 냈다. 성하는 그런 일에 절대로 반응하지 않지만, 규희가 때리면 맞아주고 울면 달래주고, 주정을 하면 편하게 받아준다.
그러다가 취해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깨어보니 호텔의 침대 위였다. 아마도 규희가 혼자 사는 오피스텔까지 데려가지 못하고 가까운 호텔로 들어 온 모양이다.
곁에는 이미 성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유리컵에 오렌지주스가 가득 담겨서 놓여 있었다. 술에 취하면 아침에 끝없이 마셔대는 오렌지주스였다. 그리고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마지막 날인데, 잠시 일해야 해서 미안해. 내일 오피스텔로 갈게.



2.

근식은 이번 사고도 깔끔하게 해결했다. 어리바리 노조들이 분신한 사람의 뜻과 유족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악을 써댔지만, 이미 성원은 어림도 없었다.
근식의 수하들은 이런 일에 이력이 난 녀석들이다. 몇 명은 본보기로 망신을 줘서 눌러버리고 지독한 놈은 일부러 싸워서 부하 한 녀석과 함께 경찰서로 나란히 들어갔다.
경찰도 매스컴도 회사 편이었다.
분신자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큰일이라는 둥, 이상하게 삐뚤어진 행태라는 둥, 정당하게 투쟁해야 하는 법이라는 둥, 정말로 많은 분석이 쏟아졌다.
가장 압권은 옛날에도 있었던 과격한 좌파의 악행으로 유서를 대필해주면서까지 분신을 종용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우리 사회는 이런 극단적인 좌파를 경계해야 한다는 분석이었다.
회장님은 잔뜩 칭찬을 늘어놓고 금일봉까지 쥐어주었다. 금일봉은 혼자 먹지 않는 게 근식의 좌우명이다. 그래야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금일봉을 적당하게 아래 애들한테 나누어주고 근사하게 회식도 시켜주었다.
바닷가에 있는 자연산 회로 유명한 집에서 비싼 자연산 회를 마음껏 먹게 해주었다. 허름해 보이지만 정말 미식가들만 찾아오는 식당이다. 그런 식당을 통째로 차지하고 앉아서 술판을 벌였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이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게 했다. 신이 난다. 인생은 즐거워.
“그만들 가자. 차 대기시켜라.”
“어? 애들 다 취했는데요?”
“대리 부르면 되잖아? 더들 마셔. 나 신경 끄고 원 없이 놀아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인마.”
근식은 호기롭게 일어나서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오늘 해 뜨기 전에 집에 가는 놈들, 내가 내일 알아봐서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와하하하! 박수와 함께 폭소가 터졌다.
“나, 강근식위원장은 늙어서 먼저 간다!”
근식은 손을 흔들면서 회식자리를 벗어났다. 경호로 데리고 다니는 놈 하나가 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넌 왜 안 마시고 나와?”
“위원장님 가시는 거 뵙고 가려고요.”
“안 그래도 돼. 인마.”
“대리기사 벌써 불러서 운전대 잡고 있습니다.”
“어? 그랬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고맙다. 들어가서 놀아라.”
“예. 들어가십시오. 위원장님.”
근식은 차로 걸어갔다. 차는 이미 시동을 걸고 있었다. 뒷자리에 타서 운전석에 대고 말했다.
“어딘지 들었지?”
“예. 계산삼거리라고 찍었습니다.”
“오케이.”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친구 너무 빨리 달리는 거 아냐? 뭐라고 하려는데, 신호에 걸려서 차가 딱 멈추었다. 운전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전 좀 똑바로……?”
불쑥 운전석의 기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두 눈에서 일어났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근식은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부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헤드라이트 불빛이 식당의 현관을 비쳤다. 식당은 목조로 되어 있고 마당이 넓은 바닷가의 가건물이었기에, 모두가 차량이 돌진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은 맨 정신으로 식당 밖의 바닷가에서 회를 뜨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이 식당으로 달려드는 옆모습을 볼 뿐이었다.
그러나 식당 안의 인원들은 달랐다. 술에 취했을 뿐더러 식당 한복판에 몰려 앉아 있었다. 식당은 작고 인원은 빽빽해서 갑자기 어디로 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헤드라이트를 쳐다보면서 엉거주춤 놀라는 사이, 차량은 그대로 돌진해서 가건물의 벽을 뚫고 식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식당의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은 회를 뜨다가 말고 놀라서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뒤 이어서 식당 안의 몇몇 사내들이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주변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바닷물에 빠져서 멍하니 식당을 바라보는 식당주인은 자신에게 오늘이 행운의 날인지 불행의 날인지 정신이 없었다.
낮에 오랜 단골이던 강근식이 많은 손님이 가니까 다른 손님 받지 말라고 예약을 하더니 정말로 엄청나게 와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그 정도로도 노가 난 날인데, 한 술 더 떠서 누군가가 오더니 선금을 주면서 회를 한 아름 떠서 배달해달라고 했다.
이건 정말 횡재가 아닐 수 없는 날이었다. 자기네 수족관에는 이미 회가 동이 났으므로 멀리 떨어진 가게까지 가서 횟감을 사들고 온 다음, 넷이 모여서 열심히 회를 뜨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난리인가? 차량 하나가 달려들더니 폭발하고 말았다. 식당은 날아가고, 불이 났다. 다행인 것은 자기와 마누라와 종업원으로 일하는 사촌 둘은 무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달려드는 차를 옆에서 보았을 때, 그 차는 분명히 강근식의 차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그걸 생각할 게제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식당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화재보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두 번의 횡재는 결국 식당이 날아간 값에 불과했다.



