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열병(熱病)에 들다


여름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번 오지 못할 아름답고 빛나는 칠월이었다. 이제 막 시작되는 여름의 햇살을 맞으면서 나는 여름 내내 그녀와 함께 산과 들과 강을 돌아다녔다.
어느 때는 동행이 넷도 되었다가 어느 때는 셋도 되기도 했지만, 그녀와 단둘이 교외로 나가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던 그날은 칠월이 이제 막 끝나가는 날이었다.
처음에는 신사를 그리자고 나섰는데, 신사에서는 큰 행사가 벌어지고 있어서 포기하고 닛코 방향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내 옆에는 그녀가 앉았고 뒷좌석에는 화구가 잔뜩 실려 있었다. 닛코로 나가는 길에 아무 곳에서나 차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자고 했지만, 도중에 그녀가 닛코의 호수를 보고 싶다고 해서 더 장거리가 되었다.
그건 신나는 일이었다.
닛코로 가는 내내 크고 시원스러운 그녀의 눈은 연신 창밖의 풍경들에 팔려 있었고, 나는 그녀의 옆모습에 팔려 있었다.
그녀는 흰 블라우스에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치마를 받쳐 입고 있었다. 흰 양말에 갈색 단화를 신었던 그녀는 도중에 양말을 벗고 두 다리를 올려서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맨발을 까딱거렸다.
가끔 부쩍 늘어난 검문소에서 차를 세우면 헌병들이 다가왔지만 특별하게 묻거나 신분증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왜 저렇게 난리들이죠?”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입니다.”
“전쟁은 벌써 끝나지 않았나요?”
“전쟁이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으니 또 새로운 전쟁을 만들 겁니다.”
“오빠는 세상과 전쟁을 치르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요.”
혜석이 말하고 혼자 쿡쿡 웃었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혜석씨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좀 압니다. 결코 누구와 싸우자고 드는 건 아닐 겁니다.”
“알아요.”
혜석이 한숨처럼 말했다.
“어쩌면 세상과 싸우고 싶어 하는 건 나일지도 모르죠.”
“세상과 왜 싸우고 싶으십니까? 혜석씨는 화가인데.”
“화가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싸우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이미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에서 그녀가 썼다가 신문에까지 발표된 글을 읽어서였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눈빛만큼이나 사나운 여자였다.
“너무 앉아 있으셔서 갑갑하지요?”
“생각보다 머네요.”
“내려서 잠시 뭐라도 좀 먹을까요?”
“여기 뭘 파는 곳이 있을까요?”
“이 부근은 제가 훤히 압니다. 그림 그리려고 자주 왔었거든요.”
아타미의 해안도로였다. 도로를 따라가서 바닷가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해안가에서는 마을 아이들이 벌거벗고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고, 멀리 낚싯줄을 드리운 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문득 그녀가 생선회를 먹는지 궁금해졌다. 조선 사람들은 회를 먹지 않는다. 그렇지만 뭐든 거리낌이 없는 그녀는 일본에 와서 몇 달을 살았으니 회 정도는 먹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생선회를 드십니까?”
“먹어보지 않았어요.”
“아, 그럼 구이를 주문하지요.”
어차피 마을에 식당이라고는 하나였다. 생선을 회로도 먹을 수 있고 구이로도 먹을 수 있는 작은 식당이다. 마을 사람들만 상대해서 차림판은 간단하지만 정성껏 만들어서 내놓는 곳이었다. 들어가서 앉으니, 혜석이 다시 말을 바꾸었다.
“각자 시켜서 먹어요.”
“각자라니요?”
“생선회와 구이를 각자 시켜서 먹으면 되잖아요?”
“아, 그럽시다.”
조선 사람치고는 참 신기한 사람이다.
조선 사람들은 통일되게 시켜서 먹는 걸 즐긴다. 함께 어울릴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조선 사람들은 그날의 의견일치를 보아서 한 가지를 통일해서 시켜놓고 먹으면서 논다.
생선회와 구이를 시켜놓고 청주를 같이 마시는데, 혜석이 슬쩍 생선회를 집더니 나처럼 간장에 찍어서 입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녀의 인상을 쳐다보았는데, 한동안 맛을 음미하는 듯 우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냥 간장 맛이네요.”
“비린내를 기대했다면 회에서는 그다지 비린내가 나지 않습니다.”
“고등어다다키를 먹어보았는데 비린내가 심해서 별로였어요.”
“고등어는 생강과 같이 먹어야 합니다.”
“아, 고등어초밥처럼 말이지요?”
“혜석씨는 일본 음식을 잘 드시네요.”
“전 어느 나라 음식이든 잘 먹을 수 있어요. 딱히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리지도 않아요.”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 운전 잘 하실 수 있으세요?”
“못합니다. 못하게 되면 뭐 좀 자다가 가면…”
나는 말하다 말고 아차 싶었다. 내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어서 슬쩍 혜석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혜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 정도 여유야 가지고 살아야죠.”
나는 용기백배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그녀와 손을 잡고 바닷가로 나갔다. 모래밭에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혜석의 오라버니가 속한 단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혜석이 재미있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선말을 많이 배우셨네요?”
그 말이 친근하게 들려서 나는 더욱더 용기가 솟구쳤다.
“전 원래 공부를 하기 싫어해서 관료가 되기는 틀린 놈입니다. 집에서는 난리지만, 그림 이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팔에 내 팔을 둘렀다. 그녀의 팔과 내 팔이 서로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조선말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혜석씨와 조선말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혜석이 웃지도 않고 나를 쏘아보았다. 아니, 내 착각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바라볼 때, 쏘아보는 눈빛이니까.
“어느 나라의 말을 배운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어느 나라의 말만이 아니라 문화와 정신도 같이 배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혜석씨가 태어난 나라인 조선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혜석씨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혜석이 계속 무표정하게 나를 쏘아보아서, 나는 내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것인가 하는 후회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조선은 다양한 문화를 가졌더군요. 그냥 유교의 나라인 줄만 알았는데.”
“조선은 유교의 나라 맞아요. 그리고…”
혜석이 피식 웃었다.
“난 조선이 다양하다고 생각할 수 없어요. 조선은 언제나…”
“일시적인 겁니다.”
나는 확신해서 말했다.
일시적이다. 모든 사회제도는 일시적으로 시스템을 정하고 굳어졌다가 다시 바뀌고는 한다. 어느 쪽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나고 보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할 것이다.
“일시적이라고요? 얼마나 오래 여성을 핍박하고 지내왔는지 자세히 알면 놀라실 거예요.”
“지금은 나아지고 있죠?”
“나아질 리가 없잖아요? 일본이 밀고 들어왔으니.”
“일본도 그런 면에서는 같다?”
“다른가요?”
“적어도 막부시대처럼은 아니죠.”
“조선은 막부시대 정도가 아니예요. 달라졌다고 하지만, 겉만 그래요.”
혜석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선말을 배우면서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알았지만, 그날 그녀가 이야기해주는 사실들은 정말로 일본의 막부시대 이상이었다.
집 안에 다시 집이 있고, 여자들은 온통 가리고만 밖에 나갈 수 있고, 여자는 사유재산도 가지지 못하고, 자식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고, 관직에 나가지도 못했다.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하게 했다. 그저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정도만 배우게 했다. 그런 면들이 마치 회교도들의 많은 나라들을 연상하게 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많은 회교국가에서 그렇게 한다고 배웠다.
“조선에 대해서 배우다 보니 조선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가보세요. 지금은 여기와 비슷해서 그다지 새로울 게 없지만.”
“집안에서 자꾸 관리가 되라고 성화인데… 생각 중입니다. 이왕이면 조선으로 나갈 수 있게 해볼까 하고…”
“그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네요.”
혜석은 한숨을 쉬며 저녁노을로 붉게 물드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사토씨는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일본은 우리 조선을 집어삼켰잖아요? 그런데 조선을 착취하는 관리가 되어서 간다고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외교관이나 그런 걸 생각하는 겁니다.”
“아, 조선에 있는 외국사절들과 교류하는 외교관?”
나는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당황했다. 그녀의 가슴속에 경석과 같은 저항심이 있다고는 생각 못했었는데, 그녀 역시 조선에서 온 유학생으로 울분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조심하기로 했다.
물론,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국제 정세나 일본과 조선 사이의 문제도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보다는 일본 자체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일본은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면서 온 국민을 천황의 종으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천황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그건 일본국민이 아니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라는 말이 신민이라는 말로 변해버렸다. 막부시대의 다이묘와 쇼군 아래에 백성들이 있었듯이 천황과 군벌들 아래로 국민들이 편입되어 버렸다.
“듣고 보니 역시 그림이나 그려야겠습니다.”
“나도 그러려고요.”
혜석은 약간 우울하게 웃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이 우울한 세상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 같아요.”
“글도 잘 쓰시잖아요?”
“그건 그냥 속풀이에 불과해요.”
혜석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오직 하나, 그림뿐이에요.”

