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쿄는 삼 일 연속 맑은 날이 계속되지 않는다. 오늘 오후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 아직은 맑은 한낮의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가로수들을 반짝이며 흔들리게 했다.
성하는 도청 앞, 게이오프라자 호텔의 일 층에 있는 커피숍 창가에 앉아 일본어로 된 신문을 읽으며 늦은 아침을 먹었다.
영어로 된 신문이 더 익숙했지만, 호텔에서는 일본인 여권을 보고 일본 신문을 넣어주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성하는 일본어를 꽤 잘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처음 도쿄에 왔을 때 얼마간을 어색해했지만, 무슨 일에든 문제해결이 빠른 그답게 곧 익숙해졌다.
그는 이제는 노인네들이나 외국인들밖에 사용하지 않는 구형 핸드폰을 꺼내서 잠시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쳤다.
호텔 문을 나서면서 안경을 끼고 잠시 리무진 버스를 기다리는 듯이 서성거렸다. 그의 어깨에는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가방이 메여 있었다.
그는 어깨의 가방이 무거웠는지 잠시 내려놓고 무료한 듯 길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명 더 호텔에서 나왔다. 그들은 트렁크와 짐들을 놓고 리무진을 기다렸다.
길 건너에는 거구의 야쿠자풍 사내 서넛이 주변을 경계하며 서 있었다. 그리고 까만색의 중형 렉서스 한 대가 와서 섰다.
렉서스에서는 한 중년인이 내려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야쿠자풍의 사내들과 손짓으로 인사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호텔 방향으로 걸어왔다.
그는 리무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쳐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짐 맡긴 것 찾으러 왔소.”
중년인은 호텔 콘시어지에게 딱지를 내밀었다. 콘시어지가 딱지를 받고 커다란 가방을 내밀었다. 중년인은 가방을 받아들고 리무진을 타려고 다시 호텔 현관으로 나왔다.
리무진을 기다리는 사람들 맨 뒤로 가서 서며 주머니에서 리무진 표를 꺼내들었다. 약간 초조한 듯이 다리를 떨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리무진이 다가왔다.
사람들이 가방을 챙기면서 줄을 섰다. 그리고 리무진이 다가와서 섰을 때, 중년인은 갑자기 홱 돌아서서 호텔로 들어갔다.
그는 호텔의 로비로 가서 화장실과 공중전화가 있는 구석진 방향으로 걷더니 모퉁이에 기대서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 김중식이오.”
전화에서 응답이 왔다.
“리무진 타셨습니까?”
“도대체 갑자기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요? 가만히 있는 사람을 떠나라고 몰아내는 이유가 뭐요?”
“말했지 않습니까? 이곳이 위험해졌다고요.”
“한국은 더 위험하지 않겠소?”
“지금 김선생이 가진 여권은 완벽하게 세탁된 여권이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난 한국이 아닌 중국으로 가겠소.”
“중국이 더 위험한 걸 모르겠소? 우리가 안내하는 대로 하시오. 아니면 더 위험해질 수 있소.”
김중식은 핸드폰을 끊고 잠시 우울하고 짜증 나는 얼굴로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완벽하게 죽어서 시체까지 화장을 한 상태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위험해질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은 그냥 단순하게 어디에도 연락하지 말고 조용히 한국으로 입국하라고 했다. 나올 때는 밀항으로 왔는데, 들어갈 때는 세탁된 여권을 가지고 들어가라고 한다.
세탁된 여권은 위조된 여권과 다르다.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의 여권이다. 진짜 여권의 주인은 일본에 들어와서 귀국하지 않고 그냥 눌러앉아있다. 정교하게 머리치기를 한 여권이기에 걸릴 염려는 없다.
문제는 한국에 돌아가기가 싫다는 점이다. 만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시에는 한국의 자기와 연루된 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점이 두려웠다.
어쩌지?
김중식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리무진을 타지 않으셨군요.”
“잠시 생각이 좀 복잡해서……”
“타셔야 합니다. 만일 이번 비행기로 귀국하지 않으면 우리도 김선생의 신변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 아니라 충정으로 이해해주십시오.”
빌어먹을. 거금을 꿀꺽해 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다니.
“지금 예약된 택시가 호텔 후문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늦지 않게 택시를 타십시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발을 끌듯이 걸으며 호텔 후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쩔 수 없다. 저들이 뒤를 봐주지 않으면 일본 생활이 어렵다.
이래서 야쿠자들은 믿으면 안 돼.