3.

뉴스는 차량 돌진 사고로 떠들썩했다. 규희는 성하의 가슴에 뺨을 대고 기댄 채 텔레비전의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는 괴이한 사건이라면서 저마다 분석하고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태건설은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장례준비에 만전을 기한다고만 발표했다.
규희가 성하에게 물었다.
“진짜 이상한 사건이다. 어떻게 자기 차로 자기 편 부하들을 들이받고 죽지?”
“술.”
“술?”
규희는 성하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그게 말이 되나.
“그걸 분석이라고 해?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 폭탄을 안고 뛰어들어?”
“폭탄이라고 누가 그랬어?”
“아니면 왜 터져?”
“평소에 차 안에 신나라든가, 그런 휘발성 물질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당하는 일이야.”
“진짜? 그렇게 터지기도 해?”
“그냥도 터지지.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차량의 경우에는 더 잘 터지지.”
“저 사람 병원에서 나랑 싸웠던 악당이야. 그렇지만 저렇게 죽으니까 좀 안되기는 했다.”
“아침 먹어야지.”
성하는 무감정하게 말했다. 마치 텔레비전의 뉴스는 자신에게 아무 뉴스도 아니라는 투였다.
“늦게 먹어도 돼. 나 이제 실업자잖아.”
“출국 준비 한다면서?”
“같이 해줄 거잖아?”
“아침 먹는 게 출국준비야.”
“헤헤. 왜? 사랑하는 애인이 사막에서 굶어 죽을 것 같아서 그래?”
“위험지역이야. 굶어죽기 보다는 다른 일로들 많이 죽어.”
“난 안 죽어. 의사를 왜 죽이겠어? 난 그냥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인 걸.”
규희는 성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너무 멀리 가서. 유럽에 가는 길이면 들려. 제다를 거치는 비행기 많으니까. 거기서 갈아타면 내 얼굴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꼭 가볼게.”
규희는 성하의 입에 자기 혀를 밀어넣고 깊고 깊게 그의 숨을 자기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 남자랑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건 정말 너무 싫다.
성하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규희의 머리칼을 빗질하며 자신의 숨을 나누어주었다.

