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번쩍이는 눈을 가진 여자


1913년 겨울. 유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성탄절이라는 새로운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난생처음으로 공산당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상적으로 공산당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친한 친구 나카다의 부탁으로 그저 동행이 되어주려고 갔다고 보면 옳겠다.
나카다 역시 공산당원은 아니었는데 그는 무정부주의에다가 프랑스에서부터 일어난 산업협동조합 운동에 관심이 깊었다.
“오늘 거기 가면 멋진 친구를 만나게 될 걸세.”
나카다는 마치 여자라도 만나는 듯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나카다가 말하는 친구는 나도 역시 알 만한 친구였다. 나카다나 나와는 달리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워낙 유명한 운동가여서 우리 미술학교에도 이미 이름이 전해져 있었다.
나경석. 도쿄의 유학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친구였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집의 경석은 공산당 집회에 모인 어느 누구보다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의 강렬한 눈빛과 강하고 단정적인 어투는 좌중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다들 혁명, 혁명 하는데, 도대체 혁명으로 윗분들이 바뀐다고 해서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무엇이 바뀐다는 말입니까?”
공산당원들은 같은 학생들끼리라고 해도 보통 무서운 작자들이 아니어서 웬만한 인물이 아니면 그런 어조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모여 있던 삼십여 명의 당원들은 어느 누구도 말을 막지 못했다.
“주인이 바뀌어도 하인은 그냥 하인일 뿐이고 주인은 그냥 모양만 바뀐 주인일 뿐이 아니오?”
반론이 시끄럽게 튀어나왔다.
“다 주인이 될 수 있다.”
“공산주의 세상에 어째서 주인과 하인이 존재하겠는가?”
경석과 당원들의 시끄러운 토론은 길어지고, 나는 지겨워져서 슬그머니 자리를 떠버렸다.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워 물고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하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 사상도 마음에 든 적이 없다. 다만 나는 내 친구들이 좋았고, 내 가족과 형제들이 좋았다. 그 이상의 민중이니, 민족이니, 천황이니, 하나도 귀하게 여겨지거나 애착이 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한 것은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배를 채울 수 있는 약간의 여유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잘나가는 높으신 정치가 집안에 태어난 덕에 그런 환경을 만들고 지낼 수 있었다. 돈이 되지 않는 그림이나 그려대면서도 살아가는 데 불편한 점은 없었다.
“야타.”
집회 장소를 나오면서 나카다가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로 유명한 경석이 모습을 나타냈다.
“인사들 하게. 이쪽은 나경석. 이쪽은 사토 야타.”
경석과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우리는 첫눈이 내리는 골목을 내다보면서 뜨거운 청주를 마셨다. 서로 처음 만났지만 경석과 나는 금방 친해져서 오래된 친구처럼 하대를 하고 농담도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취기가 오르자 경석이 물었다.
“친구는 왜 도중에 나와버렸나?”
“난 그런 토론이 질색일세. 사실 자네가 궁금해서 온 거지 집회가 궁금한 게 아니었네.”
경석이 웃어버렸다. 나카다가 옆에서 내 대신 거들었다.
“이 친구는 그림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친구일세. 집안에서도 아예 내놓은 자식이지.”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내게는 관심이 있다는 게 신기하구만.”
“아, 그건 별개니까.”
나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난 내 그림 속 세상에 이 바깥세상을 옮겨놓을 때마다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만 옮기네. 그런데 항상 그림 속에는 산과 들과 꽃과 구름과 물만 존재하지. 나머지는 정말로 화폭에 옮겨 담기 싫다는 말일세.”
“어어? 자네 친구들을 그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카다가 내 손을 찌를 듯이 젓가락을 휘둘렀다.
“그랬지. 하지만 그 또한 집회를 할 때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모여 앉아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그리겠네.”
“주로 술 취한 모습이겠군.”
경석이 웃으며 하는 말에 셋이 모두 킬킬 웃었다.
“맞는 말이야. 빌어먹을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우리는 술을 마셔야 해.”
나카다가 더운 술을 벌컥벌컥 단숨에 마시더니,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술 만세! 천황 만세! 내 친구들 만세! 우리집 개도 만세!”