택시는 아슬아슬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김중식은 이왕 가기로 했으니 서둘러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수속을 밟고 면세구역으로 들어섰다. 비행기는 이제 막 탑승을 시작하고 있었다.
김중식은 그 맨 뒷줄에 가서 힘없이 섰다. 바로 앞의 사나이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언뜻 쳐다보면서 얼결에 같이 웃었다.
굵은 플라스틱 안경테를 쓴 사나이는 다부져 보이기도 했고 온순해 보이기도 했다. 동양인치고는 눈동자가 상당히 옅어서 갈색으로 보였다.
“절 아세요?”
김중식은 불안해서 바보처럼 물었다. 사나이가 싱긋 웃었다.
“아니요. 숨을 가쁘게 쉬셔서 몸이 불편하신가 했습니다.”
김중식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의사요?”
“아닙니다.”
“몸에 열이 많은 것뿐이오.”
사나이는 그냥 고개를 돌리고 탐승객들의 줄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신 것 같군요.”
김중식도 비행기 트랩을 걸어갔다. 웃기는 놈. 요즘 에볼라바이러스가 유행이라니까 내가 전염병자로 보여서 겁이 났나?
그러거나 말거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플라이트 타임 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어느새 육지가 나타나더니 공항 활주로가 나타났다.
김중식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세관신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불과 삼 일 전에 출국한 내국인. 고영석. 새로운 이름이고, 새로운 신분이다.

공항 이미그레이션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리고 짐을 찾으러 가서 돌아가는 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건너편에 아까 보았던 사나이가 역시 짐을 찾으려는지 서성거리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사나이가 또 싱긋 웃어 보였다. 기분 나쁜 놈이군. 문득 자신도 안경을 하나 써야 할까 생각했다.
변장에는 안경이 최고지. 혹시라도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주 먼 곳으로 가서 지내야 한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숨어서 지내는 데 지장은 없다.
어디로 갈까?
문득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지만, 영화 하나가 생각났다. 데드맨 워킹. 나야말로 좀비인가? 죽은 자가 걸어다니는 꼴이 되었군.
어쨌든 서울은 피해야지. 멀리 가자. 복잡하고 정신 없는 대도시이면서 서울에서 먼 곳.
부산으로 가자.
김중식은 서울역행 공항철도를 이용하려고 지하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의 안경잡이는 보이지 않았다.

성하는 케이티엑스의 표를 끊는 김중식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느새 안경은 쓰지 않았고 깊게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었다. 가방은 없고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등산화를 신은 차림새였다. 배낭 위로 등산용 스틱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성하는 천천히 김중식의 뒤를 따라서 플랫폼으로 나갔다. 부산행 열차가 문을 열어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2.

레지던스 호텔의 창가에 서면 해운대가 내려다보였다. 굽이굽이 보기 좋게 뻗은 달맞이길은 해운대와 송정을 잇고 있는데, 호텔은 그 한가운데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하는 가장 높은 층의 방을 달라고 해서 6 층에 자리를 잡았다. 방의 옆으로 난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이 보였다.
옆 건물은 김중식이 장기로 방을 얻은 원룸 건물이다. 창이 약간 비껴서 보이는 바로 하나 아래층 방에 김중식이 묵고 있었다.
겨울이라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망원경을 이용해서 보면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밤에 불을 켜면 더 잘 보였다. 같은 원룸에 방을 하나 더 얻어 두었지만, 주로 지내는 때는 여기서 지내기로 했다. 움직임이 불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며칠 살펴본 결과로 보아, 김중식은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사이에 할 일을 해야 했다.
성하에게는 당장 필요한 것이 있었다.