공항은 저녁 시간이라 출국장이 비교적 한산했다. 보딩을 하고 로비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공항은 참 우울해. 설레야 하는 건데…”
“가지 싫으면 얼마든지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성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갑자기 변덕을 부릴 규희가 아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누가 방해하는 건 아니잖아.”
“성하씨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규희는 커피컵을 든 채로 공항의 높은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햇살도 밝았다. 공항 안이니까 공조 시스템이 좋아서 춥지도 않았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세상이 참 평화로운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야. 나도 거기에 많이 속았어. 나 의사였을 때 말이야. 나 안 아프니까 환자 아픈 걸 모르거든.”
“아파본 적 없구나?”
“그런 것 같아. 어느 날…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의 수많은 불편한 진실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야.”
규희는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무언가 떠올리는 듯 했다.
“대학 졸업하고 레지던트로 일할 때였는데, 나 병원에서 처음으로 거리로 나가서 싸우게 되었거든? 처음 부조리랑 맞서게 되었을 때 말이야. 돈과 권력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는 거… 그게 참 무서운 거더라.”
성하는 규희가 떠도는 게 싫었다. 모국에 안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기는 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언제나 모국을 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절망하고는 했다.
“우리는 억울한데, 어느 누구도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야. 매스컴도 그들 편이고, 경찰도 그들 편인 거야. 길바닥에 끌려나와서 내팽겨쳐지고는… 말 그대로 빨갱이가 된 거지. 종북세력. 후후. 웃기잖아. 이 시절에 빨갱이가 되다니. 그래도 그게 너무나 잘 통하는 전기봉이야. 짐승을 길들일 때 사용하는 전기봉. 말 안 들으면, 조금이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잘못된 걸 들추거나 하면 영락없이 종북이라는 전기봉으로 지지는 거야. 그거 진짜 잘 통한다?”
성하는 규희가 안타까웠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런 것들쯤은 열두어 살짜리 아이가 기관총을 메고 마약에 취해서 총질을 해대는 사회에 비하면 양호한 건데.
“많이 울고 절망하고 그랬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정이 들어야 하는데… 정이 안 들어. 자꾸만 떠나고 싶어지고 그래. 사실… 내가 봉사를 하려고 나가는 건 이런 내 무력감을 잊으려고 그러는지도 몰라. 저치들은 우리가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방법을 알거든. 그런데 우리는 저치들과 싸우기에는 사실 너무 무력해.”
“우리… 외국에 살까?”
성하가 넌지시 물었다.
“바보.”
규희가 눈을 흘겼다. 언제나 눈을 흘기면 귀여웠는데, 이번에는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게 되면 내가 왜 이러겠어?”
“아. 그래.”
성하는 자기 말에 대한 수습이 막연해졌다.
“가자. 비행기 탈래.”
규희가 일어나서 성하도 일어났다. 같이 출국문으로 가서 마주섰다. 규희가 성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성하씨. 언제인가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올 거야. 그때는 같이 살자.”
규희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규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성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가 원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그렇게 바뀔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상층부가 원하는 바대로 잘 짜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가 와도 고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언제까지나 규희의 방황을 보면서 지내야 하는 걸까. 성하는 그녀가 바뀌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잘 알았다. 돌아서서 그녀가 올려다보던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규희처럼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는 모국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성하는 그녀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모국이 없었다.
성하에게는 규희가 모국이었다.



4.

