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비(茶毘)


나는 잠시 아르코가 누구일까 생각했지만, 맞춰져서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현우가 피식 웃었다.
“사토 야타가 어느 날 나혜석을 생각하고 쓴 짧은 수필의 제목이야.”
“그러니까 이 전시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되는 건가?”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이야기가 바로 그거야.”
“그림의 진위가 아니라?”
현우는 또 피식 웃었다. 웃어도 할 수 없다. 준비 없이 온 건 사실이다. 그다지 자세하게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게 사실이니까.
“전시회 보고 나서 이야기할까?”
현우는 일어났지만,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남자가 왔다면, 어째서 경희는 나까지 끌어들였을까. 나까지 가지 않아도 혼자 다 알아서 하고도 남을 사람인데.
“선배.”
“응?”
“선배 있는데 경희는 뭐하러 나까지 끌어들였을까?”
“난 기념사업회 사람이잖아. 내 주장을 세상 사람들이 믿겠어?”
“그러니까 난 객관성 확보를 위한 들러리야?”
“여전하군.”
현우는 내 질문에 대답도 없이 그냥 돌아서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커피 값을 지불하면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쩌면 저 인간은 변함이 없을까. 입술을 깨물고 잠시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다시 재촉이 왔다.
“뭐해? 안 갈 거야? 이야기는 나중에 해.”
그래. 나중에 이야기하자. 이대로 바보처럼 달아나기는 싫으니까. 나는 현우의 뒤를 따라 백화점으로 가서 그와 함께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전시장은 한산했다. 그저 백화점으로 쇼핑을 나섰다가 잠시 구경이나 하려고 들어선 듯한 주부 몇 명이 대충 훑어보고 지나갈 뿐이었다.
당연하다. 한국에서는 몰라도 일본에서야 떠들썩할 이유가 없는 전시회다. 현우는 그림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그림들을 보면서 현우와 반대편으로 돌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그림들에 빠져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림들은 이제까지 내가 알아온 옛날 화가들의, 특히 여류 화가들의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이 엄청나게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색조나 구도가 완벽해서도 아니었다.
그림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보면 안다. 아니, 그림으로 고통을 받아본 사람은 그림을 보면 안다. 그림에서 고통이 보인다. 아무리 힘 있게 붓을 잡고, 아무리 강렬한 색으로 밀어붙여도 고통이 배인 그림은 화려하게 살아나지 않는다. 그게 캔버스다.
“선배.”
나는 돌아서며 현우를 찾았다.
“이 전시회 누가 열었다고 했죠?”
“사토 리에.”
현우도 돌아서며 아까보다 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만나보자.”
음? 이 돌같은 남자도 느낀 게 있나?
“이 그림들 진짜 같다.”

