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비인지 겨울비인지 구분되지 않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바람은 없었지만, 비는 차갑고 공기는 썰렁했다.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봄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춥냐?”
공반장은 수사본부의 책상머리를 떠나 난로가로 가서 손을 들이대며 섰다.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난방 온도가 장난 아니게 낮아서 사무실 안에 몰래 부탄가스를 놓고 땠다.
“남형사 아직 안 왔어?”
모니터를 열심히 들여다보던 팀원들이 고개를 들고 공반장을 쳐다보았다.
“연락도 없고 어떻게 된 거야?”
“잠복 중인 것 같던데요?”
“아는데, 누가 교대라도 해주어야 하는 거 아냐?”
팀원들이 서로 고개를 돌려서 마주보았다. 그러고는 애매하게 다시 공반장을 돌아보았다. 구석진 자리에 고개를 묻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던 영란이 한마디 했다.
“다른 사람은 잠복해야 소용이 없어요.”
“어째서요?”
“남형사님 아니면 사람을 특정 못하죠.”
“특정을 못해요?”
공반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영란을 쳐다보았다.
“신부두파의 스폰서를 아무도 모른다고 해서요.”
“사진도 없나?”
“눈에 익숙하지 않으면 힘들겠죠. 아무래도.”
공반장은 손을 비비면서 그냥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수사본부가 차려지고 한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수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전되었다. 바로 남대운이 저 젊으면서도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여자와 호흡을 맞춰서 수사에 진전을 보고 있다.
수사 초기에는 사건 현장 주변을 온통 뒤지고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현장 외에 더 찾아진 것은 없었다. 주변을 온통 탐문하고 조사했다. 주민이든 여행객이든 빼놓지 않고 신원을 확인했지만, 확인 안 된 건 단 두 사람이었다. 원룸 한곳에 묵던 작자가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고, 레지던스 호텔에서 한 외국인이 체크아웃을 해서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 두 사람은 그다지 별다를 게 없었다. 문제는 사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사라진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바로 신부두파의 중간 정도 위치에 있는 백창수가 사라진 것이다. 전기태와 오석한은 시체가 되었고, 백창수가 사라졌다. 그동안 수사한 결과를 보면 그 셋은 가장 가깝게 붙어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창수도 죽은 것인가, 아니면 백창수가 범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백창수는 은신하고 있는 것인가?
김영란은 분석에 뛰어난 프로파일러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은 사건 현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여러 각도로 재구성해보았다. 그리고 CCTV의 기록을 모두 수거해서 훑어보았다.
CCTV를 훑어보면서 그때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았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레지던스호텔의 주차장에 백창수가 차를 몰고 들어선 장면이다. 봉고차가 들어선 모습만으로는 백창수가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청소부 하나가 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백창수가 운전석에서 문을 열고 내리는 장면이 나왔다. 틀림없는 백창수였다. 청소부는 CCTV의 각도로 인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CCTV가 그다음 장면에서 끊겼다. 녹화가 그다음 부분부터 지워졌다. 봉고차는 그 후로 호텔을 나가서 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봉고차가 멈춘 곳이 바로 사건현장이었다.
놀라움은 거기서 일어났다. 바로 그곳의 CCTV도 그다음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범인은 사건이 끝난 후에 수사팀보다 먼저 곳곳의 CCTV를 손댔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째서 CCTV를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고 중요한 부분만 지웠을까? 그렇게 하는 건 훨씬 힘든 일일 텐데 왜 그랬을까?
이렇게 되면 창수도 당한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게 정상이다. 범인은 청소부라고 특정할 수가 있다. 일단 청소부지만, 혼자라고는 볼 수 없다. 공범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오검사와 모든 수사관들이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김영란 경위만이 단독으로도 가능하다고 우겼다. 그녀는 도로에 중간중간 CCTV가 있다는 것에만 기대지 않고 숨겨진 CCTV를 찾아다녔다. 주변은 가정집과 점포들이 많이 있다. 미술품을 파는 갤러리까지 있다. 영란은 모든 곳의 방범 카메라를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갤러리의 윗층에 있는 CCTV에서 바로 산책하는 듯한 한 사내를 잡았고, 그 사내를 덮치는 범칼과 전기태를 잡았다. 사내는 숲으로 끌려 들어갔다. 저 사내가 누구인가. 머리 위에서 보는 각도여서 셋 모두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실체가 확연해졌다. 영란의 추리는 다른 걸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 사건의 실체를 정리해볼 수가 있게 되었다.
첫째, 산책을 하던 사내를 범칼과 전기태가 덮친다. 칼로 위협해서 숲으로 끌고 들어간다. 둘째, 백창수가 봉고차를 가지고 오기로 되었는데, 청소부가 백창수를 제압하고 대신 가지고 온다. 셋째, 청소부가 차를 세우고 숲으로 가서 범칼을 제압하고 사내를 구한다. 넷째, 봉고차로 왔던 전기태가 운전석이 비었음을 확인하고 다시 숲으로 가다가 제압당한다. 그 부분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따져보아도 확실하다.
정리가 되자,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습격을 당한 사내는 누구이고, 보호한 자는 누구인가? 주변에서 사라진 두 사람이 있으니까 당연히 두 사람이 청소부와 사내일 것이다.
다시 탐문이 시작되었다. 원룸에 장기투숙을 들어왔던 사내가 바로 산책하다 습격을 당한 사내라는 것은 쉽게 풀렸다. 청소부로 변장을 해서 사내를 보호한 자는 레지던스 호텔에 묵었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다만, 두 사람은 전혀 연관성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신분들이었다. 습격당한 사내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나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인물이었고, 호텔에 묵었던 인물은 재미동포로 제임스 킴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호텔에서는 여권을 복사해서 간직하는데, 레지던스호텔에서는 그냥 계약서에 싸인만 했다. 그래서 여권을 확인할 수 없었다. 사내는 양창근이라는 인물로 확실하게 여권을 보여주면서 월세 계약을 했다. 주민등록증이 없다면서 여권을 내밀었다고 한다.
