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함몰(陷沒)


가을이 왔다. 나는 혜석을 보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지만, 혜석은 내게 접근할 틈을 내주지 않았다. 혜석은 학교에서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과 어울려서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고, 함께 공부하는 데에 온통 정신을 쏟는 듯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 괴로웠다. 온 사방에 그녀의 글이 실리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조선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으로서 그들 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조선 유학생이 아닌 나를 그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경석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경석은 오스기 선생과 어울리느라 일반적인 교류를 아예 끊어버렸다. 오스기 선생의 활동이 천황의 신성불가침에 저항하는 것이어서 선생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가 비밀리에 활동하기 시작해서였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그녀의 친구가 내 사촌과 헤어진 점이었다. 게다가 혜석은 이제 학교 기숙사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덕분에 내가 혜석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그녀의 학교로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성인 남자가 불쑥 여학교를 찾아 간다는 것이 통상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녀를 보지 못한 지 석 달이 다 되어가자, 나는 참을 길이 없었다.
집안에서는 내 앞길을 놓고 매일 이런저런 논의들이 심했다. 정치를 하는 아버지는 동생을 자기 영역에 끌어들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나를 다그쳤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들 내내 앞길도 그림도 아닌, 나혜석에게 함몰되어 있었다.

거리에 갈색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구월의 어느 날, 급기야 나는 견디지 못하고 혜석을 찾아 나섰다. 그녀를 다른 곳에서 볼 수는 없고, 오로지 학교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교정은 수업이 끝날 무렵이어서 조용하고 스산했다. 나는 학교 수위실로 가서 당당하게 면회를 신청했다. 수위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당하게 친척 오빠라고 했다. 수위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전화를 집어 들었다. 나는 태연히 교정을 둘러보면서 수위가 전화에 대고 전하는 말을 들었다. 수위가 나를 슬쩍 보더니 수화기를 내밀었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잡고 보란 듯이 조선말을 했다. 전화를 받은 당사자는 기숙사의 조선인 여학생인 듯했다. 잘되었구나 싶어서 진짜 혜석의 오빠처럼 굴었다. 수위의 시선이 편안해졌다.

혜석은 낙엽이 날리는 교정을 성큼성큼 걸어왔다. 주름치마에 맨다리로 단화를 대충 접어 신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뛰어서 약간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저 모습을 보려고 내가 그토록 가슴앓이를 했던가. 지난 석 달의 시간들이 눈앞을 스치면서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솟구칠 뻔했다. 그러나 혜석은 너무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너무 보고 싶어서 오빠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전갈을 보낼 수도 있었잖아요? 여학교에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 안 되는 거죠.”
“전갈을 도대체 어디로 보내겠습니까?”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
“여러 번 보냈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일본인이라서 어디에서도 환영해주지 않더군요. 혜석씨를 만나려고 한다고만 말하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더군요. 전갈은 아예 건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혜석씨는 아예 저를 피해서 다니는 것처럼 얼굴조차 볼 기회가 없더군요.”
나는 그녀에게 지나간 내 시간들에 대해서 어떤 보상이라도 바라는 심정으로 마구 쏟아냈다.
“혜석씨를 볼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는 조선인이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어야 조선인이 되죠.”
혜석은 냉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르고 계셨어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그녀는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러니까 그냥 계속 일본인으로 사세요.”