사토 리에는 생각보다 젊었다. 환갑쯤 되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십 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로 보였다. 단정하게 와후쿠를 입고 고전적인 흰 버선에 나무 게다를 신은 모습이 고집스러워 보였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무릎을 모으고 가지런히 맞잡은 두 손은 이후로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서로 처음 만나지만 선생님 존함은 알고 있었습니다.”
현우가 말하자 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요. 그쪽이 아니라 기념사업회를.”
리에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전여희 씨.”
“네?”
나는 나도 모르게 멈칫 놀라서 대답했다. 이 여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여희 씨는 알아요. 일본 오기 전까지만.”
“어떻게…”
나는 뭐가 뭔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리에는 내 생각을 무시하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건 나한테 아주 무의미합니다. 팔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요.”
리에의 얼굴에서 부드럽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단 하나도. 절대로. 그러니까 신경들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요?”
“꼭 그림의 가격을 매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혜석 선생님의 그림을 보고 느끼고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겁니다.”
현우가 똑똑하게 말했다. 그런데 리에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네?”
“왜 세상이 관심을 가질까요?”
현우가 당황해서 말문을 닫았다. 리에는 차갑게 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념사업회를 보면서 항상 궁금했어요. 도대체 왜 나혜석을 기념할까. 왜 나혜석 거리까지 만들었을까. 왜 나혜석 전집에 평전까지 만들어댈까.”
“훌륭한 화가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리 어떤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제 와서?”
“고흐도 그랬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고흐가 얼마나 훌륭한 화가였는지를.”
“고흐는 늙고 병들어서 죽었지만, 나혜석은 그 시대 사람들이 죽였지요.”
리에는 현우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희 씨는 참 잘했어요. 일본으로 달아났으니 이렇게 살아남았잖아요?”
나는 멍하니 리에를 바라보았다. 이 아줌마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아까부터 내 일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어째서 이 아줌마가 내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난 평생을 갤러리에 몸담았어요. 내 손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살았지요.”
“그러신 건 미처 몰랐습니다.”
현우가 나섰다.
“이번 전시회 덕에 처음으로 여사님 이름을 알았습니다.”
“당연하죠. 난 내 이름을 걸고 이렇게 전시회를 연 것도 처음이고 갤러리를 운영하지도 않고 경매에 직접 참가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리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들 가보세요. 제 속을 알았으니까 이제 그림의 진위나 가치에 대해서 더 궁금할 것도 없지요?”
그녀의 눈과 입이 가늘게 웃었다.
“관심은 오로지 그것뿐이잖아요?”
비웃듯이.

전시회에 조금 더 머물렀다. 현우는 갖가지 자료들을 들고 열심히 그림을 보고, 자기 기록을 보고, 정신이 없었다. 평소 성격에서 나타나는 그대로 마치 과학수사대에라도 취직한 사람처럼 열심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멀거니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눈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생각은 ‘사토 리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를 알고 있고, 마치 한국의 화단에 대해서도 환히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말투와 비웃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 옆면의 벽에 커다랗게 전시회 설명서가 걸려 있었다. 구식 투피스에 동그란 챙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한 여인의 흑백사진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저 여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저 여인을 추모하는 사토 리에는 누구인가. 저 글자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르코에게’는 무슨 뜻인가.

현우와 마주 앉아서 맛없는 점심을 먹었다. 혓바닥이 굳은 듯이 입안에서 밥알이 제멋대로 놀았다. 현우는 현우대로 깊은 생각에 빠져서 말 한 마디 없이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밥을 다 먹고 창밖의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자꾸만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그란 서양식 챙모자를 쓴 흑백사진 속의 여인. 그녀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어째서 일본의 한 화가의 손녀가 그녀의 그림들을 가지고 있다가 전시회를 열게 되었을까.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 더 강해졌다. 유리창에 부딪히고 흩어지는 물방울들을 유리창 안에서 만지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만질 수 없어.”
불현듯 들려오는 현우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현우가 건조하게 웃었다.
“넌 유리가 눈에 안 보이니?”
“무슨 뜻이야?”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냐?”
“응. 몰라. 당분간은. 아마도.”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현우가 그걸 물었다. 언제까지 도쿄에 머물러 있을지.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이제 무엇을 할까. 박사 과정을 밟겠지. 박사가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분필 장사라도 해야 여기 더 머물 수 있겠지. 그렇게까지 있어야 할까?
“그림은 그리냐?”
“선배.”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방 아픈 걸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을 ‘사이코패시’라고 하던가.
“그림은 그려라. 나혜석 씨도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다. 손이 떨리더라도.”
“그림이 좋았나 보지.”
“넌 아니냐?”
“선배.”
나는 손끝이 저려서 주먹을 쥐었다. 팔 전체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 대화 끝. 그만두자.”
현우는 메모지와 자료 뭉치들을 흔들어 보이고 내 앞으로 던졌다.
“넘겨줄게. 분석기사 부지런히 써라. 일 끝내고 돈 받아야지.”
사이코패시.
“진짜일 수가 없다. 말이 안 된다. 판화 두 점만 진짜로 보인다.”
아까와는 말이 달라졌다.
“진짜 같다면서?”
“그렇게 보였지만 역시 그럴 수 없어. 그냥 나혜석의 그림으로 보였을 뿐이지.”
“그런데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가능하지 않다.”
현우는 예의 그 예리함으로 단정 지어 말했다.