부산역 앞의 외국인 거리는 러시아 뱃사람들과 매춘부들로 흥청거렸다. 네온싸인이 현란한 사이로 가죽옷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성하는 그 중 하나를 택해서 멀찌감치 바라보며 지키고 섰다. 러시아 선원들이 몇 명 오갔지만, 대부분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빈손으로 나왔다.
한국의 가죽옷은 비싸다. 특히 털이 빡빡한 무스탕은 더 비싸다. 러시아 선원들은 귀한 달러를 일, 이백 달러 정도 들고 와서 달라고 하지만, 그 가격으로 살 수 없으니 실랑이를 하다가 그냥 돌아서게 된다.
지루하지만 더 기다렸다.
해가 지고 점점 더 추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곳이 이 골목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두 명의 러시아 선원이 흐뭇한 표정으로 각자가 무스탕을 입고 나왔다. 입고 들어갔던 옷은 벗어버리고 없었다.
성하는 그제야 두 선원의 뒤를 따라갔다.
두 선원은 유치하게 여성의 신체를 그린 네온싸인 간판 아래로 들어갔다. 성하는 천천히 선원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야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여기저기 테이블에 앉아서 러시아 선원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선원 둘은 기분이 좋았는지 얼음을 띄운 소주를 마시면서 여자들과 히히덕대고 있었다.
성하는 두 선원에게로 가서 웃으며 말을 걸었다.
“같이 한잔할까?”
“응? 무슨…?”
“필요한 게 있어서 상의 좀 하려고 하니 같이 한잔합시다.”
자리에 끼어 앉아서 비싼 양주를 시키고 보란 듯이 백 달러짜리를 여자들의 팁으로 주면서 자리를 뜨게 했다. 러시아 선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팁을 줄 때 일부러 머니클립째 꺼내면서 두툼한 백 달러 지폐로 두 선원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옷가게에 준 것하고 비슷한 걸 원해.”
선원들이 멈칫했다.
“비슷한?”
“같은 종류지만 좀 더 값이 나가는 것 말이야.”
선원 하나가 눈을 치떴다.
“우리가 옷가게에 준 게 뭔데?”
옆의 선원도 같이 설레발을 쳤다.
“달러에 특별한 달러도 있던가?”
“달러는 특별하지 않아도 총은 특별한 게 많지.”
두 선원이 눈을 크게 뜨고 성하를 노려보았다.
“옷가게에 부탁할 수도 있지만, 난 나와 거래를 한 작자들이 계속 한국에 있는 게 싫어서 말이야.”
선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성하는 싱긋 웃으며 머니클립에서 백 달러 지폐 두 장을 뽑았다. 백 달러 두 장이면 많지도 적지도 않다. 피차에 떼어먹고 물러나기에도 그렇고, 떼어먹혀도 그저 그런 액수다.
“내가 원하는 걸 가져오면 어미에는 하나당 열 장을 주고, 새끼에는 하나당 한 장을 주지.”
“우, 우리한테 없다면?”
“없는 걸 달라고 하지는 않아. 너희 배에 있는 거야.”
성하는 선원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난 러시아 배를 잘 알거든.”