수사팀은 즉시 양창근이라는 인물의 소재를 찾았다. 신변은 당연히 확보하지 못했지만, 그의 가족을 만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사실을 몰랐다. 그의 아내와 딸은 양창근이 여전히 일본에 있을 거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가족은 양창근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즉, 그가 원룸을 계약할 때 내민 여권은 머리치기를 한 여권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다. 호텔과 원룸의 목격자들을 데리고 몽타주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놀라운 증언이 나왔다. 호텔의 직원들이나, 식당의 종업원들이 사내를 많이 본 얼굴이라고 기억했다. 설마 했지만,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닮았다고 했다.
바로 김중식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김중식을 닮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연히 죽은 사람과 신분도 다른 여권을 가지고 있으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인물을 설명하려니까 김중식을 떠올렸다고 했다.
영란은 살아있을 때의 김중식 사진을 가져다 보여주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란은 모든 것을 정리해서 두진에게 넘겼다. 두진은 수사팀에게 일단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고 조용히 신부두파의 끄나풀들을 이용해서 누구든 이번 사건에 대해서 아는 인물을 찾으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기네 중간 간부들이 연루되고 죽은 사건인데, 어느 누구도 그런 사건의 전말을 몰랐다. 아니, 전말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도 몰랐다.
두진은 즉시, 신부두파의 스폰서를 찾으라고 했다. 이런 일은 아주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신부두파의 스폰서가 누구인지조차 조직 내의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유일하게 신부두파의 두목과 스폰서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미행했던 경험을 가진 형사가 있었다. 그게 바로 대운이었다.
일본 야쿠자의 자금이 들어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달려들었던 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스폰서 같았다. 그래서 바짝 달라붙었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난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두진은 모두가 그에게 달라붙도록 지휘했다. 대운이 눈에 뜨이지 않도록 혼자서 잠복에 나섰다. 당시에 살던 곳에 죽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신병이 확보되면 검사인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조직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거물이라면 일개 형사가 가서 입을 열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두진은 수사팀에게 절대 수사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려놓았다. 검사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그에게는 이상한 감이 있었다.
이 사건은 우리 상상보다 크다. 두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영란도 대운도 두진의 생각과 같았다. 공반장도 팀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잘못하면 다치니까 기자들이든, 다른 부서의 친한 동료들이든 간에 수사 내용을 함구하라고 매일 강조했다.
그렇게 숨 가쁜 한 달이 지나갔다.
“내가 가볼게요.”
영란이 옷을 찾아 입었다.
“김경위님이 직접 가요?”
“예. 난 얼굴도 안 알려졌고 여자니까 누가 보아도 커플로 보겠죠. 뭐.”
공반장이 웃었다.
“혹시 진짜 커플이 되고 싶은 거 아니오?”
“내가 부하직원한테 성폭행이나 하는 공직자로 보여요?”
팀원들이 큭큭 웃었다.

영란은 연산동의 큼직큼직한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언덕에서 택시를 세웠다.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자, 모퉁이에 세워진 대운의 차가 보였다.
이 동네는 보통 블록 하나가 집 한 채다. 그래서 거리에는 주차한 차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끗발 좋으신 나으리들이 살아서인지 불법으로 주차하면 즉시 누군가가 달려온다.
그래서 남의 집 담벼락 축대 아래에 세워져 있는 그의 차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생뚱맞게 보이기도 해서 잠복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차로 다가가자 유리창이 내려지면서 대운이 고개를 내밀었다.
“추운데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다 차 대놓고 잠복해?”
“다른 데서는 저 집 차고가 안 보여서요.”
“눈에 너무 뜨이는 거 아닐까?”
영란은 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차고에서 차로 나오고 들어갑니다. 이 동네는 걸어서 다니는 인간들이 없어요. 행상들도 여기는 안 옵니다.”
“왜?”
“아, 원래 부잣집에다가는 뭘 팔아먹을 수가 없어요. 가난한 동네에 가야 공갈도 치고, 사기도 치지. 여기 사는 인간들이 문이나 열겠어요? 또 지나가면서 확성기로 뭘 사라고 떠들다가는 잡혀가서 벌금 물기 딱이죠.”
“여기서 주차 딱지는 안 떼셨고?”
“자꾸 움직이면 됩니다.”
“그랬구나.”
영란은 커다란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냈다.
“고생이 많으시네.”
“뇌물입니까?”
“말 좀 가려서 해. 왜 맨날 뭘 주면 뇌물이냐고 묻는 거야?”
대운이 캔커피의 온기를 두 손으로 즐기면서 싱긋 웃었다. 영란은 이상하게 나이도 직급도 자기보다 아래지만, 형사생활로 치면 자기보다 훨씬 베테랑인 대운이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강직하면서도 절대로 강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그 담담함이 좋았다.
“팀장님은 부모님들께서 걱정 안 하십니까?”
“경찰이라도 거친 일은 없다고 안심시키고는 하지.”
“그런 거 말고요.”
“그런 거 말고 뭘…?”
“꽉 차셨잖아요?”
“남형사도 만만치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해?”
“전 남자 아닙니까? 그리고 두 살이면 스물 하고도 넉 달에다가…”
“날짜로도 세어 줄까?”
“아니. 뭐…”
대운이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기다릴 작정이야?”
“확실하지 않으니 방법이 없죠. 접촉하는 인물들을 먼저 체크하지 않으면 만나봐야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럼 나 와있는 동안 화장실에라도 갔다 와.”
“사실은…”
대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안 계실 때가 더 편했거든요?”
영란이 무슨 소리인가 해서 쳐다보았다. 대운이 전봇대를 손가락질 했다.
“저기다가 큰 것도 봐?”
대운이 영란을 흘겨보았다.
“여자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하여간 똥마초처럼 여자가, 여자가를 입에 달고 사시네.”
어휴. 대운은 머리를 흔들었다. 영란은 대운이 귀엽다. 나이 차는 두 살인데, 왜 그런지 막내 동생만 같다. 막내지만 믿음직한 동생.
같이 수사를 해오면서 둘 다 서로에 대해서 존중하게 되었다. 영란도 경찰에서 보기 드문 브레인이라고 인정을 받았지만, 대운의 수사력도 만만치 않았다. 속도도 뛰어나고 직감도 좋았다.
