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진은 갈등 속에 하루를 보냈다. 대운은 자신이 뒤집어쓰겠다고 했지만, 과연 그게 옳은가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부하를 희생시키고 자기만 살아남는 장수는 장수가 아니다.
대운은 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대운이 빠지고 나면 누가 밑바닥을 훑을 것인가. 게다가 자신도 영란도 안전하기는 틀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피차 알면서 명분만 내세우고 빠지는 거잖아요.’
영란의 말이다. 두진이 생각해도 맞는 말이기는 하다. 서로 뻔히 알면서도 대놓고 개수작을 부리는 거다. 오전 내내 사무실에서 짐을 챙기면서 상부의 호출을 기다리는데, 상부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소식이 없었다. 그냥 어서 떠나라는 말 같았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회식은 생략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오검사.”
많이 듣던 목소리다. 친숙하지는 않지만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아, 검사장님.”
“오랜만일세. 우리 쪽으로 온다고 들었는데, 맞나?”
“아, 예. 맞습니다.”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만나서 식사나 할까?”
“예?”

중국집의 구석진 방에서 만난 검사장은 그사이에 당뇨가 심해져서인지 마르고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날카로운 눈매만은 변함이 없었다.
“검사는 그냥 공무원이 아니라, 독립된 행정관청이라는 거, 요즘은 중학생들도 알아.”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청소년 문제를 맡게 된 마당에 그게 무슨 중요한 이야기인가. 게다가 강기수 검사장이라고 하면 특수통으로 유명하다. 청소년 문제나 만지고 있는 검사와는 볼일이 없다.
“그리고 내가 특수통인 건 연수원에만 들어가도 다 알지?”
“전 이번에…”
“이번에 대박 쳤지?”
검사장은 빙긋이 웃었다.
“자네 짓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알아. 다만, 자네를 건드리는 게 벌집을 건드리는 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들 하니까 다행인 거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래도 안심하고 있을 건 아니네. 자네는 철저하게 감시당하게 될 거야. 뭐든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지. 자네가 꼼짝 못하고 입을 닥칠 만한 걸 찾을 거라는 말일세.”
“그런 건 없을 겁니다.”
두진은 자신이 그럴 일이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이 권력남용으로 징계를 먹었나?”
“권력을 남용한 적 없습니다.”
“뭐 아무래도 좋네. 지금 그걸 따져보자는 건 아니니까.”
검사장은 독한 중국술을 거침없이 마셨다.
“내가 초임 시절에는 말이야. 남들의 평판에 너무 신경을 써서 말이야. 무조건 큰 사건 찾아서 한 방 날리려고 정신없이 지냈지.”
“제가 꼭…”
“검사로서 자부심도 가지고 싶고 말이야. 안 그런가?”
“자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는 게 있어. 그게 자존감 같은 거지. 내가 왜 존재하는가? 나는 사회에 뭘 해서 보탬이 되나?”
검사장은 뭔가 설득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두진은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상부에서 자신과 안면이 있는 검사장을 내세웠나 싶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건을 파헤치고 범인을 잡는 것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피해를 막는 걸세. 그렇지 않나?”
“범인을 잡아야 피해를 막지요.”
“바로 그거야.”
검사장의 말에 두진이 멈칫 놀랐다.
“부조리를 파헤치고 정의를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바로 범인을 잡는 걸세. 자기가 맡은 일에 집중하려면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도 알아야 해. 확실한 목표와 적의 구분이 필요해. 그렇지 않나?”
“말씀하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미 그 사건에서 배제 되었습니다.”
“자네 검사 아냐? 검사가 누가 시켜야 일하나?”
“특수부에서 맡은 일로 압니다.”
“맞아. 그래도 자네는 지금 한국 땅에서 가장 범인에 대해서 잘 알고 가깝게 접근했던 사람이지.”
검사장이 젓가락으로 두진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검사답게 행동하게.”
두진은 젓가락이 가슴을 찌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검사장을 바라만 보았다.
