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 명 오유호
전 장 125.95 m
폭 23.50 m
깊 이 (UPPER DECK) 12.60 m
만재홀수 5.60 m
평균속력 24 knots(MAX)
총 톤 수 6,765 톤
여객정원 562 명

‘지금 팽목항 앞 바다에서는 밤새도록 지상 최대의 구조작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해군과 해군구조대, 소방 잠수요원, 민간 잠수사, 문화재청 해저발굴단 등 구조대원 726 명이 동원됐고 함정 261 척, 항공기 35 대 등의 장비가 집중 투입되어서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지나간 뉴스에서는 쉴 새 없이 헬기와 선박들이 몰려들어서 구조작전을 펼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성하는 인터넷으로 지난 뉴스와 자료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성하가 두진에게 보낸 자료들은 나름대로 앞뒤가 확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조작전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수중작전 훈련을 받은 성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니까 알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작전이었다.
선박 운항이나 보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고는 이해하겠는데, 지식이 있는 구조작전은 이해가 안 가는 모순이 사방에 존재했다.
그 모순들이 성하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했다. 정리해보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짓으로 점철되어 있다.

첫째, 선박이 넘어갔다면, 침몰하기 전에 가장 먼저 주변에 있던 바지선이나 대형 유조선에 견인줄을 묶어서 배가 더 가라앉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나중에 가서야 풍선을 매달아서 버티게 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여객선들은 보통 6 천 톤에서 7 천 톤이다. 풍선으로 버텨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노력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행위이지, 구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행위였다. 왜 그런 걸까?

둘째, 배에 원래 있던 구명정을 전혀 풀어내지 않았다. 무조건 풀어야 했다. 자동으로 안 된다면 수동으로라도 해야만 했다. 바다에서는 페트병 하나, 박스 하나도 보탬이 되고, 망가진 구명정도 잡고 버티는 도구가 된다. 뭐든 바다로 던져야 한다. 하다못해 아이스박스 하나도 훌륭하다는 걸 선원들도 해경들도 몰랐다는 것일까?

셋째, 구명대를 입고 기다리라는 방송을 했다. 침몰하는 배에서는 무조건 나와야 한다. 침몰 후에는 나올 수가 없으니까 나와야만 했다. 그러니까 전부 나오라는 방송을 해야만 했다. 구명대를 입는 게 문제가 아니라 들고 뛰어나와야 한다. 만일 배가 완전히 뒤집어졌다면 그때는 구명대를 입고 나올 수 없다. 구명대를 입은 상태에서는 배 안으로 밀려들어가서 결국 갇힐 수밖에 없다. 잠수훈련을 받은 성하 자신이라도 구명대를 입고 물속에 있는 배에서 빠져나올 자신은 없다. 근처에 달려와 있던 유조선의 선장은 나오게만 하면 다 구조하겠다고 해경 관제센터에 연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보내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넷째, 누군가를 구하려고 배로 진입할 때에는 무조건 배의 후미로 가야만 한다. 모든 배는 후미에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특히나 배가 물에 드러누워 있을 때에는 모든 층으로 진입할 수 있고, 안에서도 튀어나올 수 있는 곳이 바로 후미다. 그래서 모든 어선들은 후미로 달려들었는데, 정작 해경의 구조정은 배의 선수로 갔다. 그리고 함교의 선장과 선원들만 구조하고는 급하게 사라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다섯째,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부대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잠수부대다. 그런데 그런 잠수부대를 전혀 투입하지 않았다. 구조활동은 초기 대응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초기의 몇 분 몇 시간만 똑바로 하면 대부분을 구출할 수 있다. 설사 초기 대응을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잠수부대를 투입해야만 했다. 왜 그들의 진입을 막았을까?

여섯째, 구조는 타이밍이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왜 먼저 달려와서 구조선을 구축한 바지들을 빼고 다시 특정 회사의 구조작업을 고집하면서 시간을 낭비했을까?

