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코스모스

10. 각자의 길

누구나 언젠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혜석이 결혼을 한 후에, 그녀는 그녀대로 왕성한 활동을 해서 화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남편 김우영도 역시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 사건의 변호로 인해 명성을 날렸다. 당시의 나는 조선에서 발간되는 모든 신문을 읽을 수 있었기에, 신문지상을 통해서 혜석에 대한 기사와 글들을 많이 접했다.
도쿄에서 그림 공부와 전시회 준비를 마치고 돌아간 혜석은 21년 봄에 경성에서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서양화 개인전시회를 열었는데 관람객만도 무려 오천 명을 넘었다고 했다. 아직 서양화가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의 조선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전시한 그림들은 전부 유화였고, 그림 중 <신춘>이라는 유화는 무려 350원에 판매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조선의 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민족미술단체에서 여는 서양화가전에 역시 같은 유학파인 고희동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거기서도 혜석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세상과 언론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그해는 혜석이 첫아들까지 얻은 좋은 해였다. 혜석은 화가로 인정받았고, 특히 그녀의 글은 종종 여러 잡지에 실리면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들이 혜석으로 인해 갑론을박이 일어나는 일도 많았다.
가을이 되어서는 김우영이 외무성의 부영사가 되어 만주의 안동현으로 부임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저 공문상으로 안 것일 뿐,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한 나는 좀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혜석이나 김우영이 일본의 관리로 일할 리가 없는 인물이어서였다. 특히 김우영은 조선의 독립투사들을 변호해서 유명해졌는데, 어떤 경로로 부영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내막은 모종의 사건이 터진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터진 의열단 사건에 혜석의 부부가 연루되었다. 의열단의 일원인 문시환이 황옥경부를 폭파하려고 폭탄가방을 들고 가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체포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의 신원증명을 김우영이 해주었다는 것이다. 김우영은 외교관 특권이 있었으므로 그의 보증서만 있으면 검문도 없이 마음대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은 결국 가볍게 끝났지만,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부부가 영사관에 있으면서 독립투사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우영은 혜석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것이고, 혜석은 당연히 독립투사들을 도왔을 것이다. 외교관의 신분을 이용하면 많은 독립투사들을 감춰주고 자금이나 총포류를 운반할 수 있다. 혜석은 어느 일이든 달려들어서 해내는 성격이고, 위험을 능히 감수할 배짱도 있는 인물이니까 당연히 일어날만한 일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혜석에 대한 비공식 기록을 들춰보게 된 나는, 그녀가 만주에서 야학을 열어서 조선의 부녀자들을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그녀의 활동이 흐뭇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더 접근하거나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를 먼발치에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즈음에 나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외무성에서 지위가 올라간 만큼 일도 많아지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하는 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관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도쿄에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혜석과 헤어져 있게 되고, 혜석을 지켜주지 못하고 마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관동대지진은 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1923년 9월 1일. 잊을 수 없는 그날에 도쿄는 불바다였다. 나 역시 외무성 건물이 흔들리는 바람에 놀라서 밖으로 대피해 나왔다. 중요한 서류들을 빼내느라 길바닥에 외무성 자동차들을 모조리 대어놓고 정신없이 움직였다. 이미 길은 불바다였고 건물들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무너져 있었다. 사상자가 속출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관리로서 내 책임을 다하고자 정신이 없었다. 저녁 해가 지고 밤이 와도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다행히 집안 식구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만 연락으로 알았다.
며칠을 꼼짝도 못하고 일한 후에, 며칠 만에 해가 지는 때에야 집에 들르려고 나섰다. 차가 있었지만, 차로 길을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길은 걸어서 다니기도 힘이 들었다.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무너져 내린 폐허들 속에서 울부짖고 흐느끼는 소리들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아비규환보다도 더한 지옥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본교를 막 건너려던 때였다.
“잡아!”
“죽여!”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리 아래의 소란 속에서 불쑥 피투성이의 한 사내가 다리 위로 튀어 올라왔다. 사내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머리 한쪽이 깨져서 호흡에 따라 피가 벌컥벌컥 솟구치고 있었다.
“이, 이보시오. 다쳤소?”
말하는 순간, 다리 아래에서 몽둥이와 쇠사슬을 든 사내 몇이 더 뛰어 올라왔다. 그러더니 사내와 나를 보고 냅다 달려왔다.
“조센징! 어딜 달아나?”
사내는 허겁지겁 내달렸지만, 부상이 심해서인지 얼마 가지 못하고 다리가 꼬이면서 나뒹굴었다. 뒤따라서 달려온 사내들이 몽둥이로 퍽퍽 사내의 전신을 내려쳤다. 나는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유를 알아야겠기에 물었다.
“이, 이보시오. 무슨 짓들이오?”
그러자 한 사내가 살벌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조센징이냐?”
“일본인이오.”
“십오 엔 오십 전.”
“뭐요?”
“십오 엔 오십 전 말해봐!”
“십오 엔 오십 전.”
“일본 사람 맞군. 조심하시오.”