“범인을 잡아. 프리랜서를 잡아서 내 앞에 데려오게. 옷 걸지 말고 목숨을 걸어. 그러겠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다 막아주겠네. 기관이고 청와대고 다 엿 먹으라고 해. 자네도 검사고, 나도 검사야.”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때 이른 장마가 시작되는 징조였다. 두진은 대운과 영란을 데리고 장림공단의 현장으로 다시 갔다. 발령은 서초동으로 났다. 청소년 담당이 되었지만, 아직은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셋이 모이는 장소는 여전히 영란의 아파트였다.
두진은 자신을 밀어주고 독립적으로 수사하게 해주는 게 검사장이 독단으로 하는 것인지, 검찰의 방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세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수사하고 원하는 인원을 더 차출하도록 권한이 주어졌다.
먼저 일산경찰서의 진구를 끌어들였다. 일산의 사건을 수사하기 좋았고, 특히 당장 자리보전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구만이 아니라, 인터넷신문사도 여러 가지 압박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형식 기자도 어딘지 모를 기관에 끌려가서 수사를 받는 상황이었다.
짐작으로는 국가정보원이 틀림없겠지만, 거기까지는 어느 경로를 통해도 알 길이 없었다. 분명한 건 이번 일이 그냥 땅속으로 묻혀버릴 게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다.
두진은 검사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수사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세상에 대고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실 그들이 누구인지를 파헤치는 건 여력도 되지 않았다. 총경 위로는 어느 누구인지도 모른다. 프리랜서는 일부러 두진에게 이름들이 적힌 메모 하나를 남겨주었지만, 거기 쓰여 있는 이름들이 어떻게 얽힌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내놓아도 아무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이상을 아는 건 프리랜서뿐일 것이다. 김중식을 데리고 있으니 당연하다.
프리랜서를 잡는다. 그다음은 그다음에 생각한다. 설사 그들이 자기를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기꺼이 이용 당해줄 수 있다. 목적은 프리랜서다. 그놈을 잡아서 내가 검사라는 걸 증명한다. 세상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사건 현장은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CCTV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모든 증거자료는 다 챙겨갔다. 그러나 그게 증거가 될 만하지도 않다는 걸 두진은 알았다. 프리랜서는 그렇게 엉성한 놈이 아니다. 자기가 남겨주고 싶은 것만 남겨줄 놈이다. 그러니까 남겨진 것들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
“놈도 신은 아니다.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범죄자일 뿐이다. 무언가 빠뜨린 게 있을 거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시한 게 있을 수도 있어. 놈도 인간이야. 우리하고 같은.”
두진은 영란과 대운에게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지자고 했다.
“뭐든 건져야 한다. 놈이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이용해서 이동했는지, 깃털 하나라도 건져야 한다.”
셋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천정을 뜯어내고 쓰레기를 뒤졌다. 공장 주변의 쓰레기는 이미 다 가졌지만, 나온 게 없었을 것이다. 반경을 넓혀서 무언가 감추었을 만한 곳을 뒤졌다.
그러다가 대운이 잡목을을 태운 드럼통 하나를 발견했다. 인부들이 공사를 하는 중에 몸을 녹이려고 불을 피운 흔적이다. 그렇다면 한겨울에나 사용되었을 게 확실한 드럼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된 그을음 같지가 않았다.
다가가서 안에서 타다남은 잡목들을 모두 꺼냈다. 공사장에서 쓰이던 각목과 박스 쪼가리들이 타다 남은 것들의 전부였다. 증거가 될 만한 걸 건지는 요행은 없었다. 한숨을 쉬며 돌아서다가 문득, 지나가는 차량 하나를 보았다. 커다란 냉동차량이었다. 완전히 막혀 있는 커다란 냉동칸을 얹고 다니는 차량.
대운은 문득 자신이 뒤졌던 드럼통으로 다시 가서 타다 남은 박스 쪼가리들을 다시 챙겨들고 바닥에 깔았다. 조각은 도저히 맞지 않았지만, 그 대신 확실한 영감을 주었다.
“검사님. 냉동차량이 적합하겠지요?”
“뭐?”
두진이 달려왔다.
“현장에 박스가 많았던 것 기억하시죠? 버려진 박스들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여하튼 박스가 많이 나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짐이 많다는 이야기인데, 게다가 인질까지 모두 눈에 뜨이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하려면 냉동차량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두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식료품 운반 차량도 있고… 특장차량이 좋겠지.”
