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햇살과 그늘


그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조선에서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났고, 파리에서는 세계평화회의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어부지리를 위해서 외교력을 총동원했다. 얼결에 바빠진 나는 매일 승전국들의 주요인사들을 대접하는 파티에 나가야 했다. 미치고 환장할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건이 터졌다. 먼저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더니, 급기야 경성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나는 그 일이 크게 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은 1차 대전의 승전국 그룹에 슬쩍 끼어들어서 산동반도를 쉽게 삼켜버렸다. 중국이라는 대국을 삼킬 궁리에 빠진 일본의 시선에서 조선은 당연히 이미 삼켜서 소화시키는 중인 먹잇감이었다. 그래서 조선을 우습게 알았다.

사실 조선황실은 우습게 볼 만한 황실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그렇게 우스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 미처 모르던 조선 사람들. 퍼뜩 나는 내가 아는 조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내게까지 미쳐왔다. 혜석의 동생이 전화를 해왔다. 혜석이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마침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경성으로 향했다.

혜석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인덕 등과 함께 연루되어서 만세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있었다. 다들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한 유명한 여자들이었다. 그런 여성들 가운데에 혜석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묘한 자부심을 주었다.
나는 혜석의 면회를 신청했지만, 조사 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쑤셔대서 겨우 아주 잠깐만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핑계는 문화예술인이므로 중대한 질문이 있다는 것이었고, 나는 외교적인 문제도 있다는 둥 헛소리를 남발해야 했다.

좁은 취조실 방 안에서 마주친 혜석은 여느 때에 비해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눈빛은 살아서 강하게 사물을 쏘아보았고, 꾹 다문 입술은 야무져 보였다.
“힘들지?”
“안 힘들어.”
“조서 보았는데 재주껏 동료들 피해 안 입게 잘 했던데?”
“그걸 어떻게 보았어?”
“사기 쳐서.”
혜석이 쿡쿡 웃었다.
“김우영 씨는?”
“도움이 안 돼.”
“법학했다면서?”
“아직 변호사는 아니야. 시험 공부 중이야.”
“변호사는 구했어?”
“이제 구해야지. 그이가 구해줄 거야.”
“내가 경성에 있을 거야. 자주 올게.”
“아니.”
혜석은 나를 차갑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건 우리끼리 해야 하는 일이야.”

그 말은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다른 어떤 말보다 깊은 상처가 되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조선인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내가 일본인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었고, 경성에 머물면서도 다시는 사건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그 후로 면회하지 않고 그냥 경성에서 서성이다가 도쿄로 돌아와버렸다.
조선에서 서성이면서 본 것은 확실히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일들이었다. 조선의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면서, 일어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만세운동은 경성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연속 일어나고, 일본의 헌병대와 특별경찰들은 곳곳을 쫓아다니면서 때리고 죽이고 잡아들였다. 처음부터 강하게 진압해서 기를 꺾으려 들었지만, 밟으면 밟을수록 시위는 들풀처럼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조선의 저항은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선은 온통 피와 함성으로 물들었다. 나는 조선의 상황을 눈으로 보는 것이 괴로워서 도쿄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도쿄에서 혜석의 석방 소식을 들었다. 한여름이 되어서야 혜석을 비롯한 박인덕과 황애시덕 등이 모두 풀려났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 가슴속에는 내가 일본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혜석의 차가운 눈빛과 단호하게 거절하는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국적을 바꿀 재주가 없었다. 어차피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져서 조선이라는 국적으로 바꿀 길도 없었다. 핏줄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일본인이니까 일본인답게 일본 정부를 위해 일을 하고 월급을 타서 먹고사는 것을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옳고 그른 판단은 나 같은 말단 직원이 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나 동생처럼 고위관리들이 할 일이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줄기차게 외국인들을 상대하고 다녔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외국인들을 만나서 어색한 서양식 파티를 열고 서서 술을 마시고 서투른 영어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을 때, 나는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전화도 아니고, 청첩장도 아닌 전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김우영 나혜석 결혼.

날짜도 장소도 없었지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 전체가 떠들썩했다. 김우영은 변호사가 되어 있었고, 나혜석은 신여성으로 명사 중의 명사로 알려져 있었다. 화제가 된 건 신문지상에 떡하니 청첩장을 실은 일이었다. 당시에 누구도 생각 못할 청첩이었다.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리는 식도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기자들은 그녀의 결혼 승낙 조건도 열심히 조사해서 대서특필했다.
평생 사랑해줄 것, 결혼생활이 예술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해줄 것, 시어머니와 전처의 딸과 함께 살지 않게 해줄 것.

