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트사이드에서 발이 묶여버렸다. 유엔에서 의약품과 구호품들을 싣고 가려던 선박은 이스라엘의 거절로 인해 항구에서 초조하게 휴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상군이 투입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구호선은 멀거니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성하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자지구는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어서 구호선이 아니면 접근할 수가 없다. 구호단 소속으로 변신해서 의약품을 잔뜩 가지고 배에 올라탄 그로서는 더 이상 머뭇댈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구호선이라고 해도 휴전 상황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다. 잠시라도, 그러니까 열두 시간이나 스물네 시간 정도만이라도 휴전이 된다면 구호선이 접근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터키와 예전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구호선을 무차별 공격해서 터키인 십여 명이 죽어나간 사건 이후로 터키는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끊어버렸다.
비록 작년인가에 이스라엘이 공식으로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터키와 이스라엘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구호선은 언제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면, 포트사이드에서 출발해야 했다.
만일 키프로스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데, 키프로스공화국은 절대로 그런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키프로스에서 출발하는 구호선은 없다.
그런데 급기야 저녁 무렵에는 지상군 투입의 가능성까지 흘러나왔다. 불안한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새벽에는 지상군이 정말 투입되기 시작했다.
성하는 구호선으로 들어가는 안전한 길을 포기했다. 육로로 가야만 했다. 어딘가에는 평소에 물건을 몰래 반입하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그 통로를 봉쇄 하겠다고 지상군이 투입되는 것이다. 통로를 찾아내서 파괴하는 작전이 벌어지기 전에 통로로 들어가야만 한다.
통로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통로를 찾는 작전은 안쪽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일만이 아니라, 밖에서 모사드가 밀수꾼들을 찾아내서 미행하는 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모사드는 CIA나 G2에 비해서 월등히 뛰어난 첩보력과 작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미 가자지구의 곳곳에 스며들어서 공작도 없이 편안하게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작전을 개시한다.
밀수꾼들을 미행하고 통로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직접 공격하거나 무전으로 위치를 알려주어서 공습을 감행하도록 한다.
성하는 구호선을 내려서 라파로 향했다.
도하스트리트를 따라서 터널이 있을 것이었다. 차를 엄청난 돈을 주고 빌려서 그 차로 가자스트립을 향해 미친 듯이 몰았다.
사실 처음에 규희가 가는 곳이 ‘가자지구’라는 걸 알았을 때는 다른 곳에 비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반군도 없고, 하마스는 정식으로 선거를 통해 뽑힌 정당인 만큼 의사들을 테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런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더니 급기야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쉽게 끝나지 않을 전쟁이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이고, 지상군이 들어가면 위험해진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유엔이 떠들든, 아랍 국가들이 떠들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유엔의 학교나 병원도 폭격하고 심지어는 사원도 폭격한다.
그들은 전 세계의 돈줄을 쥐고 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시아의 웬만한 국가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서 ‘바나나 리퍼블릭’으로 전락할 수 있다.
사실 성하의 모국도 얼마든지 하루아침에 유태인들이 잡고 흔드는 세계의 금융계에 구걸하는 처지가 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모두가 유태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원하면 세계가 움직이고, 그들이 무언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 세계가 눈을 감아버린다.
사실 유태인이라는 말은 혈통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유태인은 종교와 관습으로 구별하는 말이다. 그들은 북유럽의 백인들로 이루어진 아슈케나짐과 원래부터 아랍에 살던 아랍계인 세파르딤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랍계의 세파르딤은 전체 유태인들 중에서 불과 2할을 넘지 못한다.
당연히 그들은 모습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그러니까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팔레스타인 땅이 우리 조상들 땅이라고 밀어내려고 달려든 것이 웃기는 이야기다. 성경 속 땅이라고 우기지만, 성경은 종교서적이지 역사서적이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하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동안 성하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자기에게 일을 청탁하는 편을 이해한다. 고객의 편에 서서 고객의 일을 이해하는 게 프리랜서로서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약점은 바로 정규희라는 여자였다.
사실 그는 사랑이라는 걸 몰랐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는 여가 시간에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서 잠시 머무는 안락한 오두막이라든가, 혹은 삶에 활력소가 되는 섹스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문득 마주친 정규희라는 여자는 완전히 다른 상대였다.
여자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자신의 분신이나, 자기 몸 안의 어떤 기관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심장이 아픈 듯한 괜히 안타깝고 괜히 눈물이 나는 사랑.
이런 걸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구나.
생전에 듣지 않던 유행가도 듣고 살다가 처음으로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규희였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인 것이 낯설기는 했지만, 그녀가 세상을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게 경이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아니, 그냥 그녀만 생각하면 가슴 한켠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저렇게 자신보다 남을 사랑해서야 어찌 이 세상을 살까.
사실 살아오면서 여자를 만나면 그냥 섹스를 하고 오래 시간을 함께 하는 걸 피하는 성하였고 여자를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싸구려 마초로 불려도 할 말이 없을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규희만큼은 어쩔 줄을 모르게 하는 여신이었다. 규희가 스킨십을 하거나 야한 음담패설을 하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자신이, 내가 왜 이러나 싶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단 하나,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유가 된 그녀가 위험하다.