영란이 달려왔다가 도로 달려갔다.
“도난차량이나 렌트카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동작 한 번 날쌔군.”
두진이 박스 조각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기 증거가 있지는 않겠지? 낡은 박스를 현장에 잔뜩 두고 가버렸잖아?”
“그렇죠. 자기가 누구라는 건 감추려고 들지 않는 범인이잖아요? 그만큼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냐. 그보다는 세상을 뒤집어 놓으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두진이 대운을 돌아보고 싱긋 웃었다.
“덕분에 정말 뒤집어졌잖아.”



2.

소나기 덕분에 바람이 청량해졌다. 도시는 맑은 봄빛으로 눈부셨다. 탑크레인이 골리앗처럼 움직이는 아파트 공사현장은 황량하고 조용했다.
성하는 아파트 단지가 끝나는 야산 아래에 특장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 갖가지 쓰레기들을 쌓아놓은 다음 자물쇠를 채우고 내렸다.
이제 막 단장을 마친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는 노동자처럼 ‘진주건설’이라고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허름한 가방을 들고 걸었다. 옷이나 가방이나 여기저기 흙먼지와 기름때가 묻어 있어서 영락없이 일하다가 퇴근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새로 생긴 변두리의 전철역까지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그에게서는 땀에 전 쉰내와 술 냄새가 풍겼기 때문에 다들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게다가 그의 모자는 어느 시궁창에 처박았다가 건져낸 듯 얼룩과 때로 지저분했다.
성하가 전철에서 내린 곳은 사람으로 치여 죽을 만큼 복잡한 시장통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라는 게 온갖 인종들을 모아놓은 것마냥 가지각색이었다.
성하는 비좁은 골목을 터덜터덜 피곤한 듯이 걸어서 소위 말하는 닭장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언덕을 올랐다. 지저분한 골방 하나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골방에 박스 몇 개가 쌓여 있고 라면과 냄비와 등산용 버너가 놓여있는 살풍경한 광경이 드러났다.
성하는 발로 박스와 지저분한 이불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알람을 맞추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
그는 네 시간을 죽은 듯이 잤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누런 타일로 이루어진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박스 안에서 깨끗한 티셔츠와 바지를 찾아 입은 다음, 테 굵은 패션 안경을 찾아 쓰고 백팩을 메고 골방을 나섰다.
그는 골방에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와서 어두워진 거리를 걸었다. 택시를 타고 번화하고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내려, 다시 남산을 바라보며 얼마 동안을 걸었다.
공구상가들이 가득한 거리 뒷편으로 비좁은 인쇄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줄을 지어 문을 닫은 곳 중에 한 곳의 양철로 된 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갔다.
안은 이제 인쇄기라고는 없는 허름하고 빈 공장이지만, 생각보다 높은 건물이어서 주변은 모두 이 층이나 삼 층 건물이었지만, 이 건물은 작고 비좁게 올라간 사 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용되지 않는 듯 먼지가 가득한 공장이었다. 작업 테이블들은 있었지만, 그 위에 기계라고는 없었다.
성하는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서 맨 윗층에 들어섰다. 중식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창밖의 네온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철망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철망 밖에는 용접기와 갖가지 공구가 놓인 작업대가 있었지만, 철망 안은 부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고정된 탁자와 의자 두 개뿐이었다. 그 중 한 의자에 중식이 앉아 있었다.
“지루하십니까?”
중식의 앞에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노트북에서는 24 시간 뉴스를 하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군.”
“무슨 뜻입니까?”
“자네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꽤나 실망했겠네.”
“실망까지는 아니더라도 화가 난 건 사실입니다.”
성하는 중식 앞에 가서 앉았다.
“난 위험을 무릅썼는데 저들은 그걸 무시해버렸습니다.”
“자넨 정말 위험한 도박을 한 거야. 자네를 세상에 드러내놓았지. 뉴스에는 나오지 않지만, 저들은 자네에 대해서 알 만큼 알았어.”
“상관없습니다.”
성하는 싱긋 웃으면서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내가 감추려고 해도, 나를 쫓는 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를 감출 수 없습니다.”
“자네를 쫓는 자들이 일본 쪽 라인인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좀 더 뛰어난 작자들이죠.”
