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2011년 초, 10차례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국수위를 마지막으로 내놓고 나는 프로기사가 된 이래 22년 만에 무관(無冠)이 됐다. 입단 3년 만인 1989년 KBS 바둑왕전에서 우승해 세계 최연소로 타이틀 보유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이 없다. 이제는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처럼 빈손이다.
나는 한 인터뷰에서 백의종군의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과거보다 강해졌습니다. 문제는 주변의 상대들이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이 말은 솔직한 내 생각의 표현이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쑥스럽다. 그리고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머지않았음을 몸으로 느낀다. 최근 들어 계산이 예전 같지 않고 승부에서 지는 일도 많아지면서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를 자주 생각하게 된다.
문득, 가까운 사람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우리 인생에는 많은 문이 있는데 절대 모든 문이 한꺼번에 닫히거나 한꺼번에 열리는 일은 없다고. 어떤 문이 닫히면 반드시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삶의 안팎에 얽힌 여러 변화 때문인지, 나는 새삼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사자성어를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최근 몇 년은 특히, 끊임없이 ‘쉬고 싶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1인자의 자리는 내놓은 지 오래지만, 막상 수중에 타이틀이 하나도 없게 됐다는 사실은 닥치기 전에는 짐작하지 못했던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다잡아준 무의식의 의식이 바로 부득탐승이었다.
성경에 ‘십계명’이 있듯이 바둑에도 ‘위기십결’이 존재한다. 위기십결은 ‘바둑을 둘 때 명심해야 할 열 가지 계명’이지만, 그 열 가지 사자성어가 모두 바둑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고금을 막론한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장구한 생명력의 존재가치가 뚜렷해진다.

▲ 위기십결(圍棋十訣)
1.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
2. 입계의완(入界誼緩): 경계를 넘어설 때는 느긋하게 하라
3. 공피고아(攻彼顧我): 공격에 나서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
4. 기자쟁선(棄子爭先): 돌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5. 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6. 봉위수기(逢危須棄): 위기가 닥치면 돌을 버려라
7. 신물경속(愼勿輕速): 경솔하게 서두르지 마라
8. 동수상응(動須相應): 행마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9. 피강자보(彼强自保): 상대가 강하면 나의 안전을 도모하라
10. 세고취화(勢孤取和): 형세가 외로울 때는 화평을 취하라

위기십결의 첫째 계명이 부득탐승이다. 문자 그대로 ‘승리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는 뜻이지만 애초에 이 사자성어를 바둑십계명의 첫 번째로 배치한 선각의 고심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에 머물러있지 않다. 나머지 아홉 계명을 모두 아우르는, 우리 삶의 가장 보편적인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승(勝)은 바둑판 위의 승패를 초월해 보다 넓은 의미를 지향한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갈구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석하면 탐승은 자연스럽게 ‘목표에 대한 집착’이 되고, 부득탐승도 좁은 바둑판 위의 허상을 벗어던지고 ‘목표에 집착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넓은 인생의 실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부득탐승이 모호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데 비해 나머지 아홉 가지의 계명은 실천강령으로서 대단히 구체적이고 명료한 의미를 보여준다는 게 위기십결의 묘미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사자성어들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지만, 거기에 바둑판 위의 계율을 뛰어넘는 인생의 지침이 깃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프로이며, 타이틀 쟁취와 상금 획득이 최고의 미덕인 프로바둑에서 승부 이외의 모호한 관념에 눈을 돌릴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둑은, 아마추어에게 더 지고한 정신의 경지가 허락되는 거의 유일한 게임인 것 같다. 바둑으로 재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프로들은 삶의 수단인 상금과 직결되는 승부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순수 아마추어들은 얼마든지 승부를 넘어선 더 큰 세계를 상상하고 창조해낼 수 있다.
승부는 바둑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승부가 바둑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한다.
나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기력이 뛰어난 고수가 아니었으면서도 바둑을 나 이상으로 즐겼다. 그것은 승부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둑은 원래 그런 세계이며, 기력에 무관하게, 이기고 지는 결과에 무관하게, 유유자적 바둑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이 바로 부득탐승의 실천이다.
위기십결에는 ‘버리라’는 사자성어가 셋이나 된다. 기자쟁선, 사소취대, 봉위수기. ‘버림’을 이토록이나 강조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끊임없이 비우고 새롭게 채우기를 반복하는 것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채우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이든 비워져야 채울 수 있다는 이치는 어린아이도 안다. 많은 사람들의 실패는, 그 이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외면하려는 욕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위기십결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백의종군 상황은 전화위복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꽤나 홀가분하기도 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승부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승패도 중요하지만 승부 자체를, 바둑을 제대로 즐기고도 싶은 것이다.
영원한 성공은 없다. 상황이 극에 달하면 결국 변화하니, 그 변화에 맞서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확실히 알아야 하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형세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멈추거나 물러날 때가 아니다. 나는 더 나아가고, 더 깊어져야 한다.

- 『이창호의 不得貪勝』 중에서
(이창호 지음 / 라이프맵 / 288쪽 /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