오검사도 공반장보다 대운을 믿는 눈치였다. 이제 갓 서른이니까 그다지 베테랑이 아니어야 맞는데, 어찌 보면 이런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사건에서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그건 아마도 무력에 힘입은 면도 있는 것 같다. 같이 붙어 다니면서 느낀 것은 대운이 상당한 싸움꾼이라는 점이었다. 배짱도 두둑하고, 폭력배들을 밀어부칠 때 보면 살기를 발산하는 무서운 면이 있었다.
대운이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다가 흘끗 영란을 돌아보았다. 영란이 웃었다.
“피워. 누나가 특별히 봐준다.”
켁. 대운이 사래가 걸려서 담배를 떨어뜨렸다.
“왜 그래?”
“아, 아닙니다.”
대운은 담배를 주워 물고 영란을 돌아보며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근데…”
“응? 왜? 우리 사이에 말 못할 거라도 있어?”
풉. 이번에도 다시 담배를 떨어뜨렸다.
“왜 이런다니?”
“우, 우리 사이라뇨? 전 연상은 절대로…”
“나도 나보다 어린 애송이는 싫어하거든? 그런 거 말고. 같은 팀이잖아? 누나는 팀장, 넌 따까리.”
대운이 담배를 다시 물면서 영란을 흘겨보았다.
“말해.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만일에 말입니다. 만일에. 그러니까 아주 만일에…”
“만일에 뭐?”
“그 가짜 양창근이…”
대운이 말하면서 영란의 눈치를 보았다. 영란이 무슨 소리인지 안다는 듯이 말했다.
“김중식 아니냐고?”
“팀장님 느낌도 그렇습니까?”
“배제하지 않고 있어.”
영란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그러면 진짜 대박이죠?”
“세상이 발칵 뒤집어지겠지.”
“그럴 확률도 있는 거죠?”
“글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는 오검사의 말을 팀원들 누구나 이해하고 있다. 만일 섣불리 새어나가서 기자들이라도 몰리는 날에는, 수사본부는 벌집이 되고 만다. 수사본부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벌집을 쑤신 꼴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대한민국 경찰의 법의학이 그 정도로 엉성하지는 않다.
“비슷한 누구겠지. 설마.”
영란이 대운을 돌아보며 웃었다. 대운은 웃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저기.”
감시하던 저택의 차고 안에서 불빛이 번쩍 했다. 보통 불빛이 아니었다.
“뭐지?”
대운이 튀어나갔다.
“이상해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저택의 차고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은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
“이런, 썅!”
대운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저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영란도 차에서 내리면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전부 연산동으로 와요!”



2.

김중식은 살아오면서 이토록 잔인한 인간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그토록 냉정한 인간도 본적이 없다. 물론 냉정이라고 한다면, 자신 역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건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바로 앞에 앉아서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이 작자는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느껴진다. 완벽한 사이코 패tm. 게다가 엄청난 능력으로 보아서, 그는 어디선가 살인훈련을 받은 게 틀림없다.
자신을 죽이려던 놈은 아주 유명한 칼잡이다. 얼굴을 보는 순간, 부산의 유회장이 아끼는 심복이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기를 바랄 때, 유회장은 자랑스럽게 그놈을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달려오던 놈도 단번에 쓰러졌고, 그다음에 정신없이 앞에 있는 사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자, 원룸의 옆에 있는 호텔이었다.
그리고 다시 여기로 끌려와서 보니, 바로 지금 잡혀있는 곳이다.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면 어느 공장지대 한가운데의 창고 같은데, 창고의 창은 너무 높이 나 있어서 도무지 밖을 볼 수가 없다. 안에는 식료품과 갖가지 물품들이 잔뜩 쌓여있고, 멀리 작업대가 보였다.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보아도 위험한 물건들 같았다.
중식이 있는 곳과 사내가 무언가 작업을 하는 작업대 사이에는 다이아몬드 철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그 문을 열고 들어오면 기나긴 대화가 시작되고는 했다.
의외로 사내는 한국 실정에 약했다. 그는 대화를 하면서 줄곧 녹음을 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면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꽤 요리를 잘했고, 자신이 만들어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사내는 중식을 고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식은 전혀 반항할 궁리나, 허점을 보아서 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 이 창고에 들어와서 잡혀 온 조직폭력배 중 하나가 고문당하는 걸 본 이후로, 중식은 저항력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이제 어디로 가서 목숨을 의탁할 것인가.
사내는 중식에게 약속했다. 협조하면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일이 끝난 후에 풀어주겠다고. 그러나 일이 끝나기 전에 허튼 수작을 하면 그때는 자기 손에 죽지 않아도 누군가의 손에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성하는 요즘 들어 스테이크를 어느 정도 익혀서 먹기 시작했다. 원래는 중국식으로 말해서 50 퍼센트로 굽다가, 이제는 규희의 명령대로 70 퍼센트로 굽는다. 그녀가 생전에 그토록 잔소리 해대던 대로, 덜 짜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 걸 이제 와서 시키는 대로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돌이켜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가에 소스라치고는 한다. 사실 규희가 허구한 날 술을 마시며 울 때에는 그저 그녀를 달래줄 뿐이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강탈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건 전 세계 어디나 같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녀와 싸우기 싫어서 그냥 듣기만 했다.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그저 심정적으로 그녀가 연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천사 같은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의사로서 세상에 봉사하는 건 좋지만,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열심히 페이닥터로 돈을 벌어서 어느 오지로 떠나는 것이 안타까워서 가끔 그녀에게 돈을 주었지만, 그녀는 그 돈마저 구호에 사용하고는 했다.
그게 그녀 인생이었다. 그녀가 세상에 가지고 있는 애정이고, 그녀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사랑했을 뿐, 그녀의 인생관에 호응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매일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성하가 돌아다닌 수많은 나라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시스템이 양호한 국가였다.
성하가 규희에 의해서 움직인 건 단 한 번이었다.
규희의 울분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몸에 무례하게 손을 댄 놈들을 응징했을 뿐이다. 놈들은 성스러운 상대에게 손을 대었고, 그 대가를 지불받았다.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의 탓이다.