일곱째,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배가 물속에 가라앉은 상태에서는 생존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해저 몇십 미터 아래에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훈련된 잠수부라고 해도 한동안을 물 아래에서 감압을 하고 물 위로 올라와야만 한다. 그런데 감압장비도 없이 도대체 어떻게 구조하겠다고 계속 들어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들어가서 구조한 다음에는 어떻게 물 위로 데리고 올라오려는 계획이었을까? 잠수부들처럼 잠깐 물속에 있었을 경우에는 물 위로 와서 감압챔버에 들어가 치료를 받는다고 하겠지만, 물속에 오래 머물렀던 구조자들은 지상으로 올라오면 거의 생존확률이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을 수중에서 감압할 장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게 다이빙벨이었다. 다이빙벨은 대단한 장비가 아니다. 이미 전 세계에서 수백 년을 사용해온 장비다. 그리고 그 장비의 효용은 단순한 원리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애용되어 왔다. 잠수부들이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연속적으로 작업할 수도 있고, 위험에 노출되지 않은 채 서서히 감압을 할 수도 있는 시설이다. 왜 그런 장비의 투입을 초기부터 끝까지 거부했던 걸까?

성하는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누가 핵심을 잘 알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 전체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필요했다. 보험사기를 시작한 건 김중식이었지만, 그 후로는 김중식이 컨트롤할 상황이 아니었다. 김중식도 그다음 일들에 대해서는 거의 멘붕이었다고 했다.
김중식은 무언가를 위해서 자신의 몰락을 시도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절벽 같은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잘 짜인 각본대로 매스컴과 지지 세력을 조종했다. 각 분야에 박혀 있는 추종자들을 이용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추고 없애고 바꿔버렸다.
김중식을 오래 심문했지만, 끝내 김중식에게서 들을 수 없던 한 마디는 바로 그 거대한 벽의 실체였다. 경험으로 장담하건대, 김중식은 그 벽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다.
성하는 녹화해두었던 김중식과의 대화를 다시 틀었다.

보험사기를 기획한 건 누굽니까?
- 내가 했지. 내 배고, 내 회사니까.
스스로 바지사장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 자본을 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게도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운영하는 책임이 있는 걸세.
충성심?
- 충성심이 아니라도 누구나 사업을 하면 적자를 벗어나려고 애쓰지.
보험사기는 범죄지, 기업활동이 아닙니다.
- 기업가는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이야. 한쪽은 합법이고 한쪽은 불법이지. 그러니까 언제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몰라. 오히려 자네 같은 사람은 사업 자체가 불법 아닌가?
사고를 위해서 일부러 화물을 제대로 고발하지 않은 겁니까?
- 아닐세.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기도 있나? 이번 사고에 대해서는 극히 적은 인원만 알았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안 겁니까?
- 우리 배에서는 함교 인원과 나만 알았지.
외부에서는요?
- 최영석 의원과 김정국 총장이 알았지. 내가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그게 당신과 같이 일한 전부입니까?
- 내가 닿는 선은 그게 전부일세.
당신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내게 모두 알려주지 않으면 당신이 죽습니다.
- 내가 이제 와서 무얼 감추겠나? 나도 이제 자네처럼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네.
반대편은 아니죠. 나는 반대편이지만, 당신은 그냥 지척에 널브러져 있는 겁니다.
- 무슨 말인가? 나도 이대로 쓰러질 마음은 없네. 자네가 날 살려낸 만큼 같이 싸워줄 마음도 있네.
하하. 재미있네요. 평생을 먹여주고 재워주던 주인이 나무에 매달려고 했으니, 이제 주인의 손등이라도 물어보시겠다?
- 못할 것 같은가?
못할 겁니다. 개는 늑대가 아니니까요.
- 늑대?
개와 늑대는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동물이죠. 개한테는 주인이 있지만, 늑대에게는 신이 존재합니다.
-그럴듯한 말이군.
그러니까 주인 물어뜯을 생각 말고 새로 분양되었다고 생각하고 나한테 협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면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테니까 말입니다.
- 자네 참 심한 말을 쉽게 하는군.
내가 말만 쉽게 하는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 무섭게 그러지 말게. 자네의 실력은 충분히 보았으니까.
실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승부는 언제나 얼마나 나쁜 놈이냐에서 판가름이 나죠.
- 기막힌 말만 하는군.
악당이 그것도 모르십니까?
- 거참…
아, 당신은 악당이 아니라, 악당이 기르는 개였지요?
- 이런 식이면 대화 안 하려네.
누구 마음대로 안 합니까?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이보게. 자네… 그러니까 이름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맹골수로를 택한 이유는 뭡니까?
- 일단 남해로 나가서는 안 돼. 망망대해에서 브레이크를 걸면 구조대가 빨리 달려오지 못하잖아? 인명피해는 안 되지.
그런 걸 생각은 하셨습니까?
- 그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큰 사고를 일부러 생각하겠나?
인명 피해가 많으면 보험금이 늘어나지 않습니까?
- 난 그 정도는 아닐세. 나도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게 된 대형사고였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쉽게 배가 가라앉고 하나도 구하지 못하게 된 건지 난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난들 이런 꼴이 되고 싶어서 되었겠나? 하루아침에 이렇게 줄 떨어진 연처럼 되고 싶어서 되었겠느냐는 말이야.
그런데 승객들 다 놔두고, 어린 학생들 다 놔두고 선원부터 뺍니까?
- 나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난 전부 나오는 걸로 알았다는 말이야. 빌어먹을… 바로 앞에 유조선이 와 있는데, 주변에 어선들이 천지사방에 깔렸는데, 어째서 애들을 거기 그냥 두느냐는 말이야?
그렇다고 칩시다. 뭐 누가 옳으냐를 따질 만큼 내가 정의로운 인물도 아니니까.
- 그 사고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망가진 것이냐는 자네도 알 것 아닌가?
망가졌죠. 그런데, 아무리 망가져도 자식을 잃은 사람보다 더 망가졌겠습니까? 한국 속담에도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요.
- 나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일세. 난 그런 사고를 원하지 않았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겁니다.
- 나도 알아. 안다고.
안다고 하지 마십시오. 두 번 안다고 말하면 당신을 기르지 않고 지금 솥단지 안에 넣어버릴 겁니다.

