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서양화를 그리는 여자


경성의 신문들이 앞다투어 그녀의 소식을 실었다. 그녀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서양화를 그린 여자였다. 그녀의 글이 신문에 실리고, 그녀의 귀국 소식을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맞이하는 듯이 다루었다. 그렇게 관심이 집중 되어, 혜석은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혜석이 귀국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별세였다. 갑자기 집안을 도맡게 된 경석은 예전처럼 사상에 빠져서 헤매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집중해서 혜석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던 듯하다. 원래는 위로 형이 있었지만, 큰집에 양자로 가버린 바람에 경석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래도 경석은 꽤 사업수완이 있고, 집안의 재산을 지켜가면서 잘 하는 듯했다. 본래 대대로 고위관리직을 유지한 집안인 관계로 상당히 재산이 많았다. 혜석의 사촌은 학교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혜석이 나온 학교도 바로 그 학교였다.
문제는, 경석이 예전처럼 혜석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평소의 이상을 보아서도 그럴 리가 없다 싶은데도, 경석은 혜석에게 아녀자로서의 본분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수원에 내려가서 혜석을 만나게 되거나, 혹은 경성으로 온 혜석을 만나면, 그녀는 항상 아버지와 오빠의 똑같은 점을 발견했다며 속이 상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조선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걸 알았어. 배우든 배우지 못했든, 이상이 어떻든 사상이 어떻든, 사회주의자든 무정부주의자든, 여자에 대해서는 딱 한 가지 관념만을 가지고 있어.”
“어떤?”
“남자의 부속물.”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도쿄 유학시절부터 그녀는 언제나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지냈다. 조선의 유학생들 중에서 그럴싸한 인물들은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화가였지만, 글 꽤나 쓴다는 유학생들은 죄다 그녀에게 빠져서 지냈다. 물론 그녀는 화가면서도 조선의 어느 여자보다도 글을 잘 썼다.
“심사들이 괘씸하잖아.”
괘씸하기는 하지. 조선이나 일본이나 그런 면은 같다. 일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서양 문물을 들여서 겉모습은 서양식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막부시대의 여자를 경시하는 속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혼사 이야기 많이 나오나 보지?”
“나오지. 그림이나 그리면서 늙을 거냐고 성화가 시작되었지.”
“그 사람…”
“그 사람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못해. 자기가 소개해줘서 안 사람인데, 그걸 후회하는 눈치야.”
나는 여전히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경석을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경석은 여동생의 교육을 위해서 자기 눈에 괜찮다고 느껴지는 학생들을 소개했을뿐이지 남녀 간의 교제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훌륭한 교육 받고 돌아와서, 훌륭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집안에 훌륭한 자랑거리가 되는 걸 바란 것은 아닐까. 그저 화가에다가 신여성이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혜석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런 일에는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분위기에 질식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을 집에서 마련해준 화실에서 그림에 매달려 지내면서, 잔소리들에 귀를 막고 지내는 것 같았다.
“지겨워. 사방에서 혼사 이야기가 들어 와.”
그녀는 집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차가운 봄비가 무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던 오후였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도 이마까지 내려온 먹구름으로 인해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바람까지 불어서 차가운 빗줄기가 사방으로 흩날리던 날이었다. 도무지 봄날이라고는 보지 못할 날씨였다.
공관에서 일본 화가의 경성전시회를 준비 중인 나는 밤이 늦도록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날씨가 험해서인지 다들 일찍 핑계를 만들어서 나가버리고 혼자였다. 그때, 덜컹 문이 열렸다. 그리고 혜석이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나타났다. 그녀의 전신에서 바닥으로 물이 줄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우산도 없었다. 하긴 우산이 있었어도 오늘 같은 날은 소용없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혜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온몸을 떨면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저체온이라도 일어난 듯이 얼굴은 한없이 창백했다. 시선은 무엇에 홀린 듯 허공의 한 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경성에는 어떻게 올라왔어?”
혜석은 등으로 문을 기대서더니 덜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엇?”
나는 놀라서 일단 수건을 찾아 달려갔다. 그리고 수건을 몇 개 구해서 가져다주었다. 혜석은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를 털어주면서 물었다.
“왜 이 모양인데?”
“그 사람…”
“응?”
“죽었어.”