그랬는데, 그녀의 죽음과 맞닥뜨리자, 성하의 가슴속에서 슬픔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복수를 하다가 문득, 평소에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원에서 노인이 했던 이야기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던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치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한 개인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방황하면서 타국 땅을 돌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녀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은 그녀의 모국 탓이다.
그녀가 원하던 세상이 되어주지 못한 그녀의 모국에 대한 적개심이 타올랐다. 그녀가 타국땅으로 떠돌지 않았으면 그녀는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죽음에는 그녀가 원하는 세상을 가로막는 그녀의 모국이 가진 시스템에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운용하는 더러운 작자들에게 있다.
그녀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의 죽음의 원인이 되는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오는 힘은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오직 하나 남은 기쁨을 가져간 너희들에게 그녀처럼 슬프고 억울한 세상을 맛보게 해주마.
그리고 그녀가 죽게 된 원흉을 평생을 걸고서 찾는다. 가진 모든 걸 다 쏟아부어서 찾는다.

성하는 팔레스타인을 빠져나오면서 규희가 말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더듬어서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던 지난날의 정보와 경험을 총동원해서 그녀가 눈물을 흘리던 이유들을 하나씩 점검하고 그게 어디서 비롯된 일인지를 찾았다.
그리고 적어도 그녀가 눈물을 흘리게 했던 작자들에 대해서, 그녀를 비통하게 했던 수많은 부조리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지난 뉴스들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 이번에는 그냥 곁에서 곁눈질로 지루하게 본 것이 아니라, 그녀와 같은 시선으로 같은 심정을 안고 보았다.
뉴스는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엉성한 공작들이 보였다.
저 정도 기술로 사람들 눈을 속이다니. 그가 바라보자, 누가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허공에 수많은 선이 그어졌다. 다행인 것은 그중에 자신과 거래를 했던 라인이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일본으로 가야겠군.
성하는 정보를 안고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다른 사람의 계정을 훔쳐서 그동안의 고객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고객 여러분, 프리랜서는 당분간 청탁을 받지 않습니다. 그녀가 원했던 세상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성하의 질문에 중식이 스테이크 접시에서 고개를 들었다. 성하가 종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웃었다.
“기껏 한다는 게 밑바닥 폭력배를 이용해서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중식은 갑자기 고깃덩어리가 목에 걸린 듯했다. 망할 놈.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던 일을 식사하다 말고 떠오르게 하다니.
“하지만 그 정도로 물러서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쯤 전문가를 찾고 있을 겁니다. 기대 되지 않습니까?”
“그보다 경찰이 우리를 찾고 있을 걸세. 여기가 부산 시내라면 여기도 그다지 안전하지는 않네.”
“여기가 어디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여기는 아주 안전합니다. 시내 한복판이고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외진 곳보다 안전하다고?”
“초보자들이나 한적한 곳을 물색하는 겁니다. 그런 곳에 안전가옥을 만들면 어느 누군가의 눈에 뜨이게 됩니다. 설사 그곳이 무인도라고 해도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작은 데다가 항공촬영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니까요.”
“그래서 시내가 더 안전하다는…?”
“당연합니다. 시내는 너무 복잡해서 누군가의 눈에 뜨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게다가 설사 적발이 되었다고 해도 쉽게 통제하고 포위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우리는 번잡함에 섞여서 빠져나가겠지요.”
“저쪽에서도 전문가를 보낼 거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를 아는 즉시, 경찰이 아니라 전문가를 보낸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게 기대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수 없는 놈. 중식은 성하가 징그러웠다. 잘생기고 반듯해서 더 차갑게 느껴지고 악마처럼 보인다.
“그게 재미있나?”
“원래 선수는 선수끼리 맞붙어야 재미가 있는 법입니다.”
성하는 싱긋 웃고 생수병을 든 채로 일어났다.
“오늘 오후에는 잠시 혼자 계셔야겠습니다.”
“나, 나 혼자 있을 때…”
“아직 그럴 일은 없습니다. 경찰도, 정보부도 아직 우리가 안전가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요.”
“이 나라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지금쯤 사건 현장 주변의 CCTV라는 CCTV는 죄다 수거해서…”
“죄다 수거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만 보게 했지요.”
“일부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매스컴에서도 이번 사건을 깊게 다루려고 들지 않더군요.”
“그야 아는 게 없으니까.”
“알려고 들면 충분히 알만한 것들도 그냥 눈감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목격자들이 양창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설명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으면 벌써 난리가 낫겠지.”
“아닙니다. 이 나라는 그런 면에서 가끔 제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고는 합니다.”
성하가 싱긋 웃으면서 나이프를 흔들었다.
“당신이 설명한 부분이나 내가 예상한 부분이 상당부분 맞아 떨어지기는 하지만,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 건 당신과 연관이 있는 작자들의 허술한 대처방식입니다.”
“허술해 보이나?”
“많이 허술해 보입니다. 그동안 허술해도 괜찮았으니까 계속 그 타성에 젖어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다가 큰 코 다칠 걸세.”
중식은 입맛이 떨어져서 나이프와 포크를 놓았다.
“내가 누누이 설명하지 않았나? 우리 커넥션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크다고 말일세.”
“그래서 어느 정도인지 던지기를 좀 해보았습니다.”
“던지기?”
“전쟁터에서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일부러 엉성하게 한 번 푹 찔러보는 거지요. 말하자면 위력수색 같은 종류입니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인가 가늠하기 위해서 건드려보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전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를 일부러 보여주어서 무얼 알아냈나?”
“우리를 보여준 것에 대해서는 아직 반응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당신인가 아닌가 하는 걸 수사팀에서 노려보고 있는 정도입니다. 진짜는 이제부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하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인물에 대해서 잘 아시지요?”
중식이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사진 속 인물을 보는 순간, 흠칫 놀랐다.
“현회장이 아닌가?”
“이 인물은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중식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성하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입에 담지 않은 인물이 어떻게 해서 이놈의 눈에 포착되었을까?
“이 인물에 대해서 숨기셨더군요.”
