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혜석이 사랑한 남자


그날 이후로, 혜석이 내게 원한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편’이었다. 유교의 풍습이 짙은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나, 조선 최초로 서양화가가 되려는 그녀는 당연히 외로울 것이다. 특히 여자라고 해서 사내들에게 눌리기 싫어하는 단단한 그녀로서는 앞길을 헤쳐 나가기가 여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을 ‘내 편’이 필요했을 것이다. 후원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으로라도 후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연인이 아니라,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후원자가 되어주고, 그녀의 도반이 되어주기로 했다.

혜석은 얼마 후 다시 일본으로 나가기를 희망했고, 먼저 귀국해서 사업 준비를 하고 있는 경석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도쿄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래 고민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러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그녀를 따라서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건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나는 그냥 경성에 머물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따라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처럼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나 역시 제대로 할 줄 알고, 하고 싶은 것이 그림이었고 그림 외에는 흥미가 없었다. 내가 조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역시 그림 때문이었다.
새로운 대상을 필요로 했고, 그런 면에서는 조선만이 특별한 게 아니라, 어느 나라든 내가 살아보지 않고 아직 보지 못한 낯선 풍경들에 끌리는 것도 순전히 그림의 대상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경성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지도에도 없는 작은 바닷가 마을들을 돌아다니고, 이름 모를 산골에서 며칠씩 머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을의 어느 노루목이든 주막이라고 불리는 여관들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먹고 잘 수 있어서 어이든 불편하지 않게 돌아다녔다.

그렇게 해가 바뀌도록 돌아다니고 있던 어느 날, 경성에서 연락이 왔다. 전보 한 통이 와 있다는 전갈이었다. 전보의 발신자는 나혜석이었고, 수신자는 나였으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전화요망.

경성에서 전화가 오거나 하면 주재소에서 알려주고, 나는 경성으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하지만 벽지인지라 도쿄로까지 전화가 연결될 수는 없었다. 부산에서 얼마 안 떨어진 어촌에 있었으니 금방 나갈 수 있겠거니 했는데, 차편이 금방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하루 반나절을 기다린 후, 겨우 마련된 차편으로 부산까지 나갔다. 군용 트럭이었는데, 헌병들은 관리라고 하지만 민간인에 가까운 나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이 시국에 그림이나 그리고 다니신다니. 좋으시겠습니다.”
‘그림이나’라니. 웃기는 놈. 나는 운전병과 장교 옆에 끼여 탄 주제여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짐칸에 타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자꾸만 말을 붙이는 통에 짜증이 솟구치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우체국으로 달려가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 여자가 그다지 내키지 않는 태도로 기다리라고 하더니, 혜석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있어?”
“부산.”
“아, 정말 잘됐네. 북쪽 멀리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음?”
“이달 말쯤이면 부산에 도착할 거야.”
“아, 그래?”
“그런데 지금 뱃삯이 좀 필요해.”
“뱃삯을 보낼까?”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좀 해줘.”
“그러지. 전신환으로 보내면 며칠 내에 받을 거야. 그런데 아주 오는 거야?”
“잠시 들르는 거야. 만나서 이야기해줄게.”
나는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서 곧장 전신환으로 혜석에게 돈을 보냈다. 우선 있는 대로 보냈지만, 그럭저럭 여비는 된다 싶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보름이나 허송세월을 하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고마워.”
짧은 머리에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그녀는 마치 조선에서 흔히 보는 그런 여학생 차림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입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짐도 별로 없어서 그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피곤하겠다.”
“괜찮아. 그보다 배가 고파.”
“가자.”
나는 혜석의 가방을 받아 들고 가까운 식당을 찾아 걸었다.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녀는 여비가 넉넉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배를 탄 이유를 모르겠지만,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고 그녀가 배를 채우도록 기다렸다. 그녀는 말없이 식사를 마치더니, 창밖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이 아파.”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너무 아파서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아.”
혜석은 한숨처럼 말했다. 그 정도로 아픈 줄은 몰랐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인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술 마실래?”
“조금만. 많이 마시면 힘들 것 같아.”
나는 술을 시켜주고도 잠시 말을 걸지 않고 그냥 그녀가 생각하도록 술만 마셨다. 그녀도 한동안 봄볕이 서쪽으로 낮게 기울어가는 창밖 풍경을 내다보면서 술을 마셨다. 조금 마신다더니 꽤 마시는 것 같았다.
“그 사람… 많이 아픈 거야. 아주 많이. 아니면 나한테 보고 싶다고 할 사람이 아니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토록 서로 사랑한다면 어째서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없나. 이유가 무어냐고 묻지는 않았다.
“나 만나고 나서 그 사람은 집안하고 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어.”
그녀는 창밖을 노려보면서 혼잣말이라도 하듯, 머릿속을 정리라도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내 첫사랑이야.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 누구나 심하게 반발하겠지만,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처음 만나서부터 그냥 알 수 없게 사랑하고 말았어.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쩌다 그런 기회가 왔는지, 무엇에 끌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거야.
그 사람은 시를 잘 썼지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의 시를 사랑하게 된 거지, 그 사람의 시로 인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 아니야.
물론 그 사람이 쓰고 연출하는 연극도 애정을 가졌지만, 그건 순전히 그 사람을 사랑해서였던 것 같아.
그 사람에게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실망하지도 않았어. 가족이 있든 없든, 그런 걸 따질 만큼 내 사랑이 엷지도 않았어.
불륜이니 어쩌니 하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윤리에 어긋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그건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 부분만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야.
처음 학지광 편집회의에서 그 사람을 만나던 날, 나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그날 하루를 완벽하게 망쳐버렸어. 나도 글이라고 써서 가져갔는데, 돌아오면서 보니까 내 글은 그대로 내 가방 속에 있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도 날 처음 본 그날, 상당히 흥분했었나 봐. 나중에 그러더라. 둘이 대화할 기회를 잡지 못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그 사람이 아나키스트인 건 알지? 그 사람은 경석 오빠와 그런 면에서 잘 통하고 서로 아는 사이였지만, 그래서 오빠가 소개해준 사람이었지만,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석 오빠 앞에서는 감히 그 사람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못했어. 그 사람은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뭐든 다 감수할 수 있어. 세상의 시선이라든가, 손가락질 정도는 무서울 게 없지. 하지만 해결될 수 없는 건 바로 그 사람의 집안이야.
심각한 상태의 시작은, 그 사람이 집안에 이혼하겠다고 발표를 한 시간부터였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내린 결정이어서 나는 까맣게 몰랐지.
그 사람은 집안의 큰일로 잠시 고향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그만 아버지께 그 말을 해버린 거야. 어려서 억지로 한 결혼 생활은 못하겠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혼하고 결혼하게 해달라고 했다는 거야.
집안이 그 일로 난리가 나고, 첩으로는 들여도 이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버님은 노발대발하셨겠지. 결국 그 일로 상태는 더 나빠졌어.
그 사람 아버지는 학비와 생활비를 단번에 끊어버렸어. 공부고 뭐고 그냥 돌아오라는 이야기였지. 조선 유학생이 고향집에서 보내주는 돈이 없으면 무슨 수로 도쿄에서 버틸 수가 있겠어?
처음에는 주변의 도움으로 버텨봤지만, 결국은 고향으로 가야만 했어. 생활고가 심해지고, 이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은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 사람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거든.
처음으로 각혈을 하던 날, 그 사람은 내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몸을 추스르고 다시 오겠다면서 갔는데, 그 후로 영영 집을 나서지 못했어.
처음에는 편지로라도 매일같이 오고 가고 했는데, 근래 들어서 편지도 뜸하더니, 전번 달에는 이제 소식조차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어.
그런데 그 사람 동생이 그 사람 대신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어. 꼭 한 번만 고흥으로 좀 와달라고 간곡하게 써서 보낸 거야.
그 사람은 소식이 없고, 그 사람 동생은 아픈 형님에게 한 번만 왔다 가달라고 하니,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부랴부랴 오게 된 거야.