쿵. 쿵. 다시 폭격이 시작되었다. 밤이 깊었지만, 폭격은 끊이지 않고 사방에 불길을 만들었다. 이래서는 의약품과 생필품이 반입되는 터널까지 접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규희는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약품이 더 오지 않으면 이제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병원은 가득 찬 부상자들로 아수라장이다. 의약품도 의사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병원은 커다란 영안실로 변할 것만 같다.
아만이 다가와서 말했다.
“이제 좀 쉬어요. 어차피 우리 병원으로는 더 들어올 환자가 없어요.”
“무슨 뜻이야?”
“병상도 없고 약품도 없으니까 돌려보내고 있어요.”
“그걸 말이라고…”
아만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두었다. 아만의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였다.
“그냥 좀 쉬어요. 그래도 되요. 선생님은 최선을 다했어요.”
규희는 자기까지 눈물을 보일까봐 휙 돌아서서 병원 밖으로 나왔다. 멀리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밤하늘로 치솟는 게 보였다.
폐허가 다 된 병원 앞의 황폐한 벽돌 더미로 가서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기 와서 배운 담배다. 불과 삼 개월 만에 담배를 배우고, 독한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들 수 있었다.
가끔 성하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 살아가는 데에 건강을 위해서 술이나 담배를 끊는 건 좀 웃기는 것 같아.”
담배 피운다고 나무라는 성하에게 한 말이다. 사람 인생이 얼마나 웃기는 건데, 당장 내일도 모레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인생인데,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느냐는 말.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인간들은 정말 그런 거나 걱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아파서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죽을 확률이 너무 높다.
아니면 죽은 것처럼 살아가든가.
8 미터 담장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담옥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구호품에 의지해서 살아가면서도 불만이 없다면, 누가 굳이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강아지가 아니어서, 그런 상황을 참지 못한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일부 인간들은 그 상황에 참지 못하고 담장을 허물어 버리려고 투쟁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담장을 만든 작자들은 그 투쟁의 대가를 확실하게 지불한다. 그들은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과 돈이 있고,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아마 그들이 가진 무기를 전부 합치면 지구를 콩가루로 만들어서 우주 공간에 뿌릴 정도는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악순환은 반복되고, 도대체 의사가 필요는 한가, 싶을 정도로 인간의 생명이 속절없이 사라져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규희는 수도 없이 ‘왜 이러지?’ 하는 의문을 가졌다.
큰일들도 협상으로 잘 마무리되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이스라엘에서 맹폭을 가하고 지상군도 밀고 들어왔다.
왜? 규희가 보기에는 이건 그저 빌미에 불과한 것 같다. 그들은 다른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듯하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추리는 병원 원장인 메메드씨가 말해주었다.
“인구가 이스라엘보다 월등히 많아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이스라엘은 불안해하고 있었어.”
아. 그럴 수 있구나. 땅은 전쟁 한 번 일으킬 때마다 야금야금 따먹어서 이제 팔레스타인 땅은 옛날 서부개척시대의 인디안보호구역보다 더 작아져버렸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인구에 비해 팔레스타인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니, 그게 이스라엘이나 서방 각국의 기독교 국가들에게는 불안한 조짐으로 보이겠구나.
설마 그런다고 해서 이렇게 학살극을 연일 벌인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정말 그렇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건 무서운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들은 여기 이렇게 사방이 담벼락과 군대로 틀어막힌 비좁은 곳에 수많은 무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믿는 걸까.
소년들이 납치되어 죽은 곳은 서안지구인데, 어째서 가자지구에 이렇듯 폭탄을 쏟아붓고 지상군까지 밀고 들어오는 걸까.
생필품도 겨우 좁디좁은, 말이 터널이지 실은 동굴에 불과한 통로로 들여오는 판국인데, 도대체 학교고 사원이고 간에 전부 무기를 감췄다고 하면서 두들겨 대다가 급기야는 병원마저 공격하고 있다.
지상군까지 밀려오고 있다는데, 그때는 이 병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은 복잡하고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너무 거대하고 잔인한 적과 마주했다. 두려움이 매일 잠이 들 때마다 몰려든다. 그래서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고는 한다.
담배를 피우다가 잠깐 졸은 듯하다. 그때, 아만이 길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아만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손가락으로 자기 어깨너머의 길을 가리켰다.
“터널에서 여기로 와요.”
“뭐가?”
“터널로 의약품이 왔어요. 터널까지는 우리가 가야 해요. 더는 운반할 수 없대요. 다른 쪽에도 많이 필요하니까.”
“어딘지 아는 거야?”
“압둘이 알아요. 메메드 원장님도 나오시고 계세요.”
“가자.”
규희는 힘을 내서 일어났다. 약품만 있으면 얼마간이라도, 이 폭격이 멈추고 진정이 될 때까지라도, 그래서 봉쇄된 항구를 통해서 더 많은 의사와 유엔에서 보내는 의약품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
메메드 원장이 규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위험해. 여기 있어.”
“얼마나 가져다주는 건데요?”
“그건 모르지.”
“그럼 같이 가야죠. 지금 병원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우리 뿐이에요.”
압둘이 앞서서 다람쥐처럼 폐허 속을 이리저리 달렸다. 압둘은 이제 열세 살 먹은 어린아이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일 잘하고 무엇보다도 전령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다.
압둘의 뒤를 따라서 아만과 메메드 원장과 규희는 죽어라고 달렸다. 넷 모두 이미 아만이 구해 온 자루를 저마다 하나씩 들고 있었다.
멀리 터널 입구를 지키는 몇 사람이 보였다. 압둘을 보더니 터널로부터 작은 상자들을 마구 꺼내서 팽개쳤다.
약품을 받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었다. 물론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저들도 목숨을 걸고 들여오는 중이고, 이 터널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줄과도 같다.
상자들을 확인도 하지 않고 마구 자루에 처넣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숨소리만 씩씩 새어나올 뿐이다.
터널에서 나온 사람들이 빨리 사라지라고 손을 저었다. 우리는 자루를 어깨에 걸머지고 돌아서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무거워서 다리가 휘청였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달려서도 안 되었다. 의약품들 중에는 유리 앰플이 많기 때문에 깨져서는 안 된다. 길바닥을 나뒹구는 벽돌 조각들을 피하면서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병원으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루를 메고 병원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자루를 병원 문 안으로 들여다 놓고 나서야 가쁜 숨을 쉬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고 웃기 시작했다. 서로 얼빠진 년놈들처럼 서로를 마주보면서 마구 웃어댔다.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리고 활기차게 다시 환자들의 치료를 시작했다.

