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록에 의하면 싸이언 강(강성하)은 1978 년 오사카의 변두리 지대인 사카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싸이언 강이 15세 때인 1993 년. 정식으로 이민비자를 취득하고 미국의 투싼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우주항공국 부설 항공연구소에 다녔다.

다음 기록에 의하면, 싸이언 강은 19 세가 되는 1997 년, 고아가 되어서 미해군 특수부대에 입대했다. 그의 부모가 고아가 된 사건은 폭력조직과의 분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부분은 확실하지 않다. 그는 근무성적이 우수해서 여러 번 훈장과 표창을 수여받았다.

다음 기록에 의하면, 싸이언 강은 21 세가 되던 2002 년, 휴가를 나가 폭력사건에 휘말리면서 무려 8 명의 인명을 살해한 용의자가 되어 군법에 회부된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그 후에 미중앙정보국(CIA)의 공작원(HUMINT)로 스카웃되어서 일했다.

다음 기록에 의하면, 싸이언 강이 28 세가 되는 2008 년, D-56 작전에서 공작원 전체가 희생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그 와중에 다른 공작원들과 마찬가지로 행방불명되어 사망 처리. CIA의 수많은 이름 없는 별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싸이언 강이 누굽니까?”
두진이 파일을 덮으면서 묻자, 마리를 대신해서 하라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이 찾고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찾는 인물이라는 건 어떻게 감지하셨습니까?”
“도쿄에서 이미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김중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김중식을 한국으로 오게 만든 건 바로 싸이언 강이었습니다.”
하라는 자기 가방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냈다.
“신주쿠 거리의 모든 CCTV를 뒤져서 확보한 싸이언 강의 사진입니다. 물론 김중식의 사진도 있지만, 싸이언 강과 함께 있던 적은 없습니다.”
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을 보았다. 일본도 몇 년 전부터 CCTV를 많이 깔았다. 신주쿠 거리에 경찰용 CCTV를 설치하는 일로 시민단체와 부딪쳐서 떠들썩했었다.
사진에는 여기저기 거리에서 움직이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사진 속의 인물과 파일 속의 인물은 비슷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인물입니까?”
“동일인입니다. 우리도 엄청나게 고생해서 찾아냈습니다. 너무 변장이 뛰어나서 수만 가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야 겨우 패턴을 찾아냈지요.”
“그런데 어째서 파일명은 프리랜서입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마리가 나섰다.
“보다시피 그는 사망자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났지요. 다시 나타난 것도 물론 전혀 몰랐어요.”
“누가 몰랐다는 겁니까?”
“CIA도 몰랐고 우리 모사드도 몰랐죠.”
두진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싸이언 강은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죽지 않았고,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사라진 겁니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어요.”
“무슨…?”
“청부업을 시작한 거죠. 각 나라, 혹은 조직들이 그에게 일을 청탁했습니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에게 맡겼어요. 물론 지금 이 이야기들은 파일로 정리할 수 없는 우리 모사드의 비밀 정보입니다.”
“살인청부업자라고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싸이언 강이 프리랜서라는 걸 알게 된 겁니까?”
“연결점을 찾는 데에 거의 일 년을 허비했어요. 프리랜서라는 청부업자에게 우리가 일을 맡긴 적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뛰어난 자로군요.”
하라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 일본의 어느 단체에서도 청부를 맡긴 적이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하라의 가방에서 다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사십 대 초반 정도의 여자였다.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교통사고로 죽었지요. 프리랜서의 솜씨였습니다.”
“이 여자가 누군데요?”
“난징학살에 대한 증거를 모으고 다니던 여자였습니다.”
“이런…”
두진은 입맛이 써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마리는 무시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프리랜서가 우리 모사드를 적으로 돌려서 가자지구에서만 수십 명의 우리 요원들이 당했어요. 그리고 추격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도쿄에서 한국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강력한 사건들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청탁일까요?”
“아닌 것 같아요.”