대화를 다시 돌려보면서 느낀 건 단 하나다. 김중식에게 몽땅 미뤄버렸지만, 그 이면에 다른 게 있다. 김중식은 알 수도 없는 거대한 벽이 있다.
결국 최영석 주변만 캐서는 안 되는 일인가?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2.

새벽이 다 되어서야 최영석은 김정국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대변인 시켜서 발표하랍니다.’
“어떻게?”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매스컴에서 논조를 띄운다고 하니까 오후에 발표할 때쯤에는 발표가 먹힐 겁니다.’
“겨우 반나절에?”
‘반나절이라도 출근시간부터 집중해서 내보내고, 조직을 동원해서 댓글 돌리고, 소요에 대비해서 관변의 동원인원을 준비해두라고 하겠습니다.’
“보통 시위가 아닐 텐데?”
‘이미 시위는 격화되고 있습니다. 지금 국과수에까지 몰려들고 있습니다.’
“난리가 아니군.”
‘그래도 내일부터는 맞불 놓고 매스컴에서 떠들고 하면 금방들 피로를 느끼니까 힘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갈 텐데? 작년보다 더.”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국과수에서도 한다던가?”
‘의원님께서 발표하시면 뒤따라서 할 겁니다. 이왕 하는 거니까 내일 하루에 몰아치라고 합니다. 곧 선거가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밀어붙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귀하고 귀한 골든타임 다 날아간 판국이라고 보통 역정이 아니십니다.’
“알았어. 해보자. 해봐.”
‘저희도 죽겠습니다. 저희는 오전에 발표입니다.’
“오전?”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았어. 메일 볼게.”
‘아, 그리고 내일 아침 식사는 손님들하고 같이 좀 드시랍니다.’
“손님들?”
‘있잖습니까? 모사드에서 나온 여자하고 일본에서 온…’
“지금 그런 인간들 만날 여유가 어디 있어?”
‘만나야 하니까 만나라고 하시겠죠.’
“뭐?”
‘만나보십시오.’
“어디서 언제?”
‘이메일에 적어놓겠습니다.’
“빌어먹을 정말…”
전화를 집어던져버렸다.