새벽 동이 트기 시작했다. 병원에도 희미하게 새벽빛이 들어와서 연료를 아끼려고 발전기를 껐다. 병원은 그래도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간호사와 의사가 주고받는 두런거리는 소리들로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아만이 모포를 가져왔다.
“좀 쉬세요.”
모포를 받아들고 야전용 침대 옆에 드러누웠다. 침대는 이미 환자들로 가득차서 규희가 누울 침대는 없었다. 책 몇 권을 베개 삼아 누워서 흐뭇하게 바보처럼 웃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그 짧은 시간에 수술을 여섯 차례나 했다. 저마다 장애는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생명은 구했다.
기분 좋게 잠이 들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렁그렁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건 중장비가 땅을 밟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탱크. 아. 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규희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서 일어났다. 그때, 확 병원의 창들이 밝아지면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병원 문으로 이스라엘의 중무장한 병사들이 기관총을 겨누면서 들어섰다. 삽시간에 병원 안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군인들이 잔뜩 들어서고 장교로 보이는 군인 하나가 들어오더니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다짜고짜 병원 안을 뒤지면서 다니기 시작했다.
메메드 원장이 장교에게 갔다.
“왜 이러시오? 여기는 병원이오.”
“보고 왔다.”
“뭘 말이오?”
“자루를 어디서 받아 왔나?”
메메드 원장은 말문이 막혔다. 터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건 모두를 죽이는 거나 같다. 지금 이 근방에서 믿을 건 그 터널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모두 병원 밖으로 내몰렸다. 환자를 제외한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모두 병원 앞 공터로 밀려나왔다.
공터 주변은 이미 장갑차와 탱크와 군용 차량이 즐비했다. 군인들이 규희와 동료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공터 한가운데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우리 뿐 아니라,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있었다. 넓은 병원 공터가 꽉 들어찼다.
장교는 메메드를 협박하는 중이었고 메메드는 연신 머리를 저었다.
규희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터널의 위치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예감했다.
탕. 총소리와 함께 메메드가 쓰러지고 간호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규희는 메메드에게 쫓아가려 했으나, 장교의 권총이 규희를 겨누었다.
뒤에서 압둘이 규희의 팔을 꽉 잡았다. 압둘을 돌아보았다. 압둘은 너무나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규희를 바라보며 팔을 잡아당겼다.
규희는 압둘을 바라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장교는 주변에 대고 수색을 명령했다. 그렁그렁 굉음을 울리면서 탱크들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규희와 일행을 지키고 선 군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교가 메메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큰소리로 겁을 주었다.
말하지 않으면 다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터널을 찾아서 없애야 물러간다. 죽기 전에 그걸 이해하기 바란다.
누군가가 나직히 노래를 불렀다. 구슬프기도 하고, 가슴 아리게도 하는 낮고 연약한 여자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장교가 눈을 부리리면서 돌아보았다. 여자를 손가락질하자, 규희는 자기도 모르게 노래에 합세했다. 여자 혼자 부르게 하기는 싫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합창으로 변했다. 장교와 군인들이 총구를 겨누었다. 그래도 노래는 끊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적들이 집 앞까지 들어와 있었소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파르티잔이여 나를 데려가주오
나는 이미 죽을 준비가 되었다오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내가 산에서 죽으면
내가 파르티잔으로 죽으면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나를 산에 묻어주오
아름다운 꽃그늘 아래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규희는 노래를 부르면서 해가 떠오르는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에게 안녕이라고 해야 할까. 성하. 좀 일찍 와주었으면 이렇게 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차오 벨라. 안녕 내 사랑.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면
아름다운 꽃을 보겠지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말해주오 파르티잔의 꽃이라고
말해주오 파르티잔의 꽃이라고

오 벨라 차오 벨라 차오 차오 차오
오! 안녕 내 사랑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