성하는 맥주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쫓는다는 건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뜻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제 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다 함께 자폭이라도 하려나?”
“아니.”
성하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에 속도를 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닥치는 대로 제거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성하가 주머니에서 메모첩을 꺼내더니 뒤적였다.
“당신이 다 아는 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다 아는 건 아니다?”
“당신은 나를 소총수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알고 보니 당신이야말로 소총수였더군요.”
성하가 중식 앞에 메모를 내밀었다.
“도청하다가 나온 글자입니다.”
메모에는 ‘TC’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무슨 약자인가? 난 전혀 모르겠네.”
“여러 가지로 맞춰보아도 역시 모르겠더군요. 당신이 정말 모르기를 바랍니다.”
“이게 약자라고 하면 누구 이름인가?”
“사람 이름인지 암호, 혹은 어느 단체명이거나 공작명일 수도 있지요.”
“이걸 누가 언급하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술좌석에서 도청된 거니까요.”
“술집에서 사용되었다면 그냥 테이블차지라는 뜻 아닌가?”
“아닙니다. TC에서 지침을 받았느냐고 묻자, TC에서 아직 지침이 내려오기를, 앞으로 절대 나서지 말고 대기하면 TC의 방식으로 해결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럼 사람 이름이겠구만.”
성하는 메모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캔맥주를 마저 마신 다음, 의자에서 일어났다.
“뉴스가 지겨우시면 눈이라도 좀 붙이십시오.”
이곳이 부산과 다른 점은 간이침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식이 누워서 잘 수도 있는 나무로 된 침상과 이부자리가 있었다. 열악하지만, 앉아서 지내거나 공장 바닥에 그냥 누워서 잠이 들던 부산에 비하면 한결 낫다.
물론 쇠사슬은 언제나 한정된 공간에서만 움직일 수 있게 해놓았다. 노트북을 만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노트북은 딱 볼 수 있는 위치에만 있어서 마음대로 조작할 수는 없었다.
성하는 철망 밖의 작업대에 앉더니 그라인더로 작은 칼들을 갈기 시작했다. 언제인가 본 적이 있는 무시무시한 칼들이다.
성하는 가끔 칼을 갈다 말고 품속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들여다보고는 했다. 사진 속의 모습을 중식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무언가 중요한 모습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가끔 들여다보면서 악마답지 않게 멍해지는 걸 보면 인물사진인 게 틀림없다.
“그 사진… 대체 누구 사진인가?”
“궁금하십니까?”
성하가 차가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궁금하네. 한 번 보여주게. 나도 아는 사람이던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보려면 당신의 두 눈을 내놓아야만 가능할 겁니다.”
“지독하게 말하는군.”
“지독한 게 아닙니다. 가치를 놓고 따진 겁니다.”
성하는 사진을 소중하게 상의 윗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3.

아덴만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물을 길어오는 긴 행렬을 지프로 거슬러 오르면서, 그는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오 분. 앞으로 두 시간 후면 밀림으로 나갈 시간이다. 바다에서 직접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밀림 쪽에서 접근하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지프를 이용해서 밀림으로 향하고 있다.
상대들은 지역에서 너무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밀림으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화력전을 벌여야 해서 절대로 조용히 시작하고 아무도 모르게 마무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위험해도 결국은 밀림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밀림을 좋아했다. 지역민들은 우호적이지 않지만, 밀림 자체가 그에게 우호적이다. 밀림에 들어서면 밀림을 더 잘 아는 자가 이긴다. 승패는 누가 밀림의 주인이냐에 따라서 정해진다.
그는 원주민들이 태어나고 자란 밀림을 자신보다 잘 알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밀림을 이용해서 싸우는 법은 더 잘 안다고 자신했다.
아니, 어쩌면 싸우는 법을 잘 안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기습하고 저격하고 치고 박는 싸움에 능숙하다. 빠르고 정확하게 목표를 해치우고 물러나는 데에는 그의 능숙함을 누구나 인정한다.
