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지음 / 앨리스 / 280쪽 / 13,000원)

본디 자식이 부모에게 내주는 시간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퍼준 시간과 같지 못하다. 아무리 생각하고 며칠씩 고민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엄마랑 같이 여행을 가는 것 정도였다. 엄마에게 잠깐의 일탈을 안기는 것. 집에 가기 싫으면 집을 떠나는 것도 방법이겠지. 고향에 내려가야지.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지. “엄마, 집 앞이야, 나와요.”

고향을 거닐다_ 풍기온천과 백동
몇 해 전 풍기에는 온천이 생겼다. 소백산풍기온천이란 이름으로, 불소가 다량 함유된 알칼리성 유황 온천이다. 지하 800미터 지층에서 온천수를 끌어올리는 천연 온천으로 영주 일대에서 유일하다. 소박한 풍모의 온천탕이지만, 풍기에 온천이 생긴 후에는 전국에서 제일 좋은 온천은 소백산풍기온천이 됐다. 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온천수에 유용한 성분이 풍부하다는 논리였다. 특히 풍기 사람들은 대중목욕탕이나 사우나 대신 소백산 풍기온천을 찾는다. 영주시에서 직접 운영해 요금이 그리 비싸지 않은 것도 이유이겠거니와, 엄마처럼 자식들에게 애향심을 키워주고자 하는 의도도 다분한 듯했다.

온천이 있는 곳은 창락리다. 그 아래로 길을 따라가면 백리다. 외할머니의 무덤에서 좀 더 산 쪽으로 숨어들어간 동네. 내 외갓집이 거기 있다. “옛날 생각난다. 철길 따라 학교 가고 사촌동생 업고 놀러가고 그랬는데….” “가자.” “지금?” “지금!” 엄마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돈다. 추억은 이처럼 투명한 듯 아련한 석류빛이려나.

“여기야.” 잘 찾을까 모르겠다던 엄마는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옛 동네 가는 길을 찾아냈다. 엄마의 유년을 찾아가는 길. 어쩐지 가슴이 뛴다. “신기하다. 여기가 옛날에는 무밭이었어. 이 아래로는 개울이 흘렀고.” 소녀였던 엄마의 시간이 예순 살의 엄마의 시간과 포개진다. 어긋나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하는 지형과 지물 들. 엄마는 그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낯선가 보다. “저기 저거 보이나. 기차가 지나면 저 신호등에 불이 들어왔어. 그럼 얼른 철길에서 내려오고 그랬지. 옛날에는 학교까지 참 멀어 보였는데….” 어린 사촌동생을 업고 학교로 향했을 꼬맹이 시절 엄마의 모습이 철길 위에 아른거린다. 늘상 가슴에 맺힌 사연처럼 말하던, 그리 가고 싶었다던 중학교도 그 길에서 꿈꿨었겠지.

엄마가 겨울 칼바람을 피해 걸었다던 철로 옆길을 걷는다. 무밭이었고 개울이었던 길을 돌아와 커다란 밤나무 아래를 지난다. 입을 벌린 밤송이 하나를 주워 든다. 겨울의 볕을 곱게 입었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가 철길 따라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저 커다란 밤나무도 없었겠구나. 커서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하는 그저 자그마한 씨앗이었으리라. 그 너머 소쿠리를 닮은 동네가 하늘 아래 도란도란하다. 소쿠리 가득 추억을 담고서 엄마는 말없이 걷는다.

- 『엄마, 우리 여행 가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