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6. 경성에서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었고 미친 짓이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되어서 이제는 정말 그녀와 얼굴도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내 자책에 빠져서 몇 달이고 술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죽였다. 어느 때는 집안끼리 알고 지내는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려 유곽을 드나들기도 하고, 친구들 소개로 여학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리 시간을 보내도 그날의 일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어땠을까 싶은 고통의 시간들이 나를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게 했다.
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그낭 어디든 떠나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집안 사람 모두가 찬성이었다. 동생은 내가 떠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선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나라에서 보내는 문화전파단원 따위의 이상한 직책으로 어느 나라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공부한 조선으로 가고 싶었다. 혜석은 도쿄에 있을 테지만 나는 그녀가 나고 자란 조선에 가고 싶었다. 꼭 나혜석이라는 여자 때문이라기보다 조선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내가 조선말을 잘하는 덕분에 일은 수월하게 풀려서 나는 곧바로 떠났다. 화구를 챙겨서 갔다. 붓을 놓은 지 꽤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림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조선을 그려보고 싶었다.

내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14년 여름이었다. 혜석을 마지막으로 만난 후 여섯 달 지난 팔월의 중순에 나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하룻밤을 꼬박 달린 후에, 경성역이라 불리는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조선에 대한 첫인상은 -화가라는 내 시선으로 보자면- 모든 것이 둥근 나라였다. 산도 들도 강줄기도 둥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매료시킨 것은 너무 높은 산도 없고 너무 심한 평야도 없는 알맞은 나라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여섯 달 만에 처음으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기차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특히 강가나 산 아래에 자리한 시골 마을의 풍경은 당장이라도 기차에서 내려 구경을 가고 싶을 정도였다. 작고 아담한 초가집들과 돌담들이 아스라하게 보였다. 여름의 싱그러운 초록빛과 어우러져서 나를 편안히 쉬고 싶게 만들었다. 조선의 집들은 아무리 커다란 집도 절대로 주변의 지형을 망가뜨리지 않았다. 검은 기와로 된 집들이나 짚더미를 얹은 초가집들이나, 모두가 자연과 적당히 어울리게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경성에 도착해서는 그런 풍취를 느끼지 못했다. 경성은 일본을 복제하려고 애쓰는 도시로 보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건물들 사이에 괴상한 모습으로 불쑥불쑥 일본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일본의 건물도 아니다. 조선풍도 아니고, 일본풍도 아닌, 국적불명이라고 해야 맞을 건물들이 여기저기 급하게 끼어들어서 풍경을 망친 듯한 모습이었다. 손대기 전, 가지고 있던 조선의 한양이라는 도시의 원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러일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거리마다 군인들이 많아서 아직도 전쟁 중인 듯한 느낌이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을 기회로 일본은 조선의 북쪽에 있는 산둥 반도와 시베리아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문화전파단원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외교관 신분으로 왔지만, 나는 그런 정치나 외교나, 전쟁에는 문외한이었다. 총독부에서 가끔 어느 파티에 얼굴을 내밀라고 하면 그저 나가서 술이나 마시고 오면 그뿐이었다.
나는 경성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어디든 고즈넉한 곳으로 달아나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다. 조선의 모습을 지금 그리지 않으면 외국문물이 구석구석 밀려 들어가서 다 망가진 다음 어찌 그릴 것인가. 멋진 궁궐 앞에 석조건물을 지어서 지금의 자리에서도 충분한 총독부를 옮긴다고 공사 중이니, 미적 감각이라고는 없는 군인들이 한심했다.
나는 그때, 조선의 전통적인 수묵화의 기법을 내 그림에 접목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내게 혜석을 잊게 해주었다. 가슴 한켠에는 여전히 싸한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조선의 강산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에 빠져서 지내는 동안은 그녀로 인한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신년을 맞이하면서 나는 경성에서 최초로 일본인이 그린 경성의 풍경을 전시할 수 있었다. 떠들썩하게 열리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나는 만족했다.
집안에서는 내가 조선에서 비공식 외교관이자, 화가로 활동한다는 데에 만족했다.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내가 화답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꽤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미리 사겠다고 리본을 붙여주는 관리들이 꽤 있었다. 덕분에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전시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에,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다시 전환점을 맞는 일에 맞닥뜨리고 만다.