실패율 제로. 특히 인질을 구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일을 종결짓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다들 그를 ‘시체도굴자’라고 부른다.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첫 번째는, 이미 죽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구해내 오는 기술로 붙여진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의 숨어 있는 작자를 찾아내서 확실하게 제거하는 능력으로도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용병이지만, 아무에게서나 일을 받아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오랜 시간동안, 그러니까 그가 프랑스의 외인부대에서 불명예 제대를 한 뒤에 아프리카를 떠돌기 시작하던 때부터 이제까지 줄곧 그를 인정해준 상대에게서만 일을 받았다.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아프리카에서 떠돌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낀 시절은 아프리카의 밀림을 누비던 때였고, 진정한 인생의 맛을 느끼는 때는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때였다.
그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고, 동양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인이었다. 나이 서른에 불명예 제대를 당하고 그 후로 이십여 년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이름은 그를 용병으로 고용한 TC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그저 ‘RM’으로만 불렸다.
밀림으로 들어서면서 지프를 퇴각용으로 세워두고 동료 셋과 함께 무거운 군장을 온몸에 감싼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20 kg의 배낭을 메고 가슴의 몰리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군장 주머니에는 가득히 수류탄을 채워 넣었다.
손에는 저격용 라이플 PSG를 들고, 뒤허리로는 짧은 자동소총 AK47을 둘러멨다. PSG는 경찰저격수용 PSG-1을 전투용으로 개량한 PSG-90을 말한다. 길이가 짧아지고 가벼워진 데다가 반자동으로 바뀌어서 편리했다. 게다가 망원조준경과 야간투시경을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이점도 있어서 PSG-1보다 밀림에서의 작전에 수월했다.
허리에는 대검과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을 챙겼다. 이 정도면 네 명 한 팀이 모여서 일대 소대의 화력에 맞먹는다. 게다가 함께 움직이는 그의 동료 셋은 현대전에서 가장 뛰어난 용병들이다.
물론 모든 작전은 정보에 의존한다. 정보가 뛰어나야 작전에 들어가서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일을 주는 TC는 정보력에 관한 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보에 의하면 인질들은 오늘 오후에 배에서 내렸고, 해적들의 요새로 들어갔다고 했다. 해적들의 요새는 해안가에서 약간 밀림 쪽으로 들어와 있다. 해안에 너무 가까우면 각국 정찰대의 눈에 뜨이니까 밀림으로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통상적으로 인질들은 배에 머무른다. 그런 경우에는 인질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밀림으로 들어왔다고 하면, 아무리 경계가 심하고 인질을 깊숙이 감췄다고 해도 자신감이 붙는다.
그와 동료들은 해가 지도록 달려서 여덟 시에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하느라 험한 길로만 전진해서 각자가 잠시 기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에너지바와 초컬릿을 먹고 물을 조금 마신 다음, 밤이 더 깊을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술이 마시고 싶었지만, 술이나 담배는 밀림에서 금기사항이다. 밀림에서는 냄새와 불빛이 놀랍도록 멀리 퍼져나간다.
새벽 두 시가 되자, 산언덕의 양쪽 두 곳에서 대각선으로 동료 둘이 저격 위치를 잡고, 동료 하나와 다시 밀림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전진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망루에서 망을 보는 놈들은 눈이 밝다. 밀림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소소한 변화에도 눈치를 챈다.
사람이 밀림에 들어서면 아무리 조심해도 사람이 들어서는 상태로 인해서 일어나는 변화가 있다. 설치류가 뛰고, 원숭이가 나무로 오르거나 운다. 게다가 새들이 잠에서 깨고 뱀이 꼬리를 흔든다.
그래서 일정 기간을 전진하고 나면 그대로 멈추어서 밀림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리고 다시 전진하는 식으로 불과 1 km 거리를 두 시간이 넘어서야 접근했다.
이제 뚜렷하게 요새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망루는 둘. 밀림 쪽으로 하나에 바다로 하나. 나무 막사가 크게 두 개에 벽돌로 지은 견고해 보이는 막사가 하나였다.
견고한 막사만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공격 시간은 다섯 시. 여명(BMNT)은 다섯 시 십 분. 가장 알맞은 공격 시간이다.
저 불이 밝혀진 막사에 인질들이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벽돌로 된 막사를 습격하기 전에는 아주 조용하고 속도 있게 기습해야 한다.
