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15년(1878년) 4월 7일, 예조판서 윤자승과 역관 이응준이 임금을 알현했다. “과인이 역관 이응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느니라.”

이응준은 엎드려 명을 받았다. “황공하옵나이다.”

임금은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지난번 청국 사신이 왔을 때, 그대가 둘러댄 말은 참 재치 있고 뜻이 깊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응준은 황감하고 감격하여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흡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재치 있는 말 한마디로 과인의 체증이 내려갔느니라. 이제 청국 황제가 내렸다는 애물단지 청룡기를 불태워 없애버렸으니, 우리나라 국호에 맞는 국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대는 과인의 특명을 어찌 수행하고 있는지 말해보라.”

이응준은 바짝 긴장하여 관복 깃을 여미고는 아뢰었다. “신이 삼국시대와 고려 왕조부터 지금까지 군부에서 썼던 군기와 나라에서 표징으로 삼았던 문양을 조사해보았나이다. 그중에서 소신의 눈에 띈 문양이 태극문(太極紋)이었나이다.”

임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는 물었다. “태극문이라면 과인도 더러 본 기억이 나는구나. 특히 태호복희씨의 복희팔괘(伏羲八卦)에 태극 문양이 있지 않은가? 예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복희씨의 태극문이라! 대단한 발상이 아닌가.”

“전하, 그러하옵니다. 태호복희씨는 제4대 환웅천황(桓雄天皇) 태우의(太虞義)의 열두째 아드님으로 천지 만물의 생성 변화와 그 이치를 담은 팔괘를 처음으로 창안하신 우리 민족의 선조이십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러면 역관은 태극문과 팔괘로 우리 국기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으로 연구해보았는가?”

이응준은 황감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만약에 국기를 만든다면, 그러한 태극 문양을 가운데 두고, 그 둘레로 8괘 중에 4괘를 넣는 것이 어떠할까 구상해보았나이다.”

임금은 즉시 내관을 돌아보며 명했다.
“내관은 어서 지필묵을 준비하라. 과연 어떠한 모양이 될지 매우 궁금하구나. 아니 그러한가, 예판?”

윤자승도 들뜬 목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어찌 아니겠습니까. 신은 지금 가슴이 뛰나이다.”

윤자승은 청국 황제가 내렸다는 청룡기를 받아 들고 분노에 떨던 임금을 떠올리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마침내 꿇어앉은 이응준의 가슴 앞에 놓였던 하얀 옥판선지에 태극 문양과 함께 상하좌우에 4괘가 그려진, 천근 무게가 실린 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응준이 부복하며 아뢰었다. “전하, 소신이 구상했던 국기 모형을 그려보았나이다.”

안석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던 임금이 비로소 눈을 뜨며 받았다. “오, 그래? 어디 보자.”

임금은 그림을 받아 보며 감탄했다. “오! 과연, 과연 태극 문양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우리 겨레의 문양이니라. 태극 문양에 채색을 해야겠는데, 과연 어떠한 색을 써야 하겠는가?”

이응준이 부복하며 받았다. “예, 전하. 태극 문양에는 청과 홍을 쓰는데, 좌측이 청색이며 우측은 홍색이 되옵니다. 상하좌우의 4괘는 그대로 검은색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채색을 해보라. 내관은 어서 청홍의 물감을 가져오라, 어서.”

이응준은 태극 문양을 펴놓고 내관이 가져온 물감으로 채색을 시작했다. 먼저 오른쪽에 청색을 넣었다. 그리고 홍색 곡옥이 청색 곡옥의 꼬리 끝에 머리를 감춘 선명한 모습이 드러났다.

태극 문양을 받아든 임금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 음양의 조화가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과연 훌륭하도다.”

이응준이 아뢰었다. “전하, 그렇습니다. 청과 홍은 하늘과 땅을 뜻하고, 이는 곧 음과 양을 뜻하나이다.”

임금은 매우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4괘에도 당연히 깊은 뜻이 있겠구나.”

이응준은 거침없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건(乾)괘는 하늘을 뜻하고, 계절은 봄이며, 방위는 동(東)입니다. 곤(坤)괘는 땅을 뜻하고, 여름과 서(西)입니다. 감(坎)괘는 물을 뜻하는데 이는 곧 달이며, 겨울이고 방위는 북입니다. 이(離)괘는 불을 뜻하고 곧 해이며, 가을이고 남이 되옵니다. 태극과 4괘는 곧 천지일월과 우주만물을 망라한 무궁한 진리로서 천지 만물을 아우르는 깊은 뜻을 담고 있나이다.”

“오! 과연 그러하도다. 그런데 과인의 느낌으로는 4괘의 상하좌우 배치가 너무 답답한 것 같은데, 4괘의 위치를 바탕의 4각 귀 쪽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응준은 옥판선지를 다시 펴고 붓을 들었다.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던 내관이 그려진 국기를 받들어 임금께 올렸다. 받아 보는 임금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했다. “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참으로 훌륭하도다!”

임금은 근엄하게 말했다. “역관 이응준은 들으라. 경은 오늘 사직을 위하여 큰일을 했다. 경의 공은 누대에 길이 남을 것이니라.”

이응준은 깊게 엎드리며 성은에 감복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오나 주상 전하의 크고 깊으신 뜻이 아니었다면 소신은 감히 땅띔도 못했을 일이었나이다.”

윤자승이 덧붙였다.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 청국 청룡기를 거부하신 굳은 의지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나이까. 이제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가 제정되었으니, 어떤 외교 행사에서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전하, 감축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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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태극기는 철종의 부마 금릉위 박영효가 창안하고 제작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고종의 특명을 받은 역관 이응준이 창안하고 제작했다는 설이 있는 등 태극기의 탄생 과정이 정립되지 않았다.

이응준은 1832년 생으로 중국어와 일본어 역관으로 활약했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 때 역관으로 일본 군함을 방문하고 일장기를 본 그는 조선에도 국기가 있어야 함을 깨닫고 임금께 국기의 필요성을 역설해, 임금의 밀명을 받아 조선 국기를 구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극문과 8괘 중의 4괘를 조합한 조선의 국기를 그려냈다.

- 『태극기의 탄생』 중에서
(박충훈 지음 / 21세기북스 / 324쪽 / 1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