“혜석?”
나는 이제 문을 닫으려는 저녁 시간, 낮게 스며드는 붉은색 석양을 등지고 긴 그림자를 만들며 서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환영일까.
여자는 여전히 짧은 단발머리를 했고, 긴 검정 치마에 역시 긴 겨울 코트를 단단히 여며 입은 모습이었다. 검정색 긴 목을 가진 장화에 거리의 눈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혜석씨?”
그림을 보고 서 있던 그녀가 돌아섰다.
“오랜만이네요, 사토씨.”
혜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나는 가슴이 덜덜 떨려서 그녀가 내 상태를 알까 두려웠다.
“어, 어떻게 여기 왔어요? 학교는?”
“중단하고 들어왔어요.”
아. 나는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혜석은 그림들을 하나씩 음미하듯 구경하면서 천천히 전시장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내게로 돌아서더니, 멍하니 선 나를 바라보며 내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문 언제 닫아요?”
나는 바보처럼 경직되어서 대답했다.
“지금 닫습니다.”

독한 술을 시켜놓고 창가에 마주 앉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벌거벗은 나무들을 잡아 흔드는 황량한 거리를 내다보면서 둘은 잠시 침묵했다.
“사랑을 해도 외롭다는 걸 배웠어요.”
한참이 지난 뒤에 혜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의지가 되어주지는 않더군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가 말하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조선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태어나면서부터 몸종으로 신분이 정해져 있는 것과 같아요.”
독한 술을 거침없이 마시고 입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혜석은 피식 내게 웃음을 보냈다.
“그러니까 조선의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라 안에 반 정도의 몸종을 가지고 있는 거죠.”
나도 술을 마셨다. 독한 위스키가 가슴을 타고 위장까지 흘러내렸다.
“남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겠죠.”
“너무 부정적이십니다.”
술기운이 내게 말할 용기를 주었다.
“그렇지 않은 남자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게 꼭 조선에 국한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런가요? 어째서 누구는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누군가는 달라도 세상은 용납하지 않을 텐데요?”
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내 나름대로 알아낸 바로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최승구는 이미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다.
“최승구 씨를 따라서 귀국한 겁니까?”
“하하.”
혜석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그렇게 보여요? 사랑하는 남자 따라서 다 포기하고 귀국할 만큼?”
“아니면 어째서…”
“아버지가 그만 귀국해서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 난리셔서 돌아왔어요. 더 이상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협박을 해서요.”
“학비라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안에서 제동이 걸려왔다. 또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다.
“아, 아닙니다.”
혜석이 나를 노려보면서 소리없이 웃더니, 다시 독주를 벌컥 들이켰다.
“내가 꼭 사토씨를 사랑하고 사토씨 여자가 되어야만 사토씨는 내 친구가 되어주겠지요? 그게 남자들이 내세우는 거니까. 여자는 반드시 내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
“어째서 그런…”
“그렇잖아요? 그냥은 절대로 내 편이 되어주지 않겠죠? 일본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포함된 뜻을 몰라서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으면, 살을 섞지 않으면…”
“그래도 됩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권총을 들고 찾아간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녀를 소유해야만 하는 욕정에 불탔던 건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혜석씨의 몸을 탐한 적이 없습니다.”
혜석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사토씨는 내 친구가 좀 되어주세요.”
“내가 혜석씨의 여자친구가 되어주는 겁니까?”
“아니. 내가 사토씨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내 남자친구로, 연인이 아니고도 남자친구가 있을 수 있다면 좋겠어.”
나는 그녀가 너무 손을 꽉 쥐어서 움찔 놀랐다. 그리고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가 진심으로 친구를 원한다는 걸 알았다.
“나, 너무 힘들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만 입을 꼭 악다문 표정이 그렇게 느껴지게 했을 뿐이다.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지르지 않아도, 일그러진 표정이 되지 않아도 아픔을 느끼게 하는 표정이 있다. 혜석은 그렇게 강하게 고통을 억누르고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마주 쥐었다. 꼭 내 소유가 아니어도 좋다. 들녘의 꽃을 꺾어다가 내 방 안의 화병에 꽂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녀를 만나고 그녀와 대화하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나는 그녀가 내게 의지하는 게 무엇보다 좋아서 다른 조건은 거들떠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와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은 아니니 감지덕지했다. 비겁하고 한심하지만, 정말 그렇게라도 그녀의 지척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와 친구가 되어서 지낼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오히려 더 괴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괴로움으로 인해서 식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