비 내리는 긴자의 도심 풍경을 바라보고 서서 현우라는 남자는 작별인사처럼 말했다.
“나 만나서 반갑지 않았겠다. 그래도 난 네가 보고 싶더라. 별 뜻은 없고 그냥 어찌 사나 보고 싶더라는 말이다.”
싱긋 웃고 손을 들어 보였다.
“간다.”
현우는 빗속을 우산도 없이 태연히 걸어갔다. 그의 어깨가 빗방울에 점점 젖어드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보처럼 그의 비에 젖은 머리칼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작별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남자. 함께 침대 속에서 아침을 맞이한 적도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어느 날, 내 폐부에 메스를 들이댔다.
‘이건 아니잖아.’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살얼음 같은 목소리. 차가운 눈빛. 피부에서 얼음이 돋는 듯한 소름.
‘이런 짓은 하면 안 되잖아?’
그 남자는 냉정하게 세상에 내 가슴속 비밀을 까발리고, 한국 화단의 협잡질에 대해서 사정없는 화살을 쏘아댔다. 한국 화단의 어르신들은 그 모든 화살을 어리석고 가진 것 없는 내게로 돌렸다.
세상은 그 남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내게는 돌을 던졌다. 나는 상처받고 쓰러졌다. 그 남자는 상처도 받지 않았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사랑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세상은 나를 기자까지도 침대 속으로 끌여들여서 이용하는 출세에 눈이 먼 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달아나버렸다. 어둠 속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아무도 나를 찾아내지 못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 남자의 머리칼이 왜 만져보고 싶은 걸까.

오늘은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며칠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사도 기사지만, 무엇보다도 머릿속에 들어간 이상한 느낌을 정리해야만 했다.
저녁거리로 도시락과 맥주를 사들고 들어가서 현우가 준 자료와 메모를 비교해보며 밤이 깊도록 분석했다. 그리고 순전히 현우의 결론에 따라서 분석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새벽녘, 기사를 쓰던 내 손이 잠시 멈추었다. 창가로 가서 창을 통해 비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았다.
도시는 어둡고 스산했다. 비에 젖은 불빛들이 외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이 비는 내리고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렸다.
빗방울에 손을 가져다 대다가 문득. 현우의 차가운 눈빛을 기억해냈다.
그래. 맞아. 유리가 있어서 만져지지 않아.
어쩌면 이 여자도 그랬을지 몰라. 나처럼 유리로 가로막혀 있는 줄 모르고 자꾸만 움켜잡으려고 들었는지도 몰라. 그러다가 마침내 유리가 깨져서 다친 건 아닐까.
그런데 사토 리에라는 일본 아줌마는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꼈던 걸까. 그 아줌마는 날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창가에 기대서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외롭다. 저 불빛들.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저 거리가 참 외로워 보인다.
담배가 피우고 싶다. 끊었는데.
지갑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을 두고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내쳐 달려나갔다. 비를 맞으면서 편의점까지 내달아서 처마 밑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담배를 사고 돌아 나오다가 금박으로 포장된 근사한 초콜릿이 눈에 띄어서 하나 집어 들었다. 편의점 처마 아래 서서 담배를 피워 물고 초콜릿의 포장을 뜯었다. 값이 꽤 비쌌으니까 값만큼 맛이 있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달콤한 초콜릿의 향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갑자기 담배를 먼저 피워야 할지 초콜릿을 먼저 먹어야 할지 몰라서 우물거렸다.
빌어먹을. 울컥했다. 괜히 이러는 건 정신 건강에 안 좋아. 이렇게 새벽 시간에 말이야, 길바닥에 서서 비 맞으면서 초콜릿과 담배를 동시에 먹고 피우는 건 미친 년이잖아. 거기다가 눈물까지. 이러면 최악이지.
나혜석의 흑백사진이 생각났다. 눈빛이 강해 보이지만 표정은 슬퍼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다시 가봐야겠어.
집으로 달려 들어와서 옷을 줏어입었다. 무언가 챙겨가야 할 건 없나 두리번대다가 그냥 지갑만 백에 챙겨넣고 나섰다.
우산 대신 비옷을 입고 파랗게 동이 트는 거리로 나섰다. 전시회는 어제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오늘 그림을 걷을 것이다. 백화점은 문을 열기 직전의 아침 시간에 그런 작업을 하니까.
일본 아줌마를 만나서 딱히 무얼 어째야 할지는 몰랐다. 그런 걸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용의주도하지도 않고, 기사를 충실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만나야겠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백화점은 당연히 닫혀 있었다. 뒤로 돌아가자, 이제 막 출근하는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직원들 틈에 끼어들어서 직원 통로를 통해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구도 사원증을 보자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시선으로 비에 젖은 나를 슬쩍슬쩍 보고 지나쳤다.
내 모습이 이상한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비옷을 입은 채였지만, 화장을 하지 않아도 내 모습이 괜히 밤을 새우고 이유 없이 길바닥에서 눈물을 찔찔 흘린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전시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시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끈이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사토 리에를 어디서 만나야 하지?