성하의 눈이 반짝였다. 중식은 소름이 끼쳐서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숨기시면 제가 알아내는 데 조금 시간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못 알아낼 건 없지요. 말했지 않습니까? 저들은 타성에 젖어있다고요.”
“숨기려고 한 게 아닐세. 내가 수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빼놓을 필요도 없는 인물일세. 다만… 나는 이 인물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네.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으니까.”
“일본 야쿠자들의 자금을 들여와서 한국의 사채시장을 주름잡는 작자입니다. 그런데 연관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의 사채는 이미 우리나라 사채 시장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네. 그건 돈의 논리이지 다른 아무것도 아니야.”
“탐욕은 끝이 없어요.”
성하가 생수병을 들어 마셨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탐욕의 결과를 보게 될 겁니다.”
“자네가 그렇게 만들겠다는 건가?”
“아니,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렇게 만들겠습니까? 그냥 놔두어도 언젠가는 그 결과로 인해서 사회가 이그러질 겁니다. 지금도 많이 비틀어졌지만, 이제 시간이 더 가면 임계질량에 도달해서 폭발하겠지요.”
중식도 들은 이야기다. 너무 쪼이고 약탈을 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 게 인간세상이다.
“재미있는 건,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본의 탐욕은 절대 멈추지 못하는 팽창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수없이 많은 나라가 그런 꼴이 났으니까요. 폭발하든가, 아니면 지옥이 펼쳐지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기초체력이 튼튼하다네. 그리 쉽게 남미의 국가들처럼 되지는 않아.”
“유태인들이 아니라면, 기초 체력 따위는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 경제는 한순간에 디폴트 상태로 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한국은 위험한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중식은 이런 논쟁이 우스웠다. 성하의 말대로 몰라서 멈추지 못하는 게 아니다.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는 다들 안다. 하물며 공부할 만큼 하고,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몰라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의 자본은 이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더 이상 빨대로 빨아들일 곳이 없어질 정도로 망가졌지요.”
그래. 맞다. 그게 고민이라고 많이들 떠들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구매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대부분이 먹고 자고 애들 가르치는 데에 모든 수입을 사용했다. 그리고 빚을 내서 연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구매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부분이 아니면 돈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거대 자본은 눈을 국민들 목숨이 달린 방향으로 돌렸다. 그 마지막이 의료산업이다. 거대자본은 당당하게 발표했다.
‘이제는 의료에 투자하겠다.’
미국의 놀라운 성공을 벤치마킹해서 단계를 밟아간다. 반쯤은 그 방향으로 수순을 밟았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서는 안 되겠지만, 속도만 잘 조정하면 미국처럼 온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대 산업이 탄생할 수 있다. 목숨이 걸려 있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가지고 오는 게 인간이다.
“여하튼 실망했으니까 식사를 좀 줄이겠습니다. 배가 부르면 총명하지 못하게 되는 게 인간이니까요.”
성하는 태연히 말했지만, 중식은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뜻인가?”
“식사량을 줄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배가 부르셨지만, 이제는 배가 좀 고플 것입니다.”
“이, 이보게.”
“수갑 다시 차세요.”
“수갑이라도 좀 차지 않게 해주게. 수갑 차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무얼 할 수 있겠나?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난 죽은 목숨이 아닌가? 피가 통하지 않아. 내 손을 좀 보게.”
중식은 떨리는 두 손을 내밀었다. 손목에 시커멓게 수갑 자국이 나 있고, 손도 퉁퉁 부어오른 듯했다.
“그건 수갑을 오래 차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끌러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조여들게 되어 있는 수갑의 속성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억지로 수갑을 끌러내려고 들지 마십시오.”
성하는 다시 중식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 수갑의 끝은 벽에 붙은 쇠파이프다.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지만, 겨우 변기까지 갈 정도의 여유뿐이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네.”
중식은 울분에 차서 말했다.
“헛소리에는 국경도 없군요.”
성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빙그레 웃었다.
“팔레스타인의 수많은 가엾은 사람들이나, 한국의 수많은 가난에 찌든 노인네들이나, 다들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자살은 정말 더 이상 주워 먹을 게 없거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 때에만 시도하게 됩니다. 그건 자살이라고 볼 수 없는 거니까 예외이지요.”
성하는 식탁 위에 놓인 접시들을 가리켰다.
“그게 헛소리가 아니라면, 접시를 깨서 목을 그으셔도 좋고 포크로 심장을 찔러도 좋습니다. 나이프가 잘 안 들지만, 목에 있는 경동맥 정도는 쉽게 잘라집니다.”
“뭐, 뭐야?”
“뭐 가족들도 덕분에 전부 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만, 죽는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내 가족은 건드리지 마!”
중식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역시 그렇죠?”
성하가 중식에게 차가운 눈을 바짝 들이댔다.
“한국 속담에도 있더군요.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요. 남의 일이라서 잘 못 느끼셨다면, 이번이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악마 같은 놈.”
“아직도 남을 깔보는 버릇이 남아 있으시군요. 난 악마 같은 놈이 아닙니다. 악마입니다.”
성하는 접시들을 싱크대로 나르면서 말했다.
“이제부터는 빵과 물만 드셔야 할 겁니다. 나는 요리를 먹고 당신은 빵만 먹는 겁니다. 마주 앉아서.”
“미, 미친놈.”
“누가 더 미칠지는 두고 봐야 알죠.”
“사람을 이렇게 학대하다니. 천벌을 받을 걸세.”
성하가 설거지를 하면서 고개를 돌려 중식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중식이 움찔했다.
“나는 이미 천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가운 미소.
“살아오면서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요.”



3.

현준호 회장의 저택은 완전히 연소되지 않았다. 길이 넓어서 소방차가 즉시 달려와 화재를 진압한 덕분이었다. 수사팀은 그러나 내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버린 시신이 무려 일곱 구나 발견되었다. 한낮이 되도록 검시의들과 과학수사대가 현장을 조사하고 있고, 수사팀 전체가 현장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어서는 두진이 달려왔다.
“어떻게 잠복했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나?”
두진의 나무람에 영란도 대운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우리보다 범인의 정보력이 더 좋은 거야?”