혜석의 차가운 시선과 말투는 나를 완전히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얼음장 같은 말투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자조적이었다. 그리고 그 증오의 대상이 일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일본과 조선의 병합을 감내하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어느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속에 울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부분에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그녀는 그림 외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그녀에게 연애질이나 하자고 달려든 셈이 되었다. 특히 그녀가 병합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경석처럼 아나키즘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아서 생각조차 못 했다. 나는 이대로 그녀를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랬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날마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채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모습을 지우듯이 캔버스에 물감을 묻혔다. 술에 취해서 그리는 그림은 다른 사람들의 인물화였지만, 나는 내내 가슴속으로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누구를 그리든 그림 속 인물의 눈빛은 그녀의 눈빛을 가졌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갔다. 가을 내내 나는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술을 마시는 것인지 모를 지경까지 몰려갔지만, 나는 그런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나는 연말의 들뜬 주변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우울하게 술과 그림에 빠져 지냈다. 집 뒤뜰에 있는 창고처럼 생긴 작은 내 작업실에서 먹거나 쌀 때를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서는 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는 일이 생겨버렸다. 동생이 말해주기를 온 도시의 고위층이라는 정치꾼들이 집으로 몰려들게 되어 있다고 했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뒤뜰에서 눈을 맞으면서 파티를 연다고 해서 나는 재빠르게 달아났다. 작업복에 코트 하나를 걸치고 무작정 거리로 나와버렸다.
거리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외국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고, 그에 따라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생활양식도 변화했다. 전통적인 일본의 연말 분위기는 간데없이 서양식으로 파티들이 이루어지고, 거리는 서양 사람들이 신으로 믿는 성인 예수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일본은 다른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고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어야 한다고 매번 강요하는 판국이었는데, 어째서 또 예수탄생절은 즐겁게 파티를 하라고 풀어놓는 것일까. 혹시 외국의 그런 신들처럼 천황도 외국에서까지 신으로 떠받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를 침략하고 더 나아가서 온 아시아를 침략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 모든 세상들에서 천황을 떠받들게 하고 싶은 편집증적인 광기가 일본을 지배하기 시작한 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게 천황 때문은 아니다. 천황을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자기의 광기 어린 정복욕을 채우느라 바쁜 군벌들 탓이겠지. 들떠서 돌아다니는 군중들 사이에는 군인들이 꽤 많았다. 이제는 군인들 세상이라는 듯이 군인들이 장교복을 입고도 함부로 와후쿠 차림의 여자들을 끌어안고 히히덕대며 지나갔다. 꼴 보기 싫은 놈들.
나는 시부야의 대로를 벗어나서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하라주쿠 거리까지 쭉 이어지는 언덕길은 큰 거리와 달리 작은 선술집들과 잡화가게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 거리도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서 배회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꼴 보기 싫은 상류층 정치꾼이나 군인들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학생들이 많아 보이는 꼬치집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로 가서 구석진 벽을 등지고 자리 잡고 앉아 뜨거운 청주를 시켰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꼬치는 그다지 성의 있게 구워져 나오지 않았지만, 청주는 언 몸을 녹이기에 좋았다. 주변의 소란 속에서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때, 내 눈에 언뜻 그녀가 비쳤다. 혜석이 어떤 남자 하나와 팔짱을 끼고 내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환영이라도 본 것만 같아서 눈을 껌뻑이고 있는데, 혜석은 사내와 다정하게 반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주 앉은 게 아니라 나란히 앉았다. 내게서는 두 사람의 옆모습이 비스듬히 보였지만, 두 사람에게서는 구석에 처박힌 내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정답게 속삭이고 있었다. 사내는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지거나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남루하게 차려입은 게 한눈에도 별로 없어 보이는 그저 그런 사내 같았다.
혜석은 간간이 키득대고 웃었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일어나는 대신, 청주를 들이켰다. 두 사람의 행동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다가가서 아는 체라도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저 움찔대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왁자지껄하면서 다시 한 무리가 술집으로 들이닥쳤다. 나도 익히 아는 한국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혜석과 사내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둘러앉더니 두 사람에게 농을 걸었다.
“둘이만 빠져나간 거 모를 줄 알아?”
“특고는 따돌려도 우리는 못 따돌리지.”
나는 그들 중 누구라도 알아볼까 두려워서 그만 자리를 뜰까 생각했다. 이렇게 혼자 구석에 있다가 그들 눈에 뜨이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 그들 모두가 한때 내가 혜석을 찾아다녔던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술을 마저 털어놓고 나가려고 술잔을 드는 순간, 누군가가 내 앞에 와서 섰다. 나는 흠칫 고개를 들고 앞에 선 인물을 바라보았다.