치바에서 세 칸짜리 사철로 갈아타고 도오가네로 향했다. 백화점 관리인에게 사정사정해서 겨우 그림이 실려간 곳을 알았는데, 그림이 간 곳은 도오가네의 작은 사찰이었다.
그림이 간 곳이니 틀림없이 사토 리에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도오가네를 찾아 나섰는데, 사실 도오가네라는 지명은 들어본 일이 없어서 전철 노선도를 보고서야 그런 곳이 있는 걸 알았다.
도오가네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탔다. 비는 그쳤지만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사찰이 생각보다 멀리 있다면 오늘 택시비로 며칠 생활비를 날릴 판이지만, 그렇다고 처음 온 지방의 낯선 도시에서 처음 듣는 이름의 사찰을 찾아 헤맬 자신은 없었다.
택시는 다행스럽게도 그닥 오래 달리지 않았다. 십 분 정도를 달리더니 시골 마을의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사찰 앞에 섰다.
만일을 생각해서 택시기사에게 명함을 하나 받아 챙기고 과감하게 사찰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랬다가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사찰 안은 무슨 행사가 열리는 듯 스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찰 한복판에 높이 기름 먹인 장작들이 쌓여 있고 그 위로 천으로 싼 그림으로 보이는 캔버스들이 차곡차곡 쟁여져 있었다. 그 앞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스님들이 줄줄이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고 있었다.
나는 사토 리에를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그때 손에 불이 붙은 막대 하나를 들고 스님들 사이에서 나서는 사토 리에를 발견했다.
다비식.
머릿속에 한 줄기 충격이 치고 지나가는 순간, 나는 앞뒤도 재지 않고 달려 나가서 그림들과 리에 사이를 막아섰다.
“안 돼.”
내 돌출행동에 스님들이 모두 놀라서 내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리에는 나를 차분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무지한 짓이에요?”
“할아버지의 유언이에요.”
리에는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타당하지 않은 일은 없어요. 어떻게 이런 무지한 짓을 할 수가 있어요?”
“이 그림들 다 가짜예요.”
“가짜로 전시회를 열었다고요?”
“할아버지에게는 진짜였으니까.”
리에는 차가운 시선으로 스님들을 돌아보았다. 건장하고 젊은 스님 두 사람이 내 양쪽 팔을 끼고 부드럽지만 강하게 뒤로 끌어냈다.
나는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저게 진짜라면. 만일 저게 전부 진짜라면 지금 저 사람들은 세상에 죄를 짓는 것이다. 가장 멍청하고 가장 패악한 짓을 저지르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떨면서 두 스님에게 팔을 붙잡힌 채 리에가 하는 미친 짓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리에는 나뭇단에 불을 붙였다. 독경 소리가 높아지고 커지면서 주변을 신비한 주술의 세계로 이끌었다. 불길이 물기를 머금은 바람을 이기고 치솟아 올랐다. 장작들과 함께 그림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가짜일 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현기증이 몰려들어서 양팔을 잡은 스님들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는 몸을 지탱할 수조차 없었다.
회색 연기는 하늘로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간혹 테레빈유 냄새가 섞이면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가 사라졌다.
가짜일 거야.