마리는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서 두진 앞에 내밀었다. 스마트폰 안에는 영어로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고객 여러분, 프리랜서는 당분간 청탁을 받지 않습니다. 그녀가 원했던 세상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영업을 잠시 쉬겠다는 메시지입니다.”
“누구한테 보낸 메시지입니까?”
“고객들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사드도 고객이었으니 당연히 우리에게도 왔지요.”
“그럼 지금 하는 일은…”
두진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메시지가 의미하는 게 무얼까. 그냥 영업을 쉬겠다는 선언이 아닌 것 같다. 그녀가 원했던 세상을 물리적으로 만든다?
“여기 이 메시지의 그녀는 누구입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난 이야기를 들으시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마리는 프리랜서와 마주하게 된 끔찍하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리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두진은, 이제까지의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확연하게 정리되었다.
기가 막혔다. 어느 한 여자의 죽음이 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맞는 거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게다가 그 여자의 죽음은 대한민국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지지든 볶든 두진은 아무 관심도 없다. 두진에게는 그냥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일만 아니면 상관하고 싶지 않다.
여기 이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법조계는 머리가 뽀개진다. 갖은 이권과 비리와 사기로 점철되는 이 세상에서 그나마 가장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게 강력범들이다. 그래서 두진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강력부에서만 일한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러니까 범인은 모사드도 어쩌지 못한 희대의 테러범이라는 말입니까?”
“그냥 테러범이 아니죠. 전문가 중의 전문가입니다. 우리 모사드뿐 아니라, CIA까지도 그에게 이용을 당했을 정도니까요. 그는 특수부대에 들어와서 싸움을 배워서 자기 부모 복수를 했고, CIA에서 전문가가 된 다음, CIA를 감쪽같이 떠나버린 거죠.”
하라가 나섰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은 철저하게 공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누구와 말입니까?”
“우리 경시청의 특별과와 모사드와 CIA의 요원들이 모두 모여서 추적팀을 만들 겁니다.”
두진은 잠시 하라와 마리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속셈들일까. CIA는 KCIA와 언제라도 공조할 수 있다. 그리고 모사드 역시 KCIA와 공조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우리가 공식적으로 협조를 구할 수 없는 건 외교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여기 들어와서 활동할 수 없고 정보만 제공해야 합니다. 게다가 아주 민감한 인물이 하나 끼어 있지 않습니까?”
김중식을 말하는 거다.
“한국의 권력층은 그 인물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자체를 꺼릴 겁니다. 이미 한국의 국민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죽은 사람으로 공표한 상황이니까요.”
그랬다. 그 부분이 두진을 많이 괴롭히고 있다. 터뜨리면 정권이 흔들린다. 그렇지만 터뜨리지 않을 수도 없다. 상부에 보고하는 순간, 난리가 날 것이다. 어쩌면 그로 인해서 자신은 옷을 벗어야 할지 모른다. 이유는 충분하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다. 그저 들추지 말아야 할 것을 들춘 대가를 지불받을 것이다. 그런 일은 선배들을 통해서 무수히 보아왔다.
물론, 각오하고 있다. 각오도 없이 달려들지는 않았다. 다만, 그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완벽해지면 터뜨린다. 그 전에 터뜨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할까. 이 작자들이라고 해서 믿어도 될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 인물들인데, 게다가 모사드인데 말이다.
“하라씨는 경찰인데, 이렇게 해도 됩니까?”
하라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하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입장이 검사님과 같습니다.”
마리가 옆에서 하라의 입장을 설명했다.
“자위대 정보군과 접촉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은 곤란하니까 나서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중동처럼 총이나 대포가 함부로 굴러다니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가요?”
하라가 싱긋 웃었다.
“폭발 사고가 벌써 여러 번 일어나지 않았던가요?”
“폭발 사고는…”
두진은 말하다 말고 하라와 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자신은 모르는 어떤 사건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뜻입니까?”
하라가 다시 사진 한 장을 내보였다.
“인천에서 1 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자동차가 횟집으로 돌진해서 인명피해가 난 사건 말입니다.”