사실 처음 서로 만나게 된 날, 규희는 성하가 그냥 우연히 마주쳐서 말을 붙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하가 규희에게 말을 붙인 건 그녀를 처음 길에서 만난 때가 아니었다.
성하는 그 전 겨울에 한국을 잠시 들어왔었고, 일을 하기 위해서 서울역의 노숙자들 틈바구니에 섞여들어 있어야 하던 때가 있었다.
얼굴도 때가 까맣게 낀 듯이 위장했고, 누더기가 다 된 덕다운을 걸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노숙자다. 머리도 치렁치렁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가진 거라고는 가슴속 깊이 목걸이처럼 차고 있는 지갑과 세 개의 얇은 칼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서울역에 나타나서 행사를 해야 할 목표의 증장이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었다.
전문적인 살인자는 모든 일의 시작이 기다림이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다. 어떤 상황이든 변함없이 목표를 마주하고 상황이 무르익기를 어떤 악조건이라도 견디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노숙자 무리들에게 동화되기 위해서 구걸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뒹굴었다.
며칠을 그렇게 있는데, 갑자기 주변 노숙자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밥차는 올 시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보니, 의료진이 도착한 거였다.
어울려야 해서 성하도 슬그머니 일어나 그쪽으로 옮겨갔다. 그렇지만 몸에 손을 대거나 하게 하면 안 되니까 그냥 뒤에 서서 차례를 자꾸 미루면서 구경했다.
그러다가 주변 눈치를 보면서 마치 진료를 마친 것처럼 슬그머니 술에 취해서 진료차가 오거나 말거나 퍼져 있는 노인들 사이로 다시 섞여들었다.
그런데, 의료진으로 있던 한 여의사가 진료통을 들고 바쁘게 오더니 성하 옆에 있던 노인을 불렀다.
“할아버지. 또 못 본 체하시네.”
성하는 놀라서 옆의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술에 취해서 의사를 피해서 돌아누웠다. 그런데 의사는 노인에게 와서 확 입고 있는 누더기 옷을 잡아채서 자기를 보게 했다.
“다리 좀 봐요. 피하지 말고.”
의사는 아직 성하보다도 어리고 깔끔해 보였다. 그런데 지저분한 노인의 몸을 거침없이 만졌다.
“괜찮아. 많이 나았어.”
“그러니까 보자고요.”
의사는 기어이 노인을 일어나 앉게 하고는 바지를 잡아 올렸다. 노인은 평소에도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노인의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고 시커멓게 색이 죽어 있었다.
“이게 괜찮아요?”
노인이 무안한 듯 웃었다.
“아프지는 않아.”
“술 마시니까 마취제 역할을 해서 그런 거지. 이건 심각한 상태거든요?”
의사는 그러다가 흘끗 서울역 역사를 보더니, 성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저씨. 할아버지 좀 같이 부축해요. 여기 추워서 진료가 안 돼. 역사 안에 좀 들어가야겠어요. 할아버지 안 오시는 바람에 시간 없다고 진료차가 가버렸잖아요?”
성하는 역사를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낮에 저기 들어가면 나중에 경위들한테 혼나요.”
최대한 어눌하게 말했다. 낮에 역사에 들어가서 배회하면 나중에 경위들이 와서 지랄한다. 여행객들에게 방해가 되니까 조심하게 하느라, 시범케이스로 하나 잡아서 일반인들이 못 보는 새벽녘에 죽도록 팬다.
“못나게 굴지 말고 좀 부축해요.”
의사는 성하의 의견을 묵살한 채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성하는 하는 수 없이 노인을 부축하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역사 안에서 의사는 거칠 것 없다는 듯이 사람들의 싫어하는 시선을 완전 무시하고 노인을 대기석에 앉혔다. 그리고 약통을 놓고 노인의 바지를 올리고 치료를 시작했다.
성하는 난처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위들과 시비가 붙으면 곤란하다. 아니나 다를까, 경위 두 명이 차가워진 얼굴로 다가들었다. 노인이 움찔했다. 성하도 이거 어쩌나 싶어졌다.