혜석은 밤이 늦도록 울었다. 나는 불안해서 그녀를 그냥 보내지 못하고 차로 수원까지 바래다주었다. 수원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도 그녀는 슬프게 울었다. 나도 울고 싶었다.

다음 날, 나는 짐을 꾸렸다. 내 안에 달리 변화가 온 것은 아니지만, 내 무미건조한 생활이 갑자기 징그러워져서였다. 밤이 새도록 우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저렇게 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자각이었다. 울 일도 슬플 일도 없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러지 말자. 이제는 정말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멀리 밀어두고 싶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 시간 이후로 절대, 어느 남자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세월이 흘러도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느 남자도 사랑하지 않는 그녀의 앞길을 내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다는 건 너무 불안한 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불안해 보였다. 강하고 멋진 여자가 아니라, 불안하고 위태로운 여자로 느껴졌다. 내가 그 불안에 끼어들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그녀처럼 내게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게 인생의 스승과도 같았다. 사랑의 아픔을 알게 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지를 일깨워주었다. 그래야 하는 거야, 인생은. 내게도 무언가 중요한 게 존재하겠지. 그걸 찾아야 하는 거다.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하고 짐을 꾸렸다. 혜석에게 들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녀의 슬픔은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그 슬픔을 마음껏 향유하라고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대로 무언가 새로운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 떠나자고 생각했다. 먼저 도쿄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가족이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경성을 떠났다.

그 해 가을, 나는 도쿄 외무성에서 일하게 되었다. 외무성에는 외교관들과 군인들이 반 정도 섞여서 돌아가는데, 그 가운데에서 나는 영사관의 문예부문을 맡았다. 비교적 한가하고 편안한 자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료직인지라 매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발을 잘못 들였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생은 내가 외무성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도로 무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미있어?”
“아니. 재미없는 일이야.”
“그런 일 할 것 같지 않았는데.”
“나도 나이가 차서 뭔가 해야 하니까.”
“주로 어떤 일을 하는 거야?”
“경성에서 하던 일하고 같아.”
오랜만에 경성에 출장을 오면 가끔 혜석을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고는 했다. 혜석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발표하면서 지냈다.
“나, 요즘 연애하는 것 알아?”
“아하, 김우영 씨?”
“알고 있었어?”
“도쿄 있을 때 자주 만났다고 들었어.”
“그 사람은 교토에 있었어.”
“그 정도 거리가 문제는 아니지, 남녀 사이에.”
“그렇기는 하지. 오히려 좋았을지도 모르겠어. 지척에 딱 붙어 있을 때보다 자유롭기도 하고.”
“그런 면도 있겠다.”
“어떤 거 같아?”
“경석이 소개했다고 했지?”
“응. 소개한 사람들 중에 제일 낫기는 한데…”
“법학을 공부한다고 했던가?”
“그래. 그 사람한테 어울리는 공부야.”
혜석은 언제나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반듯하고 마음도 넓고 그래. 다만, 너무 격정적이어서 흥분하면 철없는 아이처럼 돌변하니까.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어.”
“너, 결혼까지 생각하는구나?”
“글세, 조르기는 하는데… 난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그 정도 생각한다면 이제까지 본 남자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혜석의 웃음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그러니까 최승구가 죽은 뒤 처음으로- 맑은 웃음이 보였다. 그건 어쩌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웃음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혜석에게 보통의 여성들이 가지는 그런 천진난만한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그녀 자체로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나혜석은 다른 여자들처럼 남자가 옆에 있어서 빛을 내는 여자가 아니다. ‘누구의 여자 나혜석’이 아니라, ‘나혜석의 남자 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게 쉬울까. 그녀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서양화를 그린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