거기까지가 혜석의 이야기 전부였다.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 최승구는 고향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도쿄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파서인지, 혜석을 만나지 못하게 해서인지, 아니면 관리로 있다는 아버지가 아나키즘에 빠져있는 아들이 문제를 일으킬까 미리 잡아놓은 것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가보려고 그래?”
“응. 그래서 집에 연락도 없이 슬쩍 왔다 가려니까 여비가 없어서 연락한 거야. 고마워.”
“최승구 씨 집이 어딘데?”
“고흥.”
혜석은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의 주소는 확실히 고흥이었다.
“어떻게 가려는데?”
“잘은 모르지만, 전라도니까 일단 광주로 가서, 송정리까지는 기차가 있다고 했어. 거기서 다시 차편을 구하면 어떻게 되겠지.”
나는 고흥이 어딘지 잠시 가늠해보았다. 부산에서는 광주를 가려면 먼저 대전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대전에서 광주로 갈아타고 내려가서 거기서 고흥으로 찾아가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고흥군이라면 차편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고흥군에 간 적은 있지만, 그때 나는 관용차를 구해서 타고 갔었다.
“호남선은 화물차 위주여서 열차가 열차라고 볼 수가 없어.”
“왜 화물차들 위주지?”
“곡창지대니까. 그래서 깔은 게 호남선이거든.”
말하다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부지런히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식량을 부산을 통해 가지고 나갈 것이다. 아직 다른 항구로 연결된 노선이 없다. 때문에 부산에서 교통편이 있기 마련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부산에서 직접 갈 방법이 있기는 있을 거야.”
“그럴까? 길도 제대로 뚫려 있나 모르는데?”
“다 가는 길이 있겠지.”
“어떤 차가 그런 길로 다닐까?”
“트럭.”
“트럭?”
“내가 알아볼게.”
혜석은 활짝 웃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어린애 같은 웃음을 보았다. 언제나 세상과 싸우느라 전투적이고 강인함만 보이던 그녀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절대 잊히지 않을.

예상대로 트럭은 있었고, 나는 그녀를 트럭에 혼자 태워서 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잘 도착했다는 전화 한 통 없었다. 마땅히 전화할 곳이 없었겠지 싶어서 돌아온 트럭에 물어보니 무사히 간 것은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도 더 지난 후에, 혜석은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지?”
혜석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심해져서 손을 쓸 수가 없어 보였어. 더 돌봐주고 싶었지만, 가족이 온다고 해서…”
후우. 혜석의 긴 한숨이 내 가슴에까지 전달되어서 답답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가족들이 오게 된 거야. 그러니까…”
“울어.”
혜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그렇게 강한 척하지 말고 울어. 가끔은 펑펑 울어야 속이 풀리는 거야. 허구한 날 전쟁터에라도 나선 사람처럼 살 수는 없는 거야.
“난 안 울잖아.”
혜석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밥을 먹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곧장 도쿄로 가야지?”
“그래야지. 아버지 나 여기 왔던 거 알면 난리 날 텐데.”
“표 미리 끊어놓아야겠다. 오가는 횟수가 날마다 늘어나는데도 배편이 모자라네.”
혜석이 수저를 멈추고 나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왜?”
“고마워.”
“싱겁기는.”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한때는 권총을 들고 쫓아갔던 여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 아파서 누워있는 사내가 부러웠다.

혜석은 다음 날 도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