순간, 술좌석의 사방이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천황을 욕한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사내 둘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나마나 특고 아니면 헌병이다. 요즘은 헌병 놈들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
“튀어.”
나카다의 한 마디에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달렸다.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에 그릇이 깨지고 의자가 넘어갔다. 술집을 나서서 죽어라고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나카다가 따라오다 말고 돌아서서 술집을 바라보고 있다.
“뭐야?”
알고 보니 경석이 달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망했다. 왜 안 나온 거야?”
나는 나카다와 함께 도로 술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술집 안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로 뻣뻣하게 서서 사내들을 노려보는 경석과 무섭게 경석을 노려보면서 이제 막 주먹이 날아갈 듯한 사내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희들. 학생이면서 천황폐하를 모욕하나?”
사내는 확실하게 헌병이었다.

셋이 나란히 경찰서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경석은 그 뻣뻣함 때문에 우리 둘보다 더 맞았다. 얼굴 모양이 확실하게 변하도록 두들겨 맞은 다음, 반성문을 쓰는 차례가 되어서 다시 경석이 반성할 게 없다고 개기는 바람에 잠시 단체로 차디 찬 유치장 안에 쪼그리고 앉아야 했다.
나카다가 경석을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야. 반성문 백 장 쓰면 뭐가 어떠냐? 오늘 해 뜨기 전에 얼어서 죽겠구만.”
경석은 말없이 자기를 때린 헌병 놈만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헌병 놈이 다시 와 때릴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나는 처음으로 정말 경석이 마음에 들었다. 몇 대 얻어맞기 싫어서. 학교생활에 지장이 생길까봐 저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닫고 지내는 비겁한 학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나라를 빼앗긴 채로 눈치나 보면서 지내는 조선 유학생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날 밤, 경석은 울분이 가득한 얼굴로 얼음창고 같은 유치장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집에서 사람이 오고, 셋이 나란히 풀려 나오면서 그제야 셋은 다시 킬킬 웃었다.
“어이, 나경석. 너하고 다니다가는 제명에 못 살겠다.”
나카다가 경석의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나는 경석의 허리춤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나 동상 걸린 것 같아. 손 좀 녹이세.”
경석은 허리춤에 매달린 나를 돌아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제야 울분이 사라지고 다시 밝고 넉넉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에 경석과 나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어울려서 돌아다녔다. 특히 우리가 다닌 곳은 오스기 사카에가 주도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집회였다. 나는 경석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도 좋았지만, 특히 집단적인 광기로 몰려가는 일본에서 천황과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오스기 사카에의 사상에 매료된 바가 컸다.
서로 국적이 다르고 처해 있는 상황이 달랐지만, 경석과 나와 나카다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했고 다 같이 무정부주의에 깊이 빠져있었다.
특히 나와 나카다는 경석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하는 활동에 대해 이해했다. 내가 조선인이라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립운동가들과 우리는 지향점이 많이 달랐다. 우리가 원하는 ‘생 디 카리즘’은 말하자면 아나키즘이었다.
우리는 무정부 상태의 자유로운 인간세상을 그렸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물든 현대인들이 듣기에는 꿈같은 소리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젊은 날의 이상향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신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다들 신학기로 인해 들뜬 기분이었지만, 나는 새로운 그림에 몰두하느라 신학기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봄볕이 따뜻하고 햇살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복잡하고 한심한 인간 세상을 외면하고 교외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느라 시절 가는 줄 몰랐다. 경석은 잠시 귀국했고 나카다는 그사이에 한 차례 경찰서 신세를 더 지기도 했다.
화구들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 나카다가 서성이고 있었다.
“자네,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왜 문 앞에 서 있나?”
나카다가 이 층을 턱짓하며 싱긋 웃었다. 아.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내가 경찰서에 끌려간 이후로 나카다와 경석을 불량한 친구로 분류했다. 그래서 내게 젊은 날의 세상 경험도 좋지만, 이제 그만 그들과 멀어지고 네 앞길을 걸으라고 강요했다. 게다가 화가가 되는 내가 싫어서 자꾸만 정치 쪽이나 관리 쪽을 종용하고는 했다.
“그림은 취미로 좋다.”
그 정도로 예술을 치부해버리고 사내는 나랏일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노인네다. 그렇지만 역시 사내니까 어느 정도는 네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고, 친구들과의 교류도 어느 정도 용인은 하는 편이었다.