성하는 다음 날, 사냥용 라이플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최신형을 받았다. 넘겨받은 총알은 아홉 발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577 T-rex는 훌륭한 총이다.
러시아 선원들 중에 사관들은 종종 허가 받은 사냥용 라이플을 가지고 다닌다. 평소에 사용하던 저격용 총으로는 부적합하지만, 그런 걸 한국으로 들여올 수도 없고, 가지고 다니는 것도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게 한국의 실정이다.
그래도 사용할 만한 것은 파괴력이 좋고 멀리 나간다. 게다가 사냥용인 만큼 바렐이 길어서 숨어서 저격하기 좋다. 여러 번 사용한 듯 보이는 조준경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총은 중고가 좋다. 총의 주인이 영점을 아주 잘 잡아놓았다는 이야기니까.
권총은 글록을 받았다. 주요 부위를 빼고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서 가볍고, 탄창에 17 발이나 장착할 수 있었다. 총알은 탄창으로 두 개, 그러니까 서른네 발을 넘겨받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다음으로 구할 것들은 전부 공구상이나 화공약품상, 철물점과 시장통에서 구해야 하는 것들이다.
러시아 선원들에게 다음에 올 때는 같은 종류로 더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러면 자신이 다 구입하겠다고 하면서 가짜 전화번호를 주었다.
물론 그들이 다시 한국에 들어올 일이 있다고 해도 두 번 다시 만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해주는 것은 그저 딴생각 말고 단골로 생각하라는 헛소리다. 러시아 선원들은 달러를 왕창 챙기고 기분 좋게 사라졌다.



3.

날이 추웠다. 꽁꽁 얼어붙은 주택가의 골목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고급 주택들 사이에서도 크고 거창해서 블록 하나를 온통 차지한 호화주택의 차고가 열렸다. 그리고 검은색 승용차가 나와서 대문 앞으로 돌아갔다.
대문이 열리고 서류가방을 든 검은 양복의 사내가 쫓아 나오면서 말했다.
“의원님 나오십니다.”
승용차의 운전석에서 양복을 입은 운전기사가 튀어나와 얼른 뒷좌석의 문을 열고 섰다. 양복의 사내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고 나온 서류 가방을 넣은 다음,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문이 열리고 나서도 한동안 인기척이 없었다. 양복의 사내와 운전기사는 추위에 손을 비비면서 의원님이 왜 나오다 말았는지 궁금해하면서 쳐다보았다.
여당의 원내 대표 최영석 의원은 집 정원을 벗어나려다 말고 돌아서서 정원의 구석진 자리로 갔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을 구둣발로 차면서 핸드폰에 대고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 작자가 왜 들어와?”
얼굴색까지 추위에도 불구하고 시뻘겋게 변했다.
“도대체 일본 쪽 라인을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전화에서는 황당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입니다.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의원은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의원님께서 자문을 좀 해주셔야…’
최의원은 잠시 말을 잊고 새끼줄이 감긴 나무둥치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동안을 생각에 잠기는데, 전화에서는 재촉 소리가 들려왔다.
‘의원님. 빨리 무언가 조처를 해야…’
최의원은 생각을 끝내고 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씹어뱉었다.
“입 다물고들 있으라고 해. 내가 알아서 조처하겠다.”
전화를 끊고 굳어진 얼굴로 대문을 나섰다. 처리해야지. 세상 뒤집어질 일 있나. 장례까지 치른 놈이 어딜 들어와? 미친 놈.
정말 이 세상 뜨게 해주마.

범칼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부산 바닥에서는 누구나 그를 범칼이라고 불렀다. 그는 키가 작고 비쩍 말랐지만, 누구도 그와 마주쳐서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부산 신부두파의 형님이어서가 아니다. 그의 인상과 눈매가 너무 날카로워서, 가까이에서 마주치면 일단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는 특이하게도 조직의 서열 세 번째가 되도록 학교에 갔다 온 전과가 없다. 그만큼 그는 모든 일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평소에는 바닷가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소리 없이 지낸다.
그렇지만 만일 조직에 꼭 필요한 작업이 생기면, 그때는 소리 없이 그가 나섰다. 그와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부하 창수와 기태가 움직이면 누구도 모르게 상대는 처리 당했다.
그는 주로 칼을 사용했는데, 너무나 순식간에 감쪽같이 해치우고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증거도 증인도 없도록 확실하게 작업하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서 레스토랑의 주인으로 충실했다.
그래서 신부두파의 두목과 스폰서들은 그를 애지중지했다. 웬만한 일에는 그를 부르지 않았고, 그가 함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썼다.
그래도 바닥이 바닥인지라, 그는 서서히 부산 바닥에서 유명인이 되었다. 민간인들은 모르지만, 조직원이라면 범칼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졌다. 그의 이름은 몰랐지만, 범칼이라는 별명은 민간인들 사이에서까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녔다.
그에게 2 년 만에 작업이 떨어졌다.