나는 혜석이 내건 조건을 들으면서 내심 불안감을 느꼈다. 사랑하지 않는구나. 결혼식에서 그녀 얼굴을 바라보면서 더욱 그렇게 느꼈다. 사랑하지 않는구나. 피로연에서 그녀가 좌중에게 한 ‘이런 허례허식은 필요 없어 보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또 느끼고 말았다. 사랑하지 않는구나.

혜석을 다시 보게 된 건 도쿄에서였다. 결혼하자마자 도쿄로 와서 그림공부를 한다고 했다. 김우영은 변호사를 개업하느라 경성에 남고 혼자 도쿄로 나왔다.
“누구한테 사사 받기로 했나?”
“응. 스즈키 선생님한테 두 달만 배우기로 했어. 오래는 못 있고.”
혜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신혼인데 혼자 있게 하는 거야?”
“그러기로 하고 결혼했으니까.”
“김우영 씨가 신사니까 잘해줄 듯은 하다.”
“그래서 결혼했어. 사실 결혼 상대로 다른 면은 정말 아니잖아.”
신문의 가십란에 있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이차도 많고 자식까지 딸린 홀애비와 결혼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들 했다.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명문가라고 하지만, 집안에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일가친척들은 넉넉하지 않은 농사꾼들이었다.
“그래도 선택할 만해서 선택했어.”
그래. 인생은 선택이니까. 선택의 연속이니까.
“이거 알아? 나 신혼여행으로 그 사람 무덤에 갔었어.”
“뭐? 어디를 갔었다고?”
“그 사람 무덤에 같이 갔었어.”
나는 조금 멍한 느낌이 들었다.
“같이 갔었다고?”
“그랬어. 내가 이해를 시켰지.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어서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으니 질투하지 말고, 가엾은 사람이니 마지막으로 위로라도 해주자고 말이야.”
그게 설득이 가능한 이야기던가.
“이해하고 같이 가주었어. 이해력도 있고, 다른 조선 사내들하고는 확실히 다르잖아?”
“남자는 다르지 않아. 너무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럴까?”
혜석은 되물었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상관없어. 난 내가 생각한 대로 살겠어. 일부러라도 그렇게 할 거야. 입으로만 여성의 인권이 어쩌고 떠드는 건 싫어.”
그녀의 발표되는 글에서도 읽은 그대로다. 누구든 먼저 나서서 타파해야 한다고.
“나부터 먼저 보여줘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불안했다.
“아직 그런 세상은 아니야. 결혼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대부분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말이야. 그게 꼭 조선이어서가 아니다. 일본이라고 그게 다를 리가 없어. 다른 어느 나라에도 그런 세상은 없다. 위험하게 살지 마.”
“유럽의 나라들이라면?”
“다를 바가 없을걸?”
“그래?”
“직접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도쿄나 경성에서 만난 유럽인들은 같더라는 말이야.”
“그럼 내가 세계 최초의 자유부인이 될게.”
“적당히 해. 조선 최초의 성공한 여류 서양화가잖아?”
“난 그냥 서양화가야. 그리고 조선에는 서양화가가 이미 많아. 거기 왜 여류가 붙어야 해? 남류 서양화가라고는 하지 않으면서.”
“하하, 그런가?”
“작가를 말해도 꼭 여류 작가, 이러는 게 웃기지도 않아. 여자는 남자보다 글도 못 쓰고 그림도 남자보다 못 그린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녀는 활기차 보였다. 어쩌면 결혼이 그녀를 최승구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한 좋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면 그저 김우영이 당장 눈앞의 떡에 팔려서 본심을 감추고 지내는 게 아니기만을 바랐다.
“이번에 그이가 맡은 일이 어려운 일인데 내가 곁에 없어서 좀 그래.”
“벌써 큰 사건을 맡고 그러나 보지?”
“결혼 전에 나하고 약속한 걸 지키는 거야. 내 제자들이 연루된 사건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 사건이거든.”
혜석은 한때 정신여고의 교편을 잡았었다.
“제자들 변호를 약속했어?”
“아니. 독립운동 사건을 맡아서 보탬이 되기로 약속했지.”
아. 나는 혜석을 바라보면서 역시 그녀가 선택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당시 같은 시국에 통감부의 비위를 거슬리는 변호를 한다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결혼 잘한 듯하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