“그건 폭발 사고가 아니지 않소?”
“아주 흔한 수법입니다.”
하라가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로 위장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에요. 상대편 하나를 잡아다가 운전석에 앉혀놓고 인화물질이 가득한 차량을 목표를 향해 돌진 시키는 거죠. 그럴 경우, 남는 게 없어요. 확실하게 불에 타버렸으니 부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죠.”
“동일 수법이라고 보는 겁니까? 그 시기에도 프리랜서가 한국에 있었다고요?”
“틀림없습니다. 조사해 보시면 알 겁니다. 그리고 꼭 조사를 해야만 하고요. 죽은 여자와 연관이 있다는 걸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국에서 수사할 권한이 없으니까 그 부분을 도와주시면 공작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수사를 해서 찾아내기만 하라는 거군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리가 귀엽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을 처리하면 오검사님은 빠지셔도 됩니다. 우리가 전부 드러나게 할 거니까 오검사님이 하신 일은 없는 거죠. 그리고 몰라서 하지 못한 보고는 죄가 되지 않으니까요.”
두진은 대운을 돌아보았다.
“사무실에 가서 이 사건 누가 담당했나 좀 찾아 봐.”
대운이 일어나서 나갔다. 영란도 나가려는데, 두진이 말렸다.
“어디 가? 통역해야지.”
영란이 두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의 의미를 느끼고 다시 앉았다. 두진은 하라와 마리를 호의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해봅시다. 나 역시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건 싫으니까 깔끔하게 처리되도록 합시다. 뭐든 협조하겠소.”
하라와 마리가 두진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우리 오피스텔에서 합동으로 일하는 건 좋은데, 다른 요원들은 어디 있소? 보다시피 우리 오피스텔이 너무 좁은데…”
마리가 웃었다.
“좋은 곳이 있어요. 나중에 안내해드리죠.”

두진은 마리와 하라와 서로 보안 전화의 번호를 교환한 다음, 다음 날 서로의 정보를 가지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다시 셋이 모여 앉자, 영란이 물었다.
“검사님 일본어 잘하시잖아요?”
“잘하지는 못해도 하기는 하지.”
부산에서 강력부 일을 하면서 일본어를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야쿠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게 부산이다. 영어는 조금 딸리지만 일본어는 딸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못하는 척 했어요?”
“그래야 내 앞에서 마음 놓고 서로 대화를 하지. 앞으로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저 사람들을 안 믿으시는군요.”
“아까 하라… 인가? 하여간 그 작자가 말했잖아. 정보군에서 보낸 거라고.”
“그게 뭐예요?”
“자위대 정보군은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군 기무사와 같은 곳이야.”
“대충 그런 곳 같기는 했어요.”
“믿지 못할 놈들이야. 우리가 정보를 주면 즉각즉각 넘어갈 거야. 그리고 김중식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의 어느 무리들에게도 당연히 넘어가겠지.”
영란이 놀란 눈으로 두진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대로 올무에 걸려든 거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어.”
영란과 대운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진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나 피우자.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잖냐?”
영란이 종이컵을 주고, 대운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두진은 길게 한 모금을 내뿜고 나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섭냐?”
대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목숨 걸 일이라도 있는 게 어디예요?”
“그래?”
영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겁나면 검사님은 빠지셔도 돼요.”
“나야 죽어도 너희들보다 더 살았으니 덜 억울하지 않겠냐?”
천정을 올려다보며 맛있게 담배를 피웠다.
“이왕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면 멋지게나 죽자. 젠장…”



2.

서울에는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라고 하지만, 한 번씩 내릴 때마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결국 봄비가 내릴 것이다.
성하는 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국립극장 길 건너의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달콤한 카라멜마끼야또를 마시며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성하의 모습은 꾸깃꾸깃한 촌스러운 양복에 와이셔츠 단추가 터질 것처럼 배가 나와 보였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고 저승사자라는 검버섯까지 군데군데 보였다.
