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특히 이곳 ㅁ시로 내려온 다음부터 그는 삶에 대한 모든 끈을 다 놓은 것 같았다. 집안일에도 관심이 전무했으며, 마당에 꽃나무 하나 심으려 하지 않았다. 정우의 생활이나 성적에도 시종일관 무관심했다. 과외비가 얼마나 드는가도 묻지 않았고, 그 돈을 어떻게 충당하는지 알려고 드는 법도 없었다. 그가 사는 방법은 “당신 뜻대로 해” 그 한 가지뿐이었다.

정우를 신시가지의 중학교에 다니게 한 것도 물론 내 결정이었다. 구시가지에도 중학교가 두 군데나 있었지만 시설이나 수준에서 신시가지의 중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단지 실력 차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나라는 학연과 지연으로 맺어져 굴러가는 나라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의 인생은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서 그 향방이 뒤바뀌었고, 여자의 인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 하는 데 따라 그 성패가 결판나는 세상이었다. 옛날에 비해 세계는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차라리 독재의 그늘에 덮여 있던 시대가 나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이제 세상의 주인은 ‘자본’이고,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다. 사랑과 결혼조차 일종의 ‘비즈니스’에 불과했다.

자본의 압제는 그 경계마저 불분명하니, 화염병을 들고 나간다고 해도 던질 데가 없었다. 간교하고도 잔인한 독재자인 자본의 품 안에서 사람들은 단지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두 종류만으로 구별됐다. 교육도 일종의 ‘비즈니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사실이었다. 백그라운드가 없는 바, 정우를 성공시키려면 학연으로 맺어질 인맥도 미리 고려해야 했다. 실패한 자들이나 남아 있는 구시가지 학교를 다닌다면 무엇보다 성공한 집안의 아이들을 친구 삼을 기회가 전혀 없을 게 뻔했다. 가짜로 주민등록을 옮기면서까지 정우를 신시가지 중심가의 학교로 보낸 것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그 때문이다. “당신, 잔 다르크 같아.” 남편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조소를 한다고 느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조소는 실패한 자들이 둘러쓴 비열한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비록 실패해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아이 하나 있는 것을 남편이나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구름이 몰려들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집으로 다시 돌아와 설거지를 한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터미네이터’와의 약속이 정오에 잡혔으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나의 ‘비즈니스’는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일이었고, 그것으로 번 돈은 정우를 성공한 자로 키우려는 보다 큰 ‘비즈니스’에 거의 전부 투자됐다. ....<중략>.....

새로 들어온 메일들이 떴다. 그중에는 얼마 전에 만났던 ‘옐로’도 섞여 있었다. ‘옐로’는 그날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쓰고 나서, 언제든 약속을 다시 잡고 싶다고 했다.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시간은 필요한 대로 맞출 수 있다고 했다. ㅍ시 외곽에 있는 모텔 욕조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 생각이 났다. 절정에서 ‘여보’라고 불렀던 목소리와, 어딘지 모르게 빈 듯한 그의 눈빛도 떠올랐다. 어둠을 밀어내며 솟아 있던 등뼈도. 어쩌면 최근에 상처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우를 학원에 데려다준 뒤에 ‘옐로’를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에 두 타임 일하는 것은 나의 원칙에 맞지 않았다. 나는 다음 날 정오 지난번 만났던 곳에서 만나자고 ‘옐로’에게 답신을 띄웠다. 하루 한 번 이상은 약속을 잡지 않는다는 것, 고객의 숙소로는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 한 사람을 세 번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것 등이 내 ‘비즈니스’의 원칙이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남색 블라우스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새로 맞춰온 안경을 썼다. 변장까진 할 수 없으나 사람에 따라 인상착의를 비롯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르게 해서 만나려고 나는 세심한 신경을 썼다. 안경을 쓰고 만난 사람은 꼭 안경을 쓰고 만나고 머리를 묶고 만난 사람은 꼭 머리를 묶고 만나는 식이었다. 화대를 정해놓았으나 사람만 좋다면 뭐 상관없었다. 고객들은 닳아빠진 화류계 냄새가 내게선 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략>.....

옐로, 그가 바로 문제의 ‘타잔’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벼랑길을 걷는 듯 조마조마했다. 이상한 것은 바로 그 ‘벼랑길’이 나를 더욱 그에게 다가가도록 끌어당겼다는 사실이다. 부정하진 않겠다. 시작은 연민이었으나 마음이 깊어지게 된 것은 그가 지닌 ‘벼랑길’을 따라 걷는 듯한, 그 어떤 생생함이었다. ....<중략>.....

죄의식은 느끼지 않았다.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가 ‘타잔’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왔을 때에도 나는 이상할 정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때쯤 나는 이미 그의 선적(善的) 본질에 대해 너무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도적질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위로가 됐다. 성폭력이나 기타 사람을 상해한 범죄 일체는 그의 짓이 아니었다. 그는 철저하게, 이른바 경기와 아무 상관없이 소비와 레저만을 향유하고 사는 일부 부잣집이 숨겨놓은 잉여 재산만을 훔쳤다. 나는 그래서 그가 도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것도 실감나게 느끼지 못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그렇게 치부했다. 그러면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유부녀이면서 몸을 파는 여자로 그를 만났다는 사실이 차츰 가슴을 찢어놓기 시작할 때쯤, 그가 내게 고백해온 것이 바로 ‘타잔’이라는 사실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놀라움보다 속으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로소 나는 그와 윤리적으로 공평해진 것이었다. 내가 ‘원죄’를 가졌듯, 그에게도 감춰온 ‘원죄’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 ....<중략>.....

언젠가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사는 게, 알고 보면 비즈니스 아닌 게 없지요.” 그가 도적질을 ‘비즈니스’라고 불렀을 때 나는 쿡쿡 웃었다. 나의 매춘도 내 스스로 ‘비즈니스’라고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때 자신을 가리켜 ‘비즈니스맨’이라고 불렀고, 나는 나를 가리켜 ‘비즈니스우먼’이라고 불렀다. 시장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용어였다. 우리들은 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비즈니스맨!” “비즈니스우먼!”이라고 말하면서 배꼽을 붙잡고 웃기도 했다. 달밤의 체조였다. 나를 손가락질하며 그가 “비즈니스우먼!” 하면, 내가 허리를 비틀고 웃으면서 그를 가리켜 “비즈니스맨!” 하고 화답했다.

-『비즈니스』(박범신 지음 / 자음과 모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