그런데 의사는 태연히 치료를 하고 있는데, 노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경위들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일어서려고 했다.
의사가 노인의 태도를 보고 고개를 돌려 경위들을 쳐다보았다.
“왜요?”
대뜸 시비조로 나갔다. 경위들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진료차 놔두고 왜 여기서…”
“여기서 이러면 곤란하지.”
의사의 눈이 치떠졌다.
“진료차 없거든요? 그리고 날도 추운데 도대체 왜 안에 들어와 있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서울역사 누가 전세 냈나?”
경위들이 열은 받아도 다른 사람들 시선 때문에 화를 누르고 조용히 나갈 것을 종용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 몰라요?”
의사가 이번에는 주변에 인상 찌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앙칼지게 말했다.
“왜 싫어해? 누구나 아프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맨날 남의 일 같지만, 언제 자기한테 닥칠지도 모르는 일 아냐?”
사람들이 슬그머니 외면하고 이리저리 피해갔다. 경위 둘도 결국 고개를 흔들면서 그냥 자리를 떴다. 성하는 난처해서 그냥 고개 숙이고 있는데, 의사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상처를 포비든으로 닦아내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런 다음 약통에서 열 팩을 꺼내서 노인에게 주며 말했다.
“이거 흔들어서 대고 있어요. 그리고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의사는 경위들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소리로 떠들었다.
“내쫓기만 해 봐. 확 고소해버릴 거야!”
경위들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의사는 성하에게 말했다.
“옆에 좀 있어주세요. 아셨죠?”
성하는 난처해서 고개를 팍 꺾고 있었다.
“안 죽으니까 겁내지 말아요.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의사는 성하에게 약봉지를 내밀었다.
“이 할아버지, 약 잘 안 먹으니까 옆에서 시간 따라 좀 먹게 하세요. 하루 세 번. 제때 밥 안 드시니까 상관없이 그냥 먹여요.”
성하는 얼결에 약봉지를 받았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지만, 거부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여자다.
의사는 약통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성하의 가슴속에 이상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어릴 적, 미국 땅에서 힘들 게 살아가던 시절. 그 시절의 자기를 그토록 보호하려고 애쓰던 강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바로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고 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호받거나 보호하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자기 자식도 아니고, 형제도 아닌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보호하려고 매섭게 구는 걸까.
마치 자기 새끼를 지키려고 열차를 향해 돌진하는 코뿔소처럼 무섭게 굴 수 있는 걸까. 나이는 자기보다도 한참 어린 여자의 어디에서 저런 힘과 사나움이 나오는 걸까.
성하는 노인에게 약을 먹였고.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 오랜만에 엄마를 보았다. 바로 그 의사가 규희였다. 잊히지 않던 규희의 모습은 어느 날, 성하 앞에 나타났고 성하는 규희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그때, 규희는 너무나 변한 성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규희는 성하에게 연인이자, 어린 시절의 엄마였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피붙이나 같았다.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더 큰 건 바로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버팀목이었다.