다들 말이 없었다.
“멀거니들 있지 말고 누가 상황 좀 설명해 봐.”
두진의 재촉에 영란이 나섰다.
“시신은 일곱 구인데, 현회장을 빼면 전부 경호원들이었습니다. 폭력배들이 아니라 경호를 직업으로 삼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같이 맥을 쓰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그냥 당했다?”
“현장이 그걸 증명합니다. 범인이 사용한 무기는 얇고 날렵한 칼인데…”
“달맞이길에서처럼 말인가?”
“예. 정확하게 같은 종류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모두 목이나 심장을 맞았습니다.”
“아니? 전부 마주서서 당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맞았습니다. 그런데…”
영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현회장은 다릅니다.”
“뭐가 달라?”
“자기 손으로 금고를 열고 금고 앞에서 죽었습니다.”
“금고?”
“예. 금고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연 흔적이 있나?”
“흔적은 없지만 금고가 아무나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서지거나 억지로 연 흔적이 없습니다.”
두진은 잠시 멍해졌다. 이게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일인가? 수사가 진행되는 속도에 비해서 범행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러면 수사가 앞질러 가지 못하고 뒤만 쫓는 형국이 된다.
“CCTV는?”
“지금 수거해서 검사하고 있는데…”
“그런데?”
영란이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뭔데 그래?”
“제가 언뜻 보고… 그냥 수거해두었습니다.”
“뭐라는 건가?”
영란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검사님. 현회장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 끔찍한 장면이 그대로 실렸습니다. 다른 CCTV는 기록들이 다 망가져서 볼 수가 없는데…”
“범인이 의도적으로 그 장면만 남겨두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끔찍하다는 말인가?”
“그보다…”
영란은 슬쩍 작은 USB 디스크를 두진에게 건넸다. 두진은 USB 디스크를 받아들고 영란을 쳐다보았다.
“저하고 남형사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누구도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여기로 옮기고 지웠습니다.”
“고문 장면이 그렇게 중요한가?”
“현회장과 범인의 대화가 나와서입니다.”
“범인?”
“범인의 목소리에는 기대를 걸 수 없습니다. 범인은 목소리를 변조했습니다.”
“변조?”
“여자 음성으로 나옵니다.”
크음. 저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범인은 현회장 집에 오래도 머물렀다. 그런데 실컷 머물면서 목적을 달성하고는 몰래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화재를 일으켜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 여기 노트북 있나?”
“남형사 차에 있습니다.”
“남형사 차로 가세. 남형사도 오라고 하고.”

대운의 차에 두진과 영란이 함께 들어가 앉았다. 주변은 어수선했지만, 신경 끄고 셋이 모여서 노트북에 USB 디스크를 꽂았다.
먼저 나타난 장면은 범인의 뒷모습인데, 누군지 특정할 수 없는 각도였다. 그러니까 범인은 숨겨진 CCTV의 각도를 알고 있었고, 각도를 조정해놓고 현회장을 심문했다.
두진은 대화 내용보다도 먼저 끔찍한 현회장의 고통에 몸이 떨렸다. 이건 악마에 다름이 없다. 검사 생활을 해오면서 강력사건들을 담당하다 보니 심문을 심하게 한 적은 있지만, 고문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그건 검사로서, 또는 수사를 하는 수사관으로서, 무능함의 극치라고 생각해왔다. 심문은 뛰어난 심문기술로 완성해야 한다.
언젠가 서대문 형무소의 수많은 고문도구들을 보았을 때의 그 소름 끼치던 느낌이 현회장의 모습에서 그대로 전해져왔다. 아니, 범인은 그보다 더했다. 지독한 사이코패스에다가 냉정하고 전문적이었다.
“손톱을 뽑아도 아프고, 손가락을 잘라도 아픈 건 같습니다. 그런데 손톱은 또 자라날 수 있지만 손가락은 자라나지 못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왜, 왜 이러는 거냐? 금고를 열어주었지 않냐?”
“그래서 난 시간을 절약하려고 언제나 손가락을 잘라내지요. 그게 상대의 망설이는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다 주마. 원하는 게 무언지 아직 말도 하지 않았지 않냐?”
“그리고 일단 하나쯤은 잘라놓고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비명을 마음껏 지르게 해줄 수는 없으니 먼저 입을 막겠습니다.”
범인은 현회장이 뭐라든 자기 할 말만 하는 듯했다. 그리고 곧 현회장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졌다.
“사실 새끼손가락은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쯤 없어져도 너무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손가락들만 살린다면 생활에 그다지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야쿠자들을 부리시니까 잘 알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야쿠자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쯤은 잘리게 되죠. 평생을 실수 한 번 않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곧이어 현회장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다음은 검지를 자를 겁니다. 내가 시간을 아낀다는 건 이미 말씀드렸지요?”
재갈을 끌러내자, 현회장이 소리쳤다.
“차라리 죽여라!”
재갈이 다시 물려졌다.
“묻기도 전에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방은 웬만한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을 아주 잘 하셨더군요.”
검지 하나가 잘라져 나갔다. 현회장이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렀다. 범인이 수건을 던져주었다.
“막으세요. 출혈로 인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아, 죽는 걸 원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럼 그냥 두지요. 그래도 내가 알고 싶은 걸 다 알 때까지는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많이 배웠지만, 살리는 기술도 어느 정도는 배운 놈입니다. 저와 오래 동거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시지요?”
끄으으. 현회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범인은 현회장의 재갈을 풀었다.
“엄지손가락이 걸린 첫 번째 질문입니다. 김중식을 죽이라고 누가 시켰습니까?”
“기. 김총장…”
“그렇게 대충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김정국…”
“실패했는데 거기에 대한 반응은?”
“그, 그건 모른다.”
“엄지를 자르겠습니다.”
“저, 정말 모른다. 정말이야.”
현회장은 당황해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거기에서 영상은 끝이 났다.

두진은 한숨을 내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이 대운을 돌아보았다.
“담배 가진 거 있나?”
대운이 담배를 건넸다. 두진이 흘끗 영란을 보았다. 영란이 차창을 내렸다.
“안 피울 테니까 열지 마.”