성하는 이어폰을 빼고 노트북을 펼쳤다. 외국 메일을 사용해서 해킹을 하라면 힘들었겠지만, 최영석은 모든 비밀번호를 하나로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메일을 열 수 있었다.
메일의 내용은 예상한 대로였다. 수습의 방식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관심이 끌리는 것은 아침 약속이었다. 부산에서부터 인지한 모사드와 일본 형사.
제거하려다가 그냥 두었다. 수색병들을 제거하는 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수색병들은 많다. 그리고 수색병을 건드리면 더 많은 병력이 온다. 그 병력이 클리어 되면 더 강하고 많은 병력이 몰려온다. 그러니까 수색병을 발견했을 때는 움직임만 보는 게 좋다.
그런데 그들이 무언가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서 다시 접촉하고 있다. 부산에서 쫓다가 실패하고 나서 잠시 움츠리고 있던 상대들이 다시 지상으로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모사드는 국내의 상대들처럼 쉽게 도청을 따거나, 이메일을 해킹할 수 없다. 미행도 만만치가 않다. 세계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도 어쨌든 오늘을 기회로 안전가옥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안전가옥에 들어가야겠다.
오늘은 고단한 하루가 될 것 같다.

새벽 다섯 시, 마리는 하라와 함께 이태원의 오피스텔을 나섰다. 이태원은 온갖 인종이 다 모여 살기 때문에 외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아서 좋았다.
평소의 매뉴얼대로 오피스텔의 꼭대기 층과 일 층을 동시에 얻어서 일 층의 상가는 하라가 사용하고 꼭대기 층은 마리가 사용했다. 회의는 주로 커피숍에서 했다. 커피숍의 테라스는 거의 비어 있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대화하기 좋았다.
한국에 와서 가장 실망한 것은 한국의 정보기관에 대해서였다. 서로 협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접근했다가, 공조수사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들은 정보국 고유의 공작보다 정치 쪽에 더 치우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보국의 가장 중요한 국외 공작보다 국내 대민용 공작에 더 주력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이데올로기 싸움을 오래 하다 보니 생겨난 체질 같았다.
오히려 협조를 받고 싶은 쪽은 검찰이었다. 그래서 검찰에 접촉했지만, 비협조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검사는 정치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간이 바로 출세지향적이지 않은 인간이다.
결국 상대하기 가장 쉽고도 편리한 상대를 찾았다. 그게 바로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접근하자마자 반갑게 맞아들여주었다. 그들에게 어떤 속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테러에 관한 문제로 협조하는 선을 넘어서 엄청나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밀착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정보를 넘겨주는 건 망설여졌다. 차라리 다시 오두진이라는 인물을 찾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마음대로 공작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그의 지난 행적과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모사드의 불법공작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만일 총기라도 사용하게 된다면, 앞뒤 안 가리고 잡아넣으려고 들 것이다. 잡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강제출국은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총기를 사용하지 않고 프리랜서를 잡을 방법이 있을까? 치안이 세계적이라는 이 나라에서는 아직 모르는 게 있다.
테러리스트를 모른다.