성하는 황량한 벌판을 미친 듯이 달리면서 조급함으로 조갈이 났다. 아무리 생수를 마셔대도 목이 탔다.



2.

얀은 어둠 속에서 부하 둘과 함께 도로 건너편 장벽을 바라보았다. 팔레스타인 경찰차가 지나가고 난 뒤, 몇 명의 그림자가 도로 아래쪽에 움푹 팬 하수구로 들어갔다.
저기다.
그는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터널의 파괴 방법은 두 가지다. 좌표를 알려서 폭격하는 방법과 직접 들어가서 폭파하는 방법.
이번에는 직접 들어가기로 했다. 반대편이 어디로 나오든, 그 위치와 안쪽에서 물건을 받는 자들을 찾아내 제거하기 위함이다.
얀과 부하들이 소속된 델타팀은 샤바크 내에서 주로 전투를 맡고 있는 전사들이다. 얀과 부하 서넛이면 일대 소대도 상대할 만하다.
이번 작전에는 블랙을 다섯이나 데리고 나섰다. 전시이기 때문에 화이트들로는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공작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다.
터널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 하마스의 일원으로 보이는 사내들 서너 명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 생필품이든 무기든 상관없다. 모든 반입을 막는 것도 임무지만, 특히 건너편에서 물건을 받는 놈들까지 털어내야 한다.
터널 안으로 그들이 사라지자, 재빠르게 길을 건너서 터널 입구로 향했다. 사람 둘이 허리를 굽히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하수구로 위장되어 있었다.
부하 둘에게는 뒤에 남으라고 하고 자신이 선두에서 권총을 꺼내 총구를 겨눈 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부하 셋이 따라붙었다.
어느 정도 들어가서 부하들에게 총구를 보이면서 소음기를 끼웠다. 부하들도 알아듣고 일제히 소음기를 끼웠다. 기관총은 허리 뒤로 둘러메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동굴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그러나 심하게 구부러지지는 않아서 금방 추격할 수 있었다. 앞쪽에 물건을 작은 바퀴가 달린 운반대에 싣고 열심히 달리는 사내들이 보였다.
바쁘게 달리느라 뒤를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모두가 무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두 놈이 나르고 다른 두 놈이 총을 어깨에 멘 채 달렸다.
총을 들고 달리지 않는다는 건 전투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놈들은 하마스가 아니다. 그냥 생필품이나 의약품을 나르는 밀수꾼들에 불과하다.
달려가면서 맨 뒤의 놈에게 한 방을 먹였다. 퍽. 하나가 쓰러지자, 나머지가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었다. 하나가 총을 어깨에서 끌러내는 걸 보고 다시 한 방을 쏘았다.
운반대를 끌고 밀던 두 명은 겁에 질린 채 손을 들고 물러섰다.
볼 것 없이 쏘려는데,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둔탁했지만, 얀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안다. 소음총을 여러 번 사용해 본 그는 소음총의 발사음을 알아들었다.
홱 돌아서는데, 퍽퍽, 연달아 부하들이 쓰러졌다. 놀라서 총을 겨누는데, 퍽. 뜨거운 충격이 가슴에서 일어났다.
몸이 충격으로 휘청하면서 뒤로 넘어갔다. 그래도 상대를 겨누려고 상체를 일으키는데, 다시 눈앞에 확 어둠이 번졌다.

운반대를 나르던 두 사내는 멍한 표정이 되어서 시체들을 헤집고 다가드는 한 사나이를 보았다. 동양인이었다. 다부지게 생기고 눈빛이 차가웠다. 방금 총질을 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태연함이 공포를 느끼게 했다.
등에는 커다란 자루를 메고 있었다.
“계속 가시오.”
사나이는 손짓했다.
“내가 뒤따라가겠소.”
두 사내는 다시 운반대를 끌고 밀면서 달렸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 사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공포심에 정신없이 달렸다.

터널이 끝나는 곳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들어왔다. 운반대를 끌고 밀면서 동굴 입구로 나간 자들이 돌아서면서 성하를 손가락질 했다.
기관총을 든 사내 둘이 성하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성하는 자루를 가리켰다.
“난 당신들 편이오.”
사내들이 총구를 들이댄 채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성하는 나가면서 말했다.
“이 터널은 노출되었소. 그러니까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다시는 사용하지 마시오.”
수염을 길게 기른 한 사내가 다른 사내들을 헤치고 나섰다.
“나는 알리라고 하오. 당신은 누구요?”
“사람을 찾고 있소. 한국인 의사를 혹시 아시오?”
성하는 자기 가슴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내게 사진이 있소.”
사진을 꺼내서 내밀었다. 알리가 사진을 받아서 들여다보았다. 옆의 사내들도 들여다보다가 서로 떠들어댔다. 영어가 아니어서 성하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모르는 것 같지 않아서 가슴이 뛰었다.
“알고 있소?”
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터널에서 몇 시간 전에 의약품을 가져갔소. 그런데 그 지역은 지금 갈 수 없소.”
“왜?”
“그 병원까지 이스라엘 군대가 점령한 상태요.”
“안내만 해주시오. 내가 가겠소.”
“어림없소. 그들이 철수할 때까지는 갈 수 없소. 병원만이 아니라 그 부근은 모두 점령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절대 갈 수 없소.”
“근처까지만 안내해주시오. 난 가야만 합니다.”
사내들이 서로 의논하더니 알리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성하는 알리를 따라 바쁘게 폐허 속을 달렸다. 사방에서 쿵쿵 포격 소리가 들렸다. 가끔 길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성하는 초조해지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싸움터에서 흥분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답지 않은 짓이다.
그때, 이제 갓 열 살을 넘었을 것 같은 어린 소녀가 울면서 걸어왔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리가 소녀를 길 안쪽으로 낚아챘다.
“다친 거냐?”
소녀는 아랍어로 울면서 떠들었다. 성하는 초조하고 답답했다. 소녀와 대화하던 알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하에게 말했다.
“군대는 방금 철수했답니다.”
“병원은?”
알리가 성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자도 의사도 다 죽었답니다.”