시간을 확인하고 동료에게 자신의 뒤를 지키라고 신호했다.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림 방향을 지키던 망루의 보초 둘이 픽픽 쓰러졌다. 멀리서 동료들이 저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비호처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벽돌로 된 막사 옆으로 달려가서 몸을 숨겼다. 잠망경을 꺼내서 안을 엿보자, 예상 외로 막사 안은 인질들이 없었다. 해적의 중요한 인물들로 보이는 작자들만이 라디오를 듣고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술병과 여자가 보였다. 그는 뒤따라 도착한 동료에게 목을 그어보였다. 그리고 동료에게 그 자리를 지키라고 하고는 다른 막사를 향해 접근해갔다.
나무로 된 막사 하나 앞에 보초가 두어 명 서있었다. 막사 밖은 둘이지만, 만일 인질들이 있는 막사라면 안에도 보초들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PSG를 동료에게 넘기고 권총을 꺼내들었다. 소리 없이 해치운다. 안을 들여다보자, 어두운 실내에 희미하게 의자에 앉아서 총을 가슴에 기댄 채로 잠이 든 듯한 보초 여럿이 눈에 보였다.
인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질이 없는데 총을 들고 지키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인질들은 땅 밑에 있다.
침착하게 보초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다섯.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은 없다. 문이 잠겨 있을 수 있다. 틱. 신호를 보냈다.
문 앞의 보초 둘이 다시 털썩털썩 쓰러졌다. 달려들면서 문고리에 한 방을 쏘았다. 동료가 문을 확 열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안에서 벌떡 일어나는 상대들을 향해서 우선순위대로 차근차근 총알을 먹였다.
순식간에 다 쓰러뜨리고 바닥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카페트를 젖혔다. 안에는 인질 넷이 쪼그리고 앉아서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인질을 확보했으므로 거칠 것이 없었다. 권총을 인질 하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동료에게서 PSG를 건네받고 밖으로 나오면서 눈에 뜨이는 대로 쏘았다.
멀리서 저격하는 동료들 덕에 상대는 당황해서 쉽게 튀어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만 총질을 했다. 수류탄을 던졌다. 함께 온 동료는 벽돌로 된 막사에 수류탄을 먹였다.
그러나 총질은 멈추지 않았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AK47을 난사하면서 상대들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못하게 했다. 그 사이에 동료는 인질들을 밀림 안으로 뛰어들게 했다.
밀림으로 퇴각한 다음부터 길고 지루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밀림도 어렵지만, 밀림을 벗어나도 안전하지 않다. 모가디슈에 도착하기 전에는 어느 마을이든 어느 원주민이든 적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질들의 안전을 위해서 퇴각속도를 늦추면서 세심하게 짜인 루트로 지프가 있는 곳까지 갔다. 지프의 속도를 시속 15 km 정도로 조절하고, 지프에 인질들을 태우고 동료 둘은 뒤를 지키면서 조금 떨어지게 하고 그와 동료 하나는 지프를 호위하면서 달렸다.
그렇게 해서 오전 10 시가 되어서야 넓은 도로로 나서서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한숨 돌리고 지프에 올라타서 모가디슈로 향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TC였다.
“지금 즉시 한국으로 오게.”
“작전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모가디슈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럴 시간 없네. 헬기를 보낼 테니까 올라타게.”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나이로비에 가면 에이전시가 기다리고 있네. 거기서 다시 이야기하세.”
전화를 끊었다.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의료용 헬기가 날아오더니 먼지를 일으키면서 착륙했다. 동료들에게 나머지 일을 지시하고 헬기에 올랐다. 헬기에는 조종사 외에 의료진이 아닌 검은 양복의 동양인들이 타고 있었다.
“일본인?”
대꾸가 없었다.
“중국인?”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말을 했다.
“한국에서들 오셨군.”
사나이들이 움찔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RM입니다. 제 한국말이 좀 어색하죠?”
사나이들이 애매한 표정으로 RM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아프리카에 오면 다들 그렇듯이 긴장한 것 같았다. 긴장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었는데도 벽돌 같은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 헬기가 곧장 나이로비에 갑니까?”
“그렇소.”
한 사나이가 짧게 대답했다. 헬기는 빠르게 나이로비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