두진이 담배를 그냥 입에 물고 불을 붙이지 않은 채 마냥 허공을 노려보았다. 대운도 영란도 아무 말 않고 두진의 반응을 기다렸다. 두진은 한동안 허공을 쏘아보다가 신음처럼 말했다.
“이 영상은 절대로 우리 셋만 알고 있어야 하네.”
“공반장님께도 숨깁니까?”
대운이 물었다.
“당분간은 그러게.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일세.”
두진은 USB를 영란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김팀장은 이걸 세 개로 복사해서 우리 셋이 하나씩 갖도록 조처해.”
영란이 흠칫 놀랐다.
“이번 사건은 그냥 살인사건으로 끝날 일이 아닐세. 세상이 뒤집어질 수도 있어.”
“그런데 세 개로…”
“자네 둘은 나하고 같은 배를 타기로 한 것 아니었나? 난 방금 전에 그렇게 알았는데?”
“그야…”
“그럼 우리 셋 중 누구에겐가 신변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앞으로는 우리 셋이 일을 해나가야 할 걸세.”
“어떻게 말입니까?”
“누구 시켜서 오피스텔 하나 빌려두게. 카드 사용하지 말고. 연관성 있는 사람 시키지도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두진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오만 원권 몇 장을 영란에게 건넸다.
“현찰만 사용하게. 내가 더 마련할 테니까.”
영란은 대운을 돌아보았다. 대운은 굳어진 얼굴로 오검사와 영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진이 싱긋 웃었다.
“겁먹지 말게. 만일의 경우, 책임은 내가 다 질 테니까.”
두진은 그 순간, 단 세 명으로 이루어진 특수반을 만들었다. 가장 비밀스러울 수 있는 숫자라고 생각했다. 더 크면 안 된다. 어차피 수사는 수사본부에서도 하고 검찰에서도 한다. 그러면 그 정보들을 취합하고 비밀리에 움직이는 건 셋이면 충분하다. 속도에서는 많이 불리할 것이지만, 비밀을 지키기에는 더 늘릴 수가 없다.
김중식이 살아 있다. 그리고 김중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막으려고 김정국 총경이 나섰다. 그에 대해서 철저하게 수사를 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대놓고 수사할 수는 없다. 총경이 조직폭력배를 이용해서 김중식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다. 그가 임의대로 판단해서 실행하려고 들은 일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정리한 다음에 세상에 공표한다.
그게 틀어진다면… 이 두 친구는 살리고 혼자만 옷을 벗는다.



4.

성하는 스테이크를 얇게 썰어서 프라이팬에 올렸다. 잠시 핏물이 빠지도록 두었다가 후추와 소금을 치고 피망과 파를 넣었다. 고기 안의 육즙이 지방과 함께 흘러나와 끓어오르면서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성하는 흘끗 중식을 돌아보았다. 중식은 우울한 눈빛으로 성하를 노려보았다. 수갑을 끌러주고, 식탁에 빵과 물을 한 컵 주었지만, 빵과 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성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접시에 스테이크를 옮겨 담아서 중식의 앞자리로 가서 마주 앉았다.
“건강에 좋은 호밀빵입니다. 호밀빵 싫어하세요?”
“유치하군.”
중식은 성하를 노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성하는 스테이크를 천천히 썰면서 중식의 말을 무시했다.
“바깥 소식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안 궁금하네.”
중식은 이제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자신을 살려두고 엄청난 비밀들을 죄다 가져가고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람을 학대하다니. 차라리 해운대에서 죽어버렸어야 했다. 그랬으면 가족들의 안전을 가지고 협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 사이코패스가 가족을 건드릴 수 없을 수도 있다. 가족들은 오히려 경찰과 정보기관의 감시 아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접근하는 게 쉽지는 않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텔레비전이라도 놓아드려야 할까 생각했는데, 알겠습니다.”
중식은 아차 싶었다.
“날 놀리는 줄 알고 있네.”
성하가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중식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마주볼 때면 소름이 끼친다. 특히 무표정하면 더 그렇다.
“제가 농담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아셨지 않습니까?”
중식은 고기를 맛있게 먹는 성하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냄새만으로도 회가 동해서 속이 울렁거린다. 빵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접시에 고개를 처박고 빵을 집어서 조금 뜯었다. 그리고 천천히 씹었다.
“이미 사다 놓았는데 도로 물러야겠군요.”
성하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들어 철망 밖에 놓인 박스를 가리켰다. 중식은 고개를 들지 않고 그냥 빵을 씹었다.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뭔가?”
“그냥 무료하지 않게 세상 돌아가는 구경이나 하시라고요.”
“그런 거 안 보아도 무료하지는 않네.”
“처음에 당신을 만나러 가면서는 당신에 대해서 상당히 경계했습니다.”
“경계라니. 난 폭력에는 문외한인데.”
“그래도 유명하신 분이니 뭔가 한 수 있으실 줄 알았지요.”
중식이 피식 웃었다.
“한때는 좀 나갔지.”
“원래 장기판의 말이 모양도 좋고 움직임도 좋은 법입니다.”
성하는 천천히 고기를 썰었다.
“그렇지만, 장기판의 말이 머리까지 좋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중식은 빵을 뜯었다.
“말 나름이지.”
“아뇨. 말의 주인만 잘나면 되는 겁니다.”
“자네는 말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하고 싶은가 보군.”
중식이 빵을 놓고 고개를 들어 성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잘못 알았네. 지금 자네는 장기판의 주인을 상대로 재주를 부리는 중이야. 언제고 끝이 나게 되어있어. 난 장기판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네 귀퉁이 안에 잡혀있는 걸세. 자네가 아니라 장기판에 말일세.”
“당신이 잘못 아신 겁니다.”
성하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장기판을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벗어나려고 하니까 장기판의 주인이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이면서 가지고 노는 겁니다.”
“애초부터 주인이 아닌 사람들이야 원래부터 장기판은 주인이 정해져 있는데, 어쩌겠나?”
“장기판을 엎으면 됩니다.”
“장기판이 엎어지겠나?”
“주인이 스스로 엎을 겁니다.”