사내들은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맨 뒤의 두 사내가 죽은 사람의 두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조센징 사냥하는 중이니까 같이 하지 않으려거든 갈 길이나 가시오.”
“조, 조센징 사냥?”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내들이 내려간 다리 아래로 나도 따라서 내려갔다. 그리고 개울 옆을 본 순간,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그곳에는 무수한 시신들이 처참하게 줄지어 눕혀 있었다. 머리가 부서져 죽은 사람부터 배가 찢겨서 내장이 흘러나온 자, 팔다리가 돌아가 있는 자 등이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일부는 아직 죽지 않아서 울면서 두 손을 모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빌었다. 사내들이 가차 없이 곡괭이로 등을 찍어서 고꾸라뜨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앞쪽에 헌병 둘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헌병들은 아까의 사내들을 향해 오면서 물었다.
“이게 다 조센징들이오?”
나는 반사적으로 헌병에게 달려가면서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헌병들이 흘끗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서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있지 않소?”
사내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냐. 조센징을 처단하는 거야.”
“이보시오. 조선인은 사람이 아니오?”
헌병이 나를 한쪽으로 잡아끌려고 했다.
“선생. 이쪽으로 좀 오시오.”
“저 사람들 뭐요?”
“자경단이오.”
“자경단? 그게 대체 뭐요? 언제, 누가 만들었소?”
“어제부터 활동하고 있소.”
“무슨 자경단이오? 구급대 같은 거요?”
“이 양반 통 세상 소식 모르네.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났길래 이렇게 먹통이오?”
나는 신분증을 꺼냈다.
“외무성에 있소. 건물이 반파되는 바람에 중요 서류들을 안전하게 보관하느라 며칠 움직일 수 없었소.”
“그렇다고 신문도 안 보십니까?”
옆의 헌병이 거들었다.
“위험하니까 어서 가보시오.”
나는 흥분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소? 정부의 관리로서 묻는 거요.”
손가락질을 하던 나는 그 방향에서 지금 막 일어나는 끔찍한 광경에 그만 말을 끊고 정신없이 돌진했다.
“무슨 짓들이냐? 이 새끼들아!”
달려들던 나는 뒤통수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면서 내 눈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죽창에 찔려서 쓰러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삐잇.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헌병들의 고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사람은 안 돼! 바보들아!”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차는 어쩌고 걸어서 옵니까?”
동생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깨지듯이 아팠다. 나는 동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를 누가 데려온 거냐?”
“헌병대에서 아버지 쪽으로 연락이 왔어요. 헌병대 대장이 형님이 일반 관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연락했더군요.”
나는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머리가 바위 같아서 도무지 들 수가 없었다.
“누워 있어요. 죽을 뻔한 거 아세요?”
“내가 어떻게 하다가 다쳤는지는 알고 있냐?”
“헌병대장이 설명해주었습니다. 형님이 자경단 일을 방해했다고요.”
“자경단이 대체 뭐냐?”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우물에 독을 넣고, 방화를 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급조한 단체입니다.”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나온 거냐? 조선인들에 대해서라면 우리 외무성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데, 우리한테는 그런 보고가 들어온 바가 없다.”
동생이 신문을 한 장 내밀었다.
“외무성은 신문을 안 보나 보지.”
신문을 받아든 나는 황당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비밀리에 결사조직을 만들어서 건물에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는 헌병대장의 발표였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인이라면 무턱대고 학살을 하는 거냐?”
“무턱대고 할 리가 있습니까?”
“무턱대고 했어!”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소리 질렀다. 두 손으로 감쌌는데도 머릿속에서 찌르르 하는 격통이 일어났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라면 일부의 착오나 그런 거야 지금 시국에서 얼마든지...“
“어린아이도 착오냐?”
나는 냅다 소리를 질러버렸다. 동생은 경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천황폐하를 지키고 높으신 나으리들을 지키는 곳이 경무국이다.
“눈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니면 눈은 있는데 감아버린 거냐?”
동생도 지지 않고 소리 질렀다. 보기 드문 행동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생은 절대로 내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었다.
“밖을 보고 말해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라는 말입니다. 형님이 이렇게 좋은 침대에서 누워 계시니 모르시는 것 같은데, 당장 이 병실문을 열고 나가서 보시라고요. 도쿄에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게 이유가 되냐?”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치료가 끝나고 병원을 나설쯤에는 이제 세상이 좀 더 분명해졌다. 수십만이 죽고 다쳤으며, 조선인 학살은 성난 민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 가족에게, 일본이라는 나라에, 이 세상에, 깊이 실망했다. 나는 외무성을 사직하고 화구 하나만 달랑 집어들고 고베 항에서 배에 올랐다. 어디든 멀리만 갈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장 멀리 가는 배는 유럽행 배였다. 먼 항해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배가 수에즈를 지날 때쯤에 문득 혜석이 생각났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일어나는 것을 혜석은 알고 있을까? 모를 것이다. 조선인은 아마도 당분간 일본 열도로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서 그녀가 몰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