창수에게는 차 한 대를 준비하도록 했다. 도난 신고가 되지 않도록 훔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항 부근의 사설주차장에 맡겨져 있는 차를 슬쩍 사용하고 다시 가져다 놓는 방법이다.
그럴 경우에 공항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의 허술한 시설에 줄줄이 가져다 놓기 때문에 훔치기에 좋다. 게다가 차주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하루 정도 빼냈다가 다시 가져다 놓으면 알 수가 없다.
기태에게는 현장을 확실하게 파악해 오도록 했다. 장소에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과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일과까지 시간별로 파악해야 한다.
이번 작업은 특별해서 그냥 제거하고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시신 자체가 지상에 없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다른 작업에 비해 공을 많이 들여야만 한다.
차량은 봉고차로 해야 한다. 죽여서 움직이게 할 것인지 살린 채로 잡아서 처리장까지 끌고 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 있어서 잠시 신중하게 생각했지만, 역시 산 채로 처리장에 데리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시체를 운반하는 일은 대로상에서 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밤이 늦은 시간에 해야 하는데, 요즘의 달맞이길은 평일에도 밤이 새도록 오가는 술꾼들이나 아베크족이 있다.
원룸 건물로 들어가는 것도 cctv 때문에 적절하지 않고, 시체를 아무도 모르게 끌고 나오는 것도 힘든 작업이다.
역시 처리장까지 산 채로 잡아간다. 범칼의 특기는 칼이지만, 이번 작업은 칼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해치우는 게 중요하다.
스폰서는 목숨을 걸라고 했다. 목숨을 걸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큰형님은 자기 목숨도 걸려 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도 처음 듣는다.
작업에 대해서 아는 건 딱 세 사람, 그런데 창수와 기태까지 다섯이 되어버렸다.

창수가 차를 구해왔다. 기태는 목표가 저녁을 꼭 밖에 나가서 먹는다는 걸 알아왔다. 다른 때는 몰라도 저녁만큼은 꼭 달맞이길 중턱에 있는 고급 한식집에서 먹는다.
목표는 공무원이나 군인 출신도 아니면서 저녁 시간을 엄수해서 정확하게 7 시에 나선다. 그리고 약간의 산책을 한 다음, 7 시 반에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원룸에서 식당까지의 30 분이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창수에게는 차를 원룸 옆의 호텔 주차장에 대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기태와 함께 해운대에서 달맞이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셋 모두가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었다.
만일을 생각해서 트레이닝복 안에 복대를 차고 칼 두 개를 챙겼다. 기태도 마찬가지였다. 창수는 칼을 쓰지 않는다.
물론 칼을 쓰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위협용으로만 필요할 뿐이다. 상대는 싸우자고 달려들 위인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모르는 소리다. 그렇게 상대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면 예상 못 한 엄청난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원룸 건물이 보이는 커브 길에서 도로 아래의 산책로를 확인하고 그 아래에 몸을 숨겼다. 한겨울이라 해가 지면 조깅하는 주민들이 없어서 좋았다.
시계를 보았다. 7 시 5 분 전. 기태와 나란히 엎어져서 원룸만 바라보았다.

창수는 차를 주차장에 대놓고 운전석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적어도 7 시 5 분에서 10 분 사이에 연락이 온다. 차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담배를 다 피우고 창밖으로 버리려는데, 청소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시발놈. 꽁초를 차 안에 버리면 안 되는데, 시비가 붙으면 골 아프다.
꽁초를 버리려고 차에 내렸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면서 휴지통을 찾는데, 청소원이 다가오면서 자기가 든 쓰레받기를 내밀었다.
쓰레받기에 꽁초를 버리다가 문득, 청소원의 눈이 섬뜩해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청소원이 입꼬리만 움직이면서 싱긋 웃었다.