한기에 몸을 움츠리고 앉은 내 앞으로 리에가 따뜻한 차를 놓아주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뜨거운 찻잔을 들고 리에를 바라보았다.
리에는 차갑고 단호하던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서웠어요?”
“저 그림들이 만일 진짜라면…”
나는 목소리가 떨려서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혜석을 잘 알아요?”
“잘은 모르지만…”
“그럼 그렇게 마음 쓸 것도 없지 않아요?”
“마음이 쓰여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기사를 쓰려다가 이대로 쓰는 건 너무 아닌 것 같아서요.”
나는 그제야 몸도 마음도 풀려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하는 기분이어서요. 사토 리에라는 사람이 왜 이런 전시회를 열었는가에 대해서만이라도 알고 싶어서요. 세상에 이 이야기를 내놓으려면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작품의 진위만 취재하려던 것 아닌가요?”
“그랬었죠. 그런데…”
나는 딱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심정을.
“밤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나혜석에 대해서 그냥 생각 없이 기록만 읽었는데, 잠을 잘 수도 기사를 계속 쓸 수도 없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리에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왜 그랬어요?”
갑자기 물어왔다.
“그냥… 모르겠어요.”
“아니, 왜 자기 그림을 남한테 넘겼어요?”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했다.
한국 화단에서는 종종 그래요. 제자의 작품이 선생의 작품으로 둔갑도 하고 그래요. 그게 밝혀지면 선생은 괜찮고 제자는 죽어나요. 그냥 감추고 살면 좋았을 걸. 잘난 내 남자가 터뜨려버렸어요. 그래서 내 남자는 고소를 당하고 나는 달아났죠.
말하지 못했다.
“대답하기 어렵죠?”
리에가 웃었다.
“나도 그래요.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어요. 나는 그저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했을 뿐이에요.”
“할아버지 성함이 사토 야타 맞나요?”
“맞아요. 하지만 평생 결혼이라고는 하지 않으신 분이죠. 동생의 아들이었던 내 아버지가 그의 양자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녀가 되었죠.”
“나혜석에 대해서 읽다가 아주 잠깐 언급된 것을 보았어요.”
“아주 잠깐…”
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해서 결혼도 하지 않으셨던 분인 걸요.”
“나혜석을…?”
리에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서 미닫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루에 앉아서 잠시 마당의 비바람에 떨어져 버린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화장실에라도 간 것일까 생각했다.
“여희 씨.”
리에가 다시 들어오면서 나직이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리에를 바라보았다. 리에의 손에 작고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리에는 내 앞에 와서 다가앉더니 책을 내밀었다.
“할아버지의 유서예요. 유서치고는 참 두껍죠?”
나는 두꺼운 책자를 받아들고 겉표지를 보았다. 달필로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아르코에게

전시회 제목과 같은 제목이었다. 그리고 그 글자 아래로 작은 글자들이 촘촘히 쓰여 있었다.

- 리에. 너만은 읽어주기를 바라고 남긴다. 읽은 다음에는 그림들과 함께 태워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