“사토씨.”
혜석이 술로 발그레해진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멍하니 혜석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혼자 뭐해요?”
“아,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손님이 몰려드는 통에…”
혜석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서 같이 마셔요.”
“아, 아니. 난…”
“다 알 만한 친구들이에요. 우리 오빠와도 잘들 알고요.”
내가 혜석에게 끌려서 술자리로 가자, 모두가 의아해서 쳐다보았다.
“오빠 친구예요. 다들 아시죠? 화장실 갔다 오는데 보니까 혼자 술을 드시고 계시잖아요?”
모두와 반가운 척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에 혜석과 있던 사내만 새로 첫인사를 나누었다.
“최승구라고 합니다.”
“사토 야타입니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혜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결국 혜석을 가운데 두고 나와 최승구라는 사내가 좌우에 앉은 꼴이 되었다.
대화는 조선말로 이어졌지만, 그런 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혜석이 경석의 친구라고 해서인지 다들 나를 경계하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 사상적인 이야기든, 조금 일본인이 듣기에 불편한 이야기든, 그들이나 나나 별반 거슬릴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옆에 앉아서 나를 챙겨주는 그녀가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였다.
오가는 대화를 통해서 안 것은 최승구라는 사내가 게이오대학에서 글을 공부하는 시인이라는 것이었다. 대화를 듣다 보니 연극도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일행들이 그의 천재성을 자꾸 논하는 부분에서 질투심으로 속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혜석이 그에게 호감을 상당히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건 내게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혜석이 나를 왜 그 자리로 이끌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혹시 일부러 나를 단념시키려고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때는 대화 중에 불쑥 나와 함께 닛코를 향해 가다가 늦어져서 바닷가에서 술만 마시고 왔다는 둥, 여름에 놀러 다녔던 곳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좋았다가 낙담도 했다가 하면서도 좀체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도저히 그녀만 일행 가운데 두고 일어설 수가 없어서였다. 바보 같은 심정이지만, 그때는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술자리가 거의 다 끝나갈 쯤에 혜석이 말했다.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이 시간에 기숙사에 들어가면 혼나지 않아요?”
나는 생각 없이 물었는데, 혜석이 의외라는 듯 나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모르셨어요? 저 이제 혼자 밖에서 지내요.”
“아, 그런가요?”
“사토씨 차 가지고 왔으면 나 좀 바래다주세요.”
“아, 차는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벌떡 일어나서 전화로 달려갔다. 주인의 전화를 잡고 발전기를 돌리는 내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교환수에게 우리 집을 대라고 하면서는 혹시 파티에 미쳐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행히 전화가 쉽게 연결되었고, 집 안에 있던 동생에게 차를 부탁했다. 동생은 이미 파티가 끝났지만 술에 취해서 스스로 몰고 갈 수는 없고 누군가를 대신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혜석과 함께 있던 사내에게 악수를 청하고 다른 일행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혜석과 함께 술집을 나왔다. 아무리 싫으니 좋으니 해도 돈이 있고, 지위가 높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조건 같았다.

“최승구라는 사람이 시인이고 연극도 합니까?”
혜석의 집에 도착해서 나는 슬쩍 사내에 대해서 물었다.
“네. 대본도 쓰고 연출도 하고 그래요.”
“아주 친해 보였습니다.”
혜석이 슬며시 웃었다.
“나는 좋은데, 그분은 모르겠어요.”
“아.”
나는 뜻 모를 감탄만 내뱉고 말았다. 그녀가 좋아하고 그 사람은 모르겠다고 하면 -그건 섭섭하기는 하지만- 아직 둘 사이에 어떤 밀접한 관계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혜석은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뜻 모를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사토씨,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누웠지만,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잠은 오지 않았다. 혜석이 마지막에 한 한 마디 인사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무슨 뜻인가. 이제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인가. 함께 있던 최승구라는 사내에게 마음이 있으니 다가오지 말라는 뜻인가.