하라는 택시에서 내려 한국의 정치가와 아침을 먹기로 한 호텔로 향했다. 마리는 아침부터 무엇인가 못마땅한 듯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라는 마리와 호흡을 맞추고는 있지만,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함께 다니면서 본국의 정보군에 정보를 제공하는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강력계와 특별경찰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능력을 가진 테러리스트를 상대할 능력은 없었다.
“프리랜서는 지금 만나는 정치가 주변에 있어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우리는 그에게 바짝 붙어야 해요.”
마리는 정치가와 연대를 원한 게 아니라, 정치가의 경호를 원했다. 그녀의 팀원들은 이미 최의원 주변에 멀찍이 포진하고 있지만, 정치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면, 마침내 프리랜서가 나타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그가 당하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협조되지 않으면 그냥 당할 뿐이다.
프리랜서를 잡으려면 서로 간의 인식이 필요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행동의 제약을 인정하고 따라주어야 한다.
“잘 안 될 거요. 여기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저번 사건들로 충분히 인식하지 않았겠소?”
“충분하다면 이렇게 텔레비전 쇼를 하는 데에만 몰두하겠어요?”
“그거야 정치가들이 즐기는 프로그램 아니오? 이를테면 트루먼 쇼 말이오.”
“그 사람들한테 중요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프리랜서를 빨리 잡는 일이라는 걸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난 여전히 궁금한 게 프리랜서가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오.”
“김중식도 모르는 걸 누가 알겠어요?”
“김중식이 모른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지 않소? 내 생각에는 어쩌면…”
“김중식이 프리랜서에게 넘어갔다고 믿는 건가요?”
“넘어갔거나, 무언가 약점을 잡혀서 꼭두각시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소?”
“다케다처럼 말인가요?”
“그렇든 아니든…”
호텔 앞에서 검은 양복의 사내 둘이 다가오더니 안으로 안내했다.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한식당의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서 들어가자, 최영석이 일어서면서 맞이했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서로 대화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마리는 최영석에게 프리랜서를 잡아야 일이 끝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리랜서가 계속해서 계획하고 일을 저지르면 그때마다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니, 프리랜서를 잡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최영석은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이미 세워놓고 있다고 응답했다. 마리나 하라도 이미 아는 인물이 귀국한 걸 의미하는 듯했다.
“우리도 그의 귀국을 알아요. 그의 능력은 알지만, 그런 사람 하나를 믿고 있다가는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다른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다른 대비책이라는 게 뭡니까?”
“의원님의 경호를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내 경호는 우리나라 경호원들이 다 있어요. 그리고 당신네가 내 경호를 굳이 하겠다는 이유는 뭐고?”
“프리랜서가 의원님 주변에 접근해 있다는 게 우리들 판단입니다.”
“그럼 내 주변에 잠복하면 되는 거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의원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협조해주면 되겠소?”
마리가 핸드백에서 작은 전자기기를 꺼내서 탁자 위에 놓고 스위치를 켰다. 파일럿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신호음이 삐삐 대며 울리기 시작했다. 최영석은 놀라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마리가 기기를 최영석에게 가져가자, 신호는 더 맹렬하게 울었다. 그리고 결국 최영석의 허리에 가서 파일럿 불빛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내 벨트?”
마리가 물러나면서 말했다.
“벨트 맞습니다.”
최영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벨트를 풀러내서 마리에게 내밀었다. 마리가 받아서 벨트의 버클 부분을 뒤집어 보았다. 멀쩡한 그냥 벨트였다. 버클은 뒷면은 스테인이고 앞면은 가죽 장식이었다. 앞부분의 가죽을 벗겨냈다. 그 안에서 수은전지처럼 생긴 작은 칩이 나왔다.
“아니? 내 벨트에 어떻게…?”
“항상 하시는 벨트인가요?”
“그렇지. 항상 하는 벨트요. 도대체 어디서…?”
최영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집에 침입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벨트에 도청장치를 넣을 수 있겠나? 세탁소에 옷을 맡겨도 벨트는 빼고 맡긴다.
“최근에 사우나에 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목욕은 집에서만 합니다.”
“골프를 치러 가실 때에는요?”
“골프옷을 입고 가지. 하지만 요즘은 골프 칠 겨를이 없었는데…?”
“여하튼 도청장치를 심었습니다. 아마 심었다면 벨트만이 아닐 겁니다. 다른 옷들에도 많이 심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니까 경호를 해드리고 싶은 겁니다.”
최영석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집무실과 집에도 이런 게 있을 거라는 말이오?”
“가능성이 있습니다.”
“허어… 기가 막히군,”
최영석은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해하기 어렵다. 프리랜서가 자신에게 이 정도까지 접근했다면, 왜 자신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았을까?
“프리랜서는 의원님을 노린 게 아니라, 의원님의 주변을 노리는 데에 의원님을 이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날 이용한다는 건…?”
“의원님께서 만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의원님께서 오두진 검사님 팀과는 별도로 특별수사팀을 만든 것도 이미 안다는 의미이고, 대책이라고 세우신 것도 전부 프리랜서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쪽에서도 우리한테 다른 팀이 있다는 걸…”
“저희도 아는 이유를 물으시는 겁니까?”
“그, 그렇지.”
“저희도 도청하는 걸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마리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도청하지 않아도 누구나 눈치챌 만한 상황이잖아요? 검사 한 사람한테 큰 사건을 맡겨놓고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요? 이보다 작은 일에도 검사 서넛에 수사관 수십 명은 붙지 않나요? 그런데 검찰 수사관은 아예 없고 검사 한 명에 경찰 몇 명이면…”
“그런가?”
최영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리하네. 예리해. 응.”
“우리 생각에는 오두진 검사도 그런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서로 공을 다투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가장 나쁜 시스템이 되어서 돌아가는 것은 확실하지 않나요?”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건 아닌데?”
“속생각은 빼고 공유하겠죠. 계획도 그렇고요. 그런 상황이어서 위험하다고 느끼니까 우리가 밀착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
“적어도 도청을 당하거나, 정보에서 막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능력이 있나? 아무리 모사드가 대단하다고 해도, 여긴 한국이야. 다른 나라들하고 시스템이 다르다고. 여긴 분단국가야. 아니. 전시국가지.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엉성해 보여도 아주 빡빡한 곳이야.”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였다면 이런 부탁도 드리지 않습니다.”
“어? 그런가요? 다른 나라에서는 뭐 그냥 막 총질로 해결하고 그러나?”
하하하. 최영석은 길게 웃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호쾌하게 승낙했다.
“좋아요. 좋아. 내 경호팀이라고 해둡시다. 여하튼 같이 가봅시다.”