병원은 완전히 전소된 상태였다. 여기저기 구덩이가 패여 있고 사방에 학살당한 시체들이 즐비했다. 사람들이 시체들을 찾아다니면서 울부짖었다.
성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미친 듯이 시체들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평소의 냉정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침착하고 용의주도하던 성하가 아니었다. 그는 비루해지고, 나약해진 한 인간이 되어서 흙먼지와 시커먼 재 속을 뒤집고 다녔다.
그리고 어린 아이를 끌어안고 쓰러져 있는 한 시체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잿더미와 흙으로 인해 회색이 되어버린 작은 여자의 시체는, 그러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여자의 등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아이를 보호하듯이 끌어안고 자기가 등에 총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확인사살이라도 하듯이 세 발이나 쏘았다. 그래서 결국 아이까지 죽고 말았다. 여자와 아이 사이에는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린 듯 검붉은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성하는 여자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대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엉엉 울었다. 짐승처럼 상체를 흔들면서 울부짖었다.
주변의 슬프고 비통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3.

아침 안개 속에 사람들이 시체를 거두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나 찾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어느 하나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성하는 그 가운데에서 아직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쳐서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는 석상처럼 굳어져서 전혀 미동도 없이 여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알리가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만졌다. 순간, 성하는 확 몸을 돌리면서 알리를 때리려고 했다.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알리는 얼른 물러서면서 두 손을 들어보였다.
성하가 손을 거두면서 멍한 눈으로 알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나에게 화내지 마시오.”
알리는 측은한 눈빛으로 성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평안을 찾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노인은 인자한 얼굴로 성하를 바라보았다. 이미 알리로부터 그가 얀과 얀의 부하들을 살해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젊은이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자네의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슬프게 생각하지만…”
성하는 무표정하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왔다. 눈빛이 차갑고 보통의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화가 나거나 하는 표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네. 저들에게 노출되었을 수도 있으니 여기 사원에서 나가지 말고 지내시게. 이 싸움이 끝나면 의사회에서 유해 송환의 조치를 취해줄 것이네.”
성하는 알리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노인과 알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알리가 왜 그러냐는 듯이 성하를 바라보았다.
성하가 말했다.
“무기를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
알리가 놀라서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할 수 없네. 여기서의 일은 알리보다 내게 물으시게.”
“어떤 무기인지도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네. 자네는 복수를 원하는구만.”
성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슬람의 법 아닙니까?”
“잘못 알았네.”
노인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우리는 복수를 위해서 싸우지 않네. 알라는(거룩하신 분) 평화를 위해 코란을 우리에게 주었네.”
“그렇다면 무기는 내가 구하지요. 다른 걸 원하겠습니다.”
성하는 마치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든, 이 가자지구 내에서 활약하는 신베트의 끄나풀을 알면 단 한 사람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신베트는 이스라엘의 샤바크를 뜻한다.
“그런 것을 어찌 알겠나?”
“정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화이트여도 좋고 블랙이어도 좋습니다. 하나만 내게 찍어주십시오.”
“내가 젊은이에게 그런 것을 준다면 젊은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나?”
“지금 가자지구에서 암약하는 신베트를 죄다 제거해 드리지요. 물론 죽은 놈처럼 중요한 인물들로 말입니다.”
노인이 잠시 성하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성하는 노인이 입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가 하마스의 간부라는 걸 한 눈에 간파했다. 그리고 이 사원이 하마스의 조직원들로 가득하다는 것도 들어서면서 부터 잘 알았다.
“자네는 신성한 사원에서 살인을 말하고 있네.”
“오래 머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꼭 해야만 합니다.”
“그녀가 복수를 원한다고 생각하는가?”
“복수는 나의 일입니다.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무엇을 원하던가?”
“그녀가 원하던 세상은…”
성하는 입을 다물었다. 노인에게 말려들어서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정규희는 훌륭한 여성이었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떠났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아니라, 그녀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자네가 원하는 것을 넘겨주겠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없네. 확실하다면 이 안에서 살아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명확해지도록 하겠습니다.”
성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알리가 자네를 도울 걸세.”
“나는 누구와 함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곳은 지금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서 다른 곳에서처럼 움직이지 못할 걸세.”
노인도 이미 성하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서로를 인정하면 대화가 쉬워진다. 물론 서로가 상대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이 좋다.
“필요하면 연락하겠습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하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사원을 나섰다. 그의 손에는 작은 스포츠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주소와 이름이 적힌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는 흘끗 기도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뭔가 잘못 알고 있군. 신은 절대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세상을 고쳐주지 않아. 원하는 게 있으면 신의 손을 빌리지 말고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지.

성하는 뚜벅뚜벅 폐허 속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