날이 밝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모든 걸 잊고 잠들려고 다시 작업실에 숨겨 놓았던 술을 가져다 마셨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잠은 오지 않고 가슴만 두근거렸다. 끓어오르는 열기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한겨울인데도 창을 활짝 열고 있어야 했다.
견딜 수 없다. 그녀와 함께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녀와 함께 하루를 보내고, 그녀와 함께 잠들고 깨어날 수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아무리 담담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녀가 다른 사내와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면서 미칠 것만 같은 질투심에 가슴이 덜덜 떨렸다.
일어나서 정원을 가로질렀다. 아직 눈발은 잦아들지 않았다. 눈을 맞으면서 잠시 서 있었다. 지난밤의 파티로 인해 피곤했던지, 집 안에는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집 안은 고요했다. 약간 현기증이 일어나서 비척비척 현관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서재로 가서 책상 서랍을 열려고 했다. 잠겨 있었다. 서랍이 망가지도록 힘으로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을 가슴에 품고 다시 정원을 가로질렀다. 문을 나서고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달렸다. 그녀의 집 앞에 차를 대놓고 문을 두드렸다. 집주인 여자가 나와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무조건 그녀의 방을 찾아서 달려들었다. 그녀가 이 커다란 집의 어디에 사는지 몰랐는데, 주인 여자의 고함 소리에 놀랐는지 뒷마당 쪽에서 불쑥 그녀가 나타났다. 나는 그녀의 팔을 부여잡고 주인 여자의 시선을 피해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뒷마당으로 미닫이가 나 있는 작은 방에 사는 것 같았다.
“왜 이래요?”
혜석이 사납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는 혜석을 벽에 밀어붙이고 소리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왔습니다.”
“뭐가 참을 수 없어요?”
“난 이제 도저히 혜석씨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혜석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두 팔을 꼭 붙잡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를 노려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팔 놓아요.”
나는 멈칫 팔을 놓고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우리가 이루어지려면 나도 사토씨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는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그저 나와 있어주기만 하시오. 내가 평생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떠받들겠습니다.”
나는 이제 더는 망설일 게 없었다.
“싫어요.”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약간 멈칫 놀랐다. 나는 권총을 내 머리에 겨누고 소리쳤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소.”
혜석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렁였다.
“차라리 나를 쏘세요.”
그녀는 너무나 차갑게 말했다. 조금도 위축되거나 흥분하지도 않았고, 겁을 내지도 않았다. 표정도 눈빛도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가차 없이 내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어찌 된 일인지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여전히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권총에는 언제나 총알이 들어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혜석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권총을 바닥에 떨구어버렸다. 그리고 비척비척 돌아서 앞마당으로 나오다가 이제 막 들어서는 경찰들과 마주쳤다. 경찰들이 내 손에 권총이 없는 걸 알고 냅다 달려들어서 내 몸을 패대기쳤다. 나는 아무 반응도 없이 그냥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둔탁한 충격이 왔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내 몸은 그 순간에 마비되어 있었다.

동생이 나타났다. 나를 보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내게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갑시다.”
동생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다가 내 목에 멍이 든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이런 거야?”
동생은 경찰들을 돌아보았다. 경찰들이 움찔했다. 파출소 안은 몇 명의 경찰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긴장해서인지 대꾸 없이 바라만 보았다.
“우리 아버지 권총은 어디 있소?”
경찰 하나가 눈치를 보면서 권총을 내밀었다. 동생은 권력자답게 거만한 표정으로 권총을 받아 들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많이 맞았어?”
“기억이 없다.”
동생이 다시 경찰들을 돌아보았다.
“문제 삼지 않겠소. 대신 입조심들 하시오.”
동생에게 이끌려서 파출소를 나왔다. 거리에는 아직도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아침나절인데도 거리는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죽기 좋은 날이었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죽기에 아주 좋은 날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