7 시에서 1 분이 채 안 지난 시간에 정확하게 목표가 원룸의 현관문을 밀치고 나타났다. 두터운 스웨터에 니트로 된 커다란 카디건을 걸치고 펑퍼짐한 골프바지를 입고 있었다. 신발은 역시 운동화였다. 기태가 파악한대로 밥을 먹으러 나선 게 틀림없다.
기태와 눈짓을 나누고 천천히 길로 나섰다. 목표는 길 건너에서 식당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태연히 걸으면서 기태가 핸드폰을 열어 창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시동 걸고 출발해서 불과 2 분이면 차가 내려온다. 목표의 뒤로 달라붙자, 목표가 경계심을 느꼈는지 흘끗 돌아보았다.
기태가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 범칼은 그의 목을 잡아서 소리가 나오지 않게 했다. 그 상태로 공포에 질려서 눈을 부릅뜬 목표에게 속삭였다.
“흥분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야 안 죽는다.”
끄윽. 목표는 눈만 부릅뜬 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언덕을 돌아보았다. 차가 나타나지 않는다. 기태가 당황한 눈으로 범칼을 쳐다보았다.
“숲으로 가자.”
목표를 끌고 급하게 길을 벗어나서 숲으로 갔다. 도로에 차들이 지나다녀서 조바심이 났다. 숲으로 끌고 들어가서 목표를 나무에 기대게 해놓고 잠시 생각했다.
이런 실수가 일어나다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창수가 신호를 받지 못한 것일까.
신호가 아니라, 아예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때, 기태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도로에 창수의 차가 와서 섰다. 그러더니 덩그러니 그냥 멈춰 있다.
저 미친 놈. 그냥 서 있으면 어쩌라는 건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목표를 잡은 채 도로 건너를 다시 갈 수는 없다. 내려서 주변이라도 보든가.
목표의 목줄을 여전히 잡은 상태로 기태에게 말했다.
“가서 도로 건널 수 없다고 해. 차 돌려서 다시 오라고 해.”
“그냥 죽여서…”
“차 돌리라고 해. 인마!”
기태가 달려 나갔다. 목표가 갑자기 지랄을 했다. 죽이자는 말을 듣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할 수 없지.
목을 잡은 채 칼을 담그려는데,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청소부 차림의 한 사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시팔. 목격자가 생겨버렸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목표를 담그려던 칼을 청소부를 향해 던졌다. 어둡고 숲 속이지만, 청소부가 선 곳까지는 조깅코스여서 길이 좋고, 따라서 시야도 좋다.
쉭. 칼을 던졌다. 그러면서 상대도 칼을 던지는 걸 알았다. 그러나 칼이라면 전국 최고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자기 칼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걸 보았다. 상대는 칼을 던지면서 아주 살짝 몸을 틀었는데 목의 경동맥을 겨누고 날아간 자기 칼이 빗나가고 말았다.
동시에 자기 심장이 뜨끔하는 걸 느꼈다. 불에 덴 듯이 화끈한 느낌이다. 목표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거 뭔가 잘못되었다.

기태는 차에 창수가 없다는 걸 알고 놀라서 돌아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 쪽에서 길을 건너면서 차에서 내리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다시 숲을 향해 돌아서서 급하게 달려왔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퍽 하고 자기 가슴에 둔탁한 충격이 오는 걸 느꼈다. 숨이 막히면서 전신이 경직되었다.
몸의 균형을 잃으면서 숲을 보았다. 숲에서 청소부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게 뭘까? 의문스러웠지만,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쿵. 그는 숲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로가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져버렸다.
끼이익. 지나가던 차 한 대가 급정거를 했다. 길 건너편에도 가로막고 선 창수의 차 때문에 다른 차가 지나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두 차의 운전자가 문을 열고 내려섰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뭐?”
최의원은 저녁을 먹으려고 의원회관을 나서다가 그만 딱딱하게 굳어져서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국회의사당의 잔디를 향해 걸으면서 전화에 대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안 돼! 이 병신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