승용차들이 주차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성하는 그런 차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검은 승용차 하나가 나타났다. 그 차는 주차장에서 멈추지 않고 국립극장의 입구까지 곧장 달려왔다.
성하가 눈을 번쩍이면서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승용차가 정문 앞에 서고, 뒷좌석에서 최의원이 내렸다. 최의원은 안으로 들어가고, 승용차는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성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가쁘게 쉬면서 자신도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배를 내밀고 뒤뚱대듯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살찌고 혈압 높은 노인네였다.
그는 힘들게 걸어서 극장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많은 관객들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공연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가운데 최의원은 예술계 인사들로 보이는 남녀와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하는 뒤뚱거리면서 천천히 최의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서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직원인 듯한 젊은이 하나가 바쁘게 커다란 박스를 가지고 로비를 가로질러서 걸어갔다. 성하는 그 박스를 든 직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박스를 안고 걷는 직원이 최의원 옆으로 도달할 즈음에 갑자기 끼어들면서 박스에 턱 부딪혔다.
엇. 하는 사이에 박스는 성하를 쳤고, 성하는 최의원과 부딪치면서 휘청 거렸다. 최의원이 놀라서 성하를 잡았다. 성하는 겨우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직원에게 벌컥 화를 냈다.
“왜 사람을 밀어?”
직원은 억울했지만, 상대는 고객이고 노인네이니까 무조건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안 다치셨어요?”
성하는 최의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최의원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옆에서 중년 여인이 최의원의 팔을 잡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관객들에 섞여서 최의원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성하는 다시 뒤뚱대면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가쁜 숨을 들이쉬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공연이 끝나고 최의원은 웃으면서 예술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뮤지컬은 역시 오페라보다 덜 지루했다. 그래서 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시간을 들이기에 괜찮은 공연이었다.
현관으로 나서자, 승용차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와서 섰다. 누군가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뭐하는 놈인지 모르지만, 줄곧 곁에서 커피도 주고, 말끝마다 웃어주는 등 아부를 했다. 눈도장을 찍겠다는 건데, 미안하지만 이놈아, 난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 인사해도 몰라. 기억 안 하지. 달려들어서 인사하는 놈이 한두 놈이어야지.
차에 오르고 느긋하게 기대앉아서 차창 밖을 보았다. 사람들이 우산을 쓰거나, 혹은 비를 피해서 주차장을 향해 달려갔다.
“어디로 갈까요?”
기사가 돌아보았다.
“미조리.”
“아, 예.”
좀 멀지만 그곳에서 동지들을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다. 무엇보다도 오래된 집이라서 좋다. 어릴 적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가던 집이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그 집을 다녔다고 했다. 일제 시대부터 있던 집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동지들을 만나도 술에 취할 기분이 아니다. 머리 아픈 일이 일어나고 있다.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심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여기저기 힘을 빌려야 했다. 그래서 윗분에게 소위 쿠사리라는 걸 좀 먹었다.
해결할 일은 그뿐 아니다. 여러 가지로 골 아픈 일들이 산적해 있는 가운데, 그런 골 아픈 일들을 다 밀어낼 만큼 큰일이 터졌다.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전화가 왔다.
“음. 그래. 지금 막 나왔네.”
전화는 일본에 가 있던 정보국의 해외팀장이다.
“들어온 소식이 있나?”
‘오두진 아시죠?’
“오두진? 아, 부산 사건 맡은 검사?”
‘자위대 정보군에서 온 연락입니다. 오늘 정보군에서 보낸 자와 접촉이 있었답니다.’
“오두진이 눈치챈 게 맞지?”
‘예. 확실합니다. 그리고 몰래 특별팀까지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 좀 괜찮은 팀이 들어온 건가?”
‘예. 제대로 온 것 같습니다. 모사드에서 데리고 온 요원들과 합작으로 공작에 들어갔답니다.’
“오두진에 대해서는?”
‘절대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두고 보라고 합니다.’