바다에 별이 떴다. 해안에 봄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이는 위로 고깃배들이 흔들렸다. 플라타너스들도 바람에 흔들렸다.
우리는 식당 위층에 있는 작은 숙소를 얻어서 창을 열고 나란히 엎드렸다. 나무로 된 벽이 낮아서 다다미 위에 엎드려서도 얼마든지 하늘의 별과 경계가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혜석은 이부자리 위에 모포를 덮고 엎드려서 턱을 받치고 두 다리를 허공에 까딱대면서 곡조 모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혜석이 불편할까 봐 바깥 풍경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저 풍경.”
“음?”
“그리고 싶어요.”
새삼스럽게 혜석을 돌아보았다. 반듯한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단발머리와 흰 뺨, 언제 보아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까맣고 빛나는 눈동자.
“눈으로도 그려지고 머리로도 그려지는데, 손으로는 그려지지 않아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토씨는 그렇지 않지요?”
“어떤 면이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
“그림… 볼 때마다 느껴요.”
“저, 저야 오래 그렸으니까 아무래도 기술적인 면에서… 가, 감사합니다.”
나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림은 다른 어느 이론이 들어갈 게 아닌 듯해요. 그림은 그저 한 장의 그림으로 모든 걸 말해주는 게 아닌가요?”
“혜석씨 그림은 선이 강하고 힘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아직 기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그거야 계속 배우기만 한다면…”
혜석은 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두 손을 모포 위에서 깍지 낀 채로 두 눈을 감았다.
“우리는 결국 닛코에 가지 못했네요.”
“내일이라도 가면 됩니다.”
“그만 돌아갈래요.”
“아, 아침에 일찍 출발하지요.”
그녀는 곧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모로 누워서 잠들지 못했다. 졸립지도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바로 옆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나는 화가다. 그래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화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겠지만, 내게 있어서 혜석은 미의 여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강인한 눈빛을 가진, 반듯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여신.

도쿄로 돌아오는 길은 내내 우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