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미국은 인종시장이라고 할 만큼 세계 도처에서 모인 민족과 종족으로 구성된 다양한 얼굴의 모자이크 사회다. 인종과 민족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독특한 인종적 성격을 이민 보따리에 가져온다. 살면서 느끼게 되는 저마다의 성격과 품격이 색다른 감흥을 자아낸다.

미국 속에서 코리안은 똑똑하고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민족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크다. 하지만 약삭빠르고 싸우기 잘하고 준법정신이 약하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다 공중도덕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많이 주고 있다. 길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식당이나 쇼핑센터처럼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고,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헬스클럽 욕조 벽에 ‘탕에서 때를 밀지 마십시오!’라는 한글 호소문까지 나붙게 한다. 이것을 보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슬픈 것은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인종이나 국가를 불문하고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격이 있다. 그 속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민 가방에 묻어 온 한국인의 품격도 마찬가지다. 미국 땅에서 살아 아메리칸이 되어도 코리안의 품격은 쉬 달라지지 않는다. 더 세월이 흘러 이민 연령이 많아지면 미국 냄새를 풍기게 되기도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문화가 결합되는 과정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한국과 미국의 좋은 것을 지키고 배우기보다는 좋은 것을 더 쉽게 잃어버리고 나쁜 것을 더 빨리 배우는, 문화적 그레셤의 법칙이 성행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핸드폰도 잘 만들고 자동차도 잘 만들어 세계에서 코리안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 고유의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은 잃어버리고 서구 문물의 나쁜 것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삼키고 있다. 자본주의의 진수를 배우는 데는 등한시하고 자본주의 껍데기만을 닮아간다.

자본주의 실험장인 미국이 건재한 것은 자본주의 바탕에 깔린 청교도 문화와 정신이 있어서다. 근검절약하면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신, 부를 나누고 돕는 박애정신,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의식이 자본주의를 꽃피웠다. 미국인들 스스로도 이를 자랑스레 여긴다.

하지만 그런 미국인들도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타락과 탐욕과 탐닉의 속성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시작으로 미국이 앓게 된 경제 홍역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뿌리인 청교도적 정신과 품격이 조금씩 쇠퇴해온 사실과 무관치 않다. 현실적으로 위기의 시작은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이었지만 그 근저에는 도덕의 타락, 정신의 쇠락이 깔려 있었다. 월가의 끝없는 탐욕이 집중 포화를 맞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통 사람들의 도덕 불감증이나 분수 모르는 욕심이 경제위기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돈 많은 월가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위해 거짓 술수를 썼고, 돈 없는 서민들은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가짜 서류를 만들고 허위 숫자를 나열했다. 규모가 다르고 죄질도 다르지만 그 근원은 같은 것으로, 미국의 도덕과 양식이 병들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이명박 대통령이 “국격을 높이자”고 했을 때 한국 사회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국격이 밥 먹여주냐?” 하는 냉소적 반응에서부터 “국격 선언이 새로운 한국의 원년을 열었다”는 다소 아부적인 반응까지 다양하게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부화뇌동하는 아부족에게는 아부하고 치부하는 ‘속물적인 격’이 배어 있고, 사사건건 부정적이고 사시적으로 찬물을 끼얹는 냉소족에게는 김을 빼고 뒷다리를 잡아끄는 ‘파괴적인 격’이 자리 잡고 있다. 아부족을 경계해야겠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집단은 국가 시책에 냉소하는 사람들이다. 냉소주의는 더 밝은 세상과 더 좋은 삶을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을 빼앗아가는 암세포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냉소주의 성향이 개인에 그치지 않고 사회 다수에게 옮겨가면 그 사회가 아무리 능력을 가졌어도 빛을 발휘할 수가 없다.

국격에 냉소하면서 국격이 밥 먹여주냐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국격이 밥 먹여준다’는 사실이다. 밥만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삶의 행복까지 가져다준다. 반대로 국격이 떨어지면 나를 먹여주던 밥그릇이 깨어지고, 악을 쓰면서 서로 싸우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삶이 피곤해진다. 경제도 정치도 결국은 국격이 좌우한다. 열심히 일하는 품성이 없으면 경제가 잘될 수 없고, 멱살을 잡고 싸우면서 의사당을 폭력 연기장으로 만드는 정치에서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결국은 국격이다. 미국의 풍요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국격 때문이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국이 세계 정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국격에 달렸다. 잘나가던 일본이 교만과 과대망상에 빠져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군국주의 국격이었고, 잿더미에서 세계의 선진국으로 부상한 것도 성실한 국격 때문이었다.

필자는 20년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 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다가 그만 질겁을 하고 말았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담았던 그릇을 시꺼먼 구정물에 씻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 후로는 ‘메이드 인 차이나’ 식품을 꺼리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아는 분한테서 중국산 차를 선물로 받았지만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마시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중국인들의 위생과 청결의 격, 양식과 도덕의 격에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중국산 식품과 물건은 미국 시장에서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일부 가게에서는 심지어 “우리는 중국산 물건을 취급하지 않습니다”라는 표지판까지 내붙였다. 이것은 추락한 국격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수난을 겪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이 서둘러 불을 끄긴 했지만, 이 불은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미국의 쇠락과 함께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예견은 비현실적인 감이 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수천 년 동안 축적된 부정적인 품성을 선진화하지 않으면, 그런 국격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심국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나라의 격을 높여야 한다.

국격 높이기는 선진화 운동이다. 이 운동에 성공하려면 나라의 명운을 걸 정도의 치열한 열정과 실질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먼저 지도자가 적극 나서서 장기적인 계획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세워놓고 실제 추진과정을 세세하게 점검해야 한다. 국제 행사를 유치하고 만세를 부르는 정도의 자기도취나 감상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또한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후속대책을 예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2 건국’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진 한국’ 선언이 왜 결실을 맺지 못했는지를 생각하고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국민의 지지와 협조도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국격을 높이자”는 대통령의 말에 “국격 쇼를 하느냐?”며 비아냥거리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런 식의 반응은 선진화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지도자가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나라를 잘 만들겠다고 할 때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국민의 도리이고 애국의 품격이다. 역사가 말해주듯 국격은 말 그대로 나라의 성격과 품질이다. 개인의 외모와 태도, 성질과 의식이 그의 격을 나타내듯 한 나라의 문화와 예절, 도덕과 정신이 국가의 격을 보여준다.

- 조광동, 전 시카고라디오코리아 사장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이어령 외 지음 / 올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