“미친놈들. 자기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이용할 곳이 많다고 하는데요?’
“알았어. 내가 이야기 해놓을게. 오두진이 해달라는 건 모른 척하고 다 해주라고.”
‘오늘 회합이 있으시지요?’
“그래. 내일 보자.”
‘예.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전화를 끊었다. 재미는 개뿔. 머리 터진다. 즐겁게 술 마실 자리는 아닐 것 같다.

비가 거세졌다. 성하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작은 호텔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누웠다.
앞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현회장 집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에 대해서 조명하고 있었다. 조직폭력배들의 싸움이냐, 아니면 단순한 강도냐, 단순한 강도라면 경호원들을 그렇게 해칠 수가 있느냐,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해야 한다. 경찰은 뭐하냐. 전문가들이 전문가답지 않게 떠들고 있었다.
성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전 전화기에 비해서 요즘 전화기는 소리가 커서 좋다. 스마트폰은 확실히 도청에 유리하다. 도청기는 최의원의 양복 윗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자기가 입은 옷의 주머니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뒤져보지 않는 주머니이고, 가장 목소리를 잘 잡아내는 위치에 있다.
모사드. 그들이 와서 무언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위대 정보군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들이 나타나주면 오히려 상대방 커넥션을 파악하는 데 더 보탬이 되겠지만, 모사드는 아니다. 모사드가 나타나면 긴장해야 한다.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상대가 모사드일 것이다. 그들은 잠재적 조력자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청부업자들과의 거래선을 전 세계에 가지고 있다.
성하는 먼저 타격해야 할지, 아니면 덫을 놓고 기다려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만일 섣불리 건드리면 너무 쉽게 자기 위치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기다리면 일을 진행할 수가 없다. 시선을 돌리고, 상대를 놀라게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멀리서 터지는 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혼선이 온다.
이어폰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타협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해요. 그냥 제거해야 했다니까.”
“말이 쉽지 어떻게 제거합니까? 얽힌 게 한두 가지입니까?”
“그럼 죽은 걸로 하기보다 법정에 서게 했어야지요.”
“답답합니다. 법정에 서서 마음이 변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리가 없죠. 아무리 배신감을 느껴도, 역시 믿을 건 지금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일 한두 번 처리합니까? 세월 좀 지나게 했다가 슬며시 풀어주면 그만인 것을…”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후의 일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 회사의 실제 주인이 밝혀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입니다. 끝장.”
“그 전에 정리해야지요.”
“말은 참 잘도 하십니다. 최의원님께서는 전번에 만나서도 그렇게 장담 하시더니 결과가 이게 뭡니까?”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세요. 최의원님이라고 노력을 안 하셨겠습니까?”
“그래요. 무엇보다도 이번 교과서 문제는 정말 활약이 대단하셨습니다.”
“아, 그거야… 이제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고생이 보람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인쇄 다 끝났지요?”
“제본까지 다 끝나서 곧 배포될 예정입니다. 아, 무려 80 개 학교예요. 80 개 학교.”

시끄럽게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성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창가로 가서 섰다. 창밖의 비가 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지랄맞게 변하기 시작했다. 2 월에 폭설이라니. 지난해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녀가 살아있던 세상은 이렇게 지랄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차갑기는 했지만, 봄비였는데. 그나저나 다 만들어진 책들은 어디에 쌓아놓나?



3.

“부산 시내의 CCTV를 죄다 뒤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달맞이길 일대를 사건 시간만이 아니라 그 앞뒤로 몽땅 뒤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 가운데 어디에서인가는 프리랜서의 모습이 보일 거라는 말이죠. 청소부가 아니라, 다른 복장의 프리랜서가 나타날 거라는 말이죠.”