사실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나오는 때에도 그저 세상은 그런 거다라는 식으로 씩 웃어넘기고 말았다. 내심이 어떻든 아들이 무언가 줏대 있게 행동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기는 했던 듯하다.
“들어가세.”
“아니. 경석이 오늘 도착하는데 같이 가지 않으려나 싶어서.”
“어? 그런가?”
나는 화구들을 집에 들여놓고 다시 나와서 나카다를 차에 태웠다. 평소에는 외무성에 근무하는 동생이 주로 몰고 다니는 차지만, 가끔은 내가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사용하고는 했다.
“벌써 하숙집에 도착했으려나?”
“아마 그럴 걸세. 그저께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고 했거든.”
“이번에는 여동생도 데리고 온다더니.”
“여동생이 화가라고 들었네.”
“아. 동양화를 하는구나.”
“아니. 자네하고 같아. 서양화.”
“어? 조선 여자가?”
“이 친구, 경석이 들으면 한 소리 하겠구만.”
“방금 내가 한 말, 취소일세.”
경석은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친구였다. 그리고 정말 여자 친구들이나 동지들을 대할 때도 남녀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에 서양화가라니. 그것도 여자 서양화가라니. 역시 경석의 여동생이라 다른 것인가.

경석의 하숙집에 도착하자, 역시 경석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짐을 풀고 청소를 하던 경석에게 고향에서 가져온 술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데, 경석이 일단 칸다에 갔다 와야 한다고 해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칸다에 누가 있길래?”
“코이치 선생님 댁에 가네.”
“그 선생님 댁에는 왜 가는데?”
“거기 내 여동생이 있네.”
“뭐라구? 자네 여동생이 거기는 왜?”
“일본 생활이 처음이니까 누군가가 돌봐줄 필요가 있어서 말일세. 특별히 코이치 선생님께 부탁드렸네.”
“그 집에 하숙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음, 사모님이 우리 조선말을 좀 하시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일세.”
“아, 가보세. 가봐.”
우리는 가는 길에 선생님께 드릴, 콩을 넣어서 구운 센베를 샀다. 나카다와 나는 잘 모르는 경석의 중학교 선생님이어서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고 경석 혼자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카다는 차에서 졸고 있고, 나는 차에 기대 서서 무료하게 목조주택들로 이어진 복잡한 골목길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불쑥 경석이 나왔다. 그리고 경석을 따라 나오는 한 여학생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인사들 나누지? 내 동생일세.”
“어어.”
나는 멍청이처럼 뜻 모를 신음을 내뱉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기 전에는 소박한 조선의 여학생을 상상했다. 그냥 선입견으로 약간은 촌스럽고 수줍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서양식 옷차림새에 검정 에나멜 구두를 단정하게 신고 머리를 짧게 땋아 내린 그녀는 더없이 단아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혜석이에요.”
“사, 사토입니다. 사토 야타.”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녀의 눈은 너무 번쩍여서 눈동자에서 빛이 나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 빛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서, 나는 저절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나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그녀 앞에 서서 그녀의 시선에 잡히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였다. 그녀는 번쩍이는 눈빛을 가진 여자였다.

“제 화실로 놀러 오십시오. 그러면 여러 가지 도구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술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내 화실로 올 구실을 만드느라 진땀을 뺐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사회의 장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경석과 나카다의 이야기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제발이지 두 사람은 이제 어디론가 증발해버렸으면 소원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도쿄의 화구상들은 꽉 잡고 있습니다.”
“네. 부탁드릴 일이 있으면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좀 거리를 두는 듯했다. 그래서 조바심에 더욱 매달리다시피 강권했다.
“조선에서부터 화구를 전부 싣고 오셨나요?”
“화구라야 별것은 없습니다. 변변한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어서요.”
대화하는데, 나카다가 갑자기 말했다.
“아, 정말 우리 혜석 씨 글 잘 읽었습니다. 화가보다는 문필가가 어떨까 싶었어요.”
뭐? 나는 나카다와 혜석을 번갈아 보았다. 글을 읽다니. 나카다가 그녀의 글을 읽었다는 말인가.
“그저… 학교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신문에 실릴 줄은 몰랐어요. 부끄럽습니다.”