“자네는 힘이 조금 좋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면 총 잘 쏘고 잘 뛰는 소총수 말일세. 지휘관이 호각을 불면 적진으로 돌격하는 소총수 말일세.”
“처음 나를 고용한 작자들도 나를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내게 주었습니다. 내가 알고 싶었던 싸우는 기술과 장비 다루는 법, 그리고 상대방의 더러운 수를 읽는 법까지 말입니다.”
성하는 찬물로 입을 헹구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때에는 내가 그 판을 엎어버렸습니다.”
“대단하군.”
중식은 성하를 보며 웃었다.
“젊은 게 좋아.”
“확실히 배가 고프니까 정신이 맑아지셨습니다. 마치 딴사람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네를 믿기로 했네. 그게 내 살길이라면.”
중식은 대화를 유익하게 끌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하는 일언지하에 대화상대가 아님을 차갑게 알려주었다.
“나는 상대가 어머니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성하는 중식의 손목에 다시 수갑을 채웠다.
“텔레비전을 틀어드리지요. 당신은 누군가를 믿을 지도 모르니까.”



5.

두진은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바닷가로 향한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찬바람이 몰려와서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이왕 잠이 오지 않을 거라면 맑은 정신으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싶었다.
며칠째 잠을 잘 수 없었다. 마치 공황장애라도 있는 사람처럼 온종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추운데도 손바닥에 땀이 났다. 평생을 강력부 검사로 지냈는데, 이렇게 긴장되고 두려운 수사는 없었다.
현회장 사건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정리되어서 매스컴을 탔다. 연달아 일어난 강력사건으로 인해서 치안에 대한 비판이 컸지만, 그렇게 정리되고 보니 오히려 수사를 하기에는 좋았다.
오피스텔에 비밀 팀을 만들었다. 규정을 어기고, 수사보고를 하지 않았다. 지금 보고해서는 안 되는 걸 직감으로 느꼈다. 완벽하게 결과를 낸 다음, 당당하게 보고해야 한다.
어쩌면 그 결과로 인해서 전사하게 되더라도, 평생 동안 법을 집행하고 살았던 검사답게 전사하면 그만이다. 사실 검사복이라는 게 별건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연봉을 받는, 그냥 명예직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제대로 결과도 내지 못하고 바보가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가장 완벽한 결과는 악마 같은 범인과 김중식을 체포하는 것이다. 그게 어려우면 최소한 김중식만이라도 체포해서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죽은 김중식이라도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따라와 주는 영란과 대운이 강직하고 수사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검찰 내에도 믿을 만한 수사관들은 있었지만, 검찰 내부에서 보안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찬바람을 쏘이고 서 있다가 욕실로 향했다. 차라리 출근하기 전에 오피스텔에나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오피스텔에는 의외로 영란과 대운이 밤을 새운 모습으로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다.
“집에들 안 갔어?”
두진은 간이 식탁에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늘어놓았다.
“시간이 우리 수사의 관건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대운이 식탁으로 오며 말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영란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여기서 숙식하기로 했어요.”
“둘이?”
두진이 눈을 크게 뜨자, 영란과 대운도 당황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방이 하나 있으니까 팀장님은 거기 주무시면 되고요. 전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어이. 이 친구들 참… 처녀 총각이 뭘 변명을 하시나? 하여간 나온 거 좀 있어?”
영란이 노트북을 두진의 앞으로 돌려주었다.
“방금 누군가가 자료 하나를 보내왔어요.”
“자료? 제보야?”
“일본에서 온 겁니다. 도쿄 경시청의 특별과장이랍니다.”
“경시청? 누구 앞으로 온 거야?”
“제 메일로 왔는데, 수신자는 검사님이신데요?”
“응?”
두진은 가슴이 덜컥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셋이서 비밀 팀을 만들었다는 걸 일본에서 안다는 말인가?
“내용이 뭐야?”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합니다.”
“다른 내용은 없고 다짜고짜 만나자는 거야?”
“오검사님께서 찾고 계시는 인물에 대한 정보가 있으니 만나 뵙고 싶다고 하네요.”
“어디서?”
영란이 대운을 돌아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오피스텔에서요.”
“뭐야?”
두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소름이 확 끼쳤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안전가옥을, 우리나라도 아니고 일본의 형사과장이 안다는 게 말이 되나?
“메일 말미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자신들의 접촉은 자신들밖에 모르니까 안심하라고요.”
“도쿄경시청?”
“하라 경부.”
“자신이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썼다면서?”
“자기 동료들이겠죠.”
두진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도쿄 경시청이 어떻게 해서 이 사건에 끼어든 것인가?”
“김중식이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이야기죠. 어차피 여권을 머리치기 해서 들어왔다는 건 이미 확실한 수사결과가 아닙니까?”
“그럼 지금 우리가 찾는 김중식에 대해서 정보를 준다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요. 거기까지는 쓰여 있지 않아요.”
“제기랄…”
“어떻게 대처할까요?”
영란과 대운이 두진을 바라보았다.
“만나보자. 다시 접촉이 오겠지.”
두진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접촉 오면 즉시 연락해. 사무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테니까.”

퇴근 무렵, 두진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 부랴부랴 달려간 오피스텔의 옥상 정원에 두 사람이 이미 와있었다. 한 사람은 메일을 보낸 하라 경부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마리라고 소개한 여자였다.
두진은 영란과 대운을 데리고 가서 다섯이 옥상 정원의 벤치에 둘러앉았다. 무겁고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하라와 마리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지만, 두진과 영란과 대운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일본어를 잘하는 영란이 두진의 통역을 했다.
“도쿄 경시청에서 오신 건 알겠고, 여기 이 숙녀분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마리가 유창한 일본어로 대답했다.
“이스라엘에서 왔어요.”
“경찰입니까?”
“아니에요. 전 정보기관에 있습니다.”
“모사드?”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감추고 싶지 않아요. 전 모사드에서 한 인물을 뒤쫓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김중식?”
“아니. 강성하. 싸이언 강이라고 해두죠.”
“그게 누구요?”
마리가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두툼한 파일의 겉장을 열자, 잘생긴 사내의 사진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파일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