두진이 수사본부에서 브리핑을 했다. 공반장 이하,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다. 저녁 시간까지는 수사본부에서 모든 수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결과를 가지고 밤에는 따로 오피스텔에서 분석하고, 하라와 마리가 주는 정보를 보태서 다시 회의를 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인력과 시간으로 싸우는 겁니다. 탐문도 중요하고 다른 모든 게 다 중요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CCTV입니다. 범인이 어디에 숨어있는가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공반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이미 부산을 벗어났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역이나 터미널에서라도 나오겠지요. 부산에서 계속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서 부산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두 사건이 연관이 있다고 보고 수사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두 사건은 하나라고 보아야지요. 생각을 해보세요. 범칼이 당하고, 장철희가 일본으로 달아나고, 현회장이 죽은 겁니다.”
“역시 조직들의 싸움이군요.”
공반장이 단정하듯 말했다. 두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회의가 끝나고 오피스텔로 갈 때에는 각자 나뉘어서 갔다. 대운이 나설 때에 공반장이 대운에게 뭘 하고 다니느냐고 나무라는 소리를 얼핏 들었지만, 두진은 못 들은 체 그냥 나왔다.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와서 순댓국을 시켜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그들이 숨어들 만한 장소를 찾는 데에 전력을 쏟을 작정이었다. 일단 좁혀 들어갈 만한 개연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 타당성 조사에서 수색할 지역이 잡힐 것이다.
“서울 소식 없어?”
“담당이 바뀌었는데, 뭐 제대로 아는 게 없던데요?”
대운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럼 전임자를 찾아야지.”
“전임자가 형사 그만두었던데요?”
“응? 왜?”
“모르죠. 뭐, 수사하다가 부딪쳤는지, 아니면 사적인 일이 있었는지… 그냥 사표 던지고 나갔답니다.”
“그래?”
두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무언가에 부딪친 것 맞나?
“그 사람 찾을 수 없을까?”
“알아볼게요.”
영란이 대답했다.
“그리고 장소에 대해서 각자 생각한 걸 좀 말해 봐.”
두진이 지도를 펼치자, 대운이 자기 노트북을 펼치면서 말했다.
“도시에서 제일 사각지대가 어디인가를 좀 보았습니다. 그런데 검사님도 아시다시피 부산이 워낙 산동네도 많고 복잡해서 도무지 집어낼만한 곳이 없습니다.”
“변두리에 어디 한적한 곳이 아닐까요? 냉동창고나 이런 곳은 이미 다 뒤졌는데 없었으니까 결국은 어딘가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은신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영란이 의견을 말했지만, 두진은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런 곳은 초보자들이나 선택하는 거야. 어딘가 복잡한 곳을 택했을 거야.”
“복잡한 곳이라면 시내인데, 사람들 눈도 많고 CCTV도 많은 그런 곳을 택했을까요? 경찰도 물론 많고요.”
“대신 스물네 시간 돌아가고, 무언가… 말하자면 생필품을 산다던가, 먹고 마시기도 좋은 곳이 시내 아닐까?”
“시내 아니고도 그런 곳은 있죠.”
대운이 말했다.
“어디?”
“공단이요.”
“공단? 어느 공단?”
“장림공단도 그렇고, 사상 지역도 그렇고, 전부 스물 네 시간 들락대고 바쁘죠. 소리 나도 아무도 신경 안 쓰고요.”
“공단 좋다. 공단 뒤지게 해보자.”
영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부산에 있다고 보장할 수만은 없는 거 아닌가요?”
“그야 다음 사건 나면 알겠지.”
두진의 말에 영란과 대운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건이 또 일어날 거라고요?”
“어떤 심증이라도…”
두진이 피식 웃었다.
“프리랜서가 시작한 일을 하다가 말겠냐? 우리가 잡지 못했는데 멈추겠어?”
“에이…”
영란과 대운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그때, 두진의 새로 만든 선불폰이 진동했다.
“오검사입니다.”
“저희 회사로 좀 와주시겠어요?”
전화를 끊고 일어났다.
“마리다. 걔네 안가로 가자. 셋이 같이 가. 영란씨는 통역. 대운이는 운전. 난 검사니까 편하게 졸면서 간다.”
영란과 대운이 황당해서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