“일본어였나?”
나는 바보 멍청이처럼 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혜석이 일본어를 잘하기는 해도, 조선의 여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답게 당연히 조선말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나카다는 조선말을 한다.
“조선말이었네.”
나카다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나카다가 얄미워서 욕이라도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오늘부터 당장 조선말을 배워야겠다.
“아, 어서 조선말을 배워서 저도 꼭 읽어야겠습니다.”
내 말에 나카다가 신기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공부라면 지겹게 싫어하는 자네가 웬일로…?”
“공부가 싫은 게 아닐세. 난 그림을 그리느라 바쁜 거지.”
경석이 끼어들었다.
“그림에는 국적이 없지.”
“맞아. 맞아.”
나는 경석이 오늘 먹고 마시는 모든 술과 요리 값을 낼 의향이 있었다. 애초부터 그럴 의향이 있었는데 -그녀가 있으니까, 그녀 오빠니까- 거기다가 말까지 이처럼 예쁘게 해주니 집에 가서 먹을 것까지 싸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전시회가 자주 열리니까 시간 되실 때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아, 도쿄에 오면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와하하하. 나는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정말 바보처럼 웃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열심히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끔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신학기 내내 학교생활에만 전념하는 듯해서 쉽게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내 앞에는 더 심한 난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집 안에서 내가 동생처럼 외무성으로 들어가기를 강요해서 매일 들볶이는 나날이었다.
“일단 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그림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학업을 게을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들어보니 조선말을 열심히 배운다던데 거기 딴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언제고 필요할 것 같아서 배우는 겁니다.”
“혹시 전에 함께 어울렸던 그 조선 친구 때문은 아니냐? 그 친구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멀리하는 게 좋겠다.”
“제 친구들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자꾸 그렇게 나온다면 네 친구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명심해라.”
아버지의 말씀은 곧 협박이었다. 여러모로 경석은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경석만이 아니라, 나카다처럼 오스기 사카에를 추종하는 모든 학생들이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나 역시 거기에 포함이 되어야 했지만, 나는 그런 일들보다는 그림에 열중했고, 특히 집안이 친구들과 달라서 일단 제외해놓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오히려 친구들과 나를 멀리 떨어지게 했다. 친구들이 입장이 다른 나를 알게 모르게 멀리한 까닭이다.
나는 다른 부분은 다 그래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에만 열중했지만, 그러나 아무리 담담해지려고 애를 써도 나혜석이라는 여자만큼은 담담하게 떼어놓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 한 번 보았을 뿐인 남자가 불쑥 그녀를 찾아가기도 이상하고 해서 마음을 졸이며 지내는데, 한여름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자네 몰랐나?”
“몰랐네. 그 선생님 딸이 자네와 교제를 하다니.”
동갑내기 외사촌 형제인 시모무라가 코이치 선생의 딸 나미에와 교제를 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나미에는 음악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으로 혜석과 아주 친하다는 이야기였다.
“나와 함께 그 여학생들을 보러 가주게.”
“어째서?”
“내가 사실은…”
나는 나혜석에 대해서 깊게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행여 혜석이 만나주지 않을까 겁이 나서 친구 동생인데 호감이 있다고만 말했다.
“그런데… 자네가 만일 그 여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말리고 싶은걸?”
“어째서?”
“그 여학생은 이미 도쿄의 유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여학생이 아닌가? 내로라 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서 그녀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는 판에 일본인인 자네가 끼어들 수나 있을까? 게다가 혜석의 오빠는 민족주의자 같았는데?”
시모무라의 말에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누가 그녀를 좋아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다 같은 사람이 아닌가? 남녀 간에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그녀의 오빠는 나와 아주 친한 사이였네. 그 친구는 조선민족동맹에서 활동을 하지만, 무턱대고 일본인을 배척하지는 않네. 그 친구가 가장 따르는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인 오스기 사카에 선생일세.”
“어엇? 사촌! 이제 보니 심각한데?”
나는 내 내심을 들켜버려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어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같이 만날 기회나 좀 만들어주게. 그녀들에게는 아무 말 말고.”
“좋아. 내가 사촌을 위해서 큐피트가 되어주지.”
시모무라는 거드름을 피우며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