최영석은 마리와 하라가 떠나자마자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일을 진행하길래 우리들 일을 모사드까지 죄다 아는 건가? 우리 비밀팀에 대해서까지 다 알아. 정신들 못 차리는 건가?”
‘모사드라면… 그 여자가 혼자 들어온 것으로…’
“혼자라고 볼 수 있나? 여기 조력자들이 엄청 심어져 있겠지. 블랙이든, 화이트든.”
‘그럴 수도 있겠지요.’
“뭔가 새어나가는 구멍이 있어. 그거 조심하라고 했잖아. 이번만큼은 우리 외에 이 세상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거 이해 못 했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도청당하고 지내는 것도 자네 팀에서는 몰랐잖아?”
‘예?’
“오늘 발표 끝나고 보세.”
‘예. 알겠습니다.’
최영석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려드는 일은 겪어본 일이 없다. 작년의 그 끔찍했던 사고에서도 벗어났는데, 다시 딱 일 년 만에 봄이 되어서 이렇게 꼬이다니. 미칠 일이었다.
정말 돌아버리겠군. 최영석은 발표할 문안을 보면서 쓴 입맛을 다셨다.



3.

빗방울이 머리칼을 스쳤다. 봄이 된 건가. 두진은 사무실로 들어서다 말고 공원 주변을 서성거렸다. 오후의 어둑한 날씨가 봄 같지 않은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무언가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 보통 범인이 누구인가를 모를 때에는 범인을 찾아내야 해서 힘이 들 수밖에 없다. 혹은 범인의 범행을 증명하기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역시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결국은 방법을 찾게 마련이다.
그런데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범행의 증거도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 못하고 있다. 범인은 대담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움직이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더 미치게 하는 건, 범인이 거꾸로 수사팀을 감시한다는 점이다.
특수팀이 따로 가동되고 있는 건 두진도 잘 알았다. 공안 담당팀과 기관이 합동으로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와 별도로 두진을 내세우고 있는 건 그야말로 ‘잘못되면 네가 다 뒤집어써라’ 하는 말이다.
물론, 그런 게 무서우면 사건에 달려들지도 않았고, 비밀리에 안전가옥을 만들고 독립적으로 수사하지도 않았다. 수사에 걸림돌이 될까 봐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를 바랐고,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를 아는데, 순식간에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모든 걸 걸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건드리고 보니, 늪에 빠진 느낌이다.
세상은 난리가 났다. 오후의 경찰이나, 정부 발표는 엉망이었다. 여당의 당 대표까지 나서서 대변을 했고, 모든 걸 가릴 수 없으니, 어느 선에서 책임을 지느냐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서 넘어가질 일이 아니지만, 매스컴은 정부를 도왔다. 정부를 돕는 매스컴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해둘 수 있다.
문제는 반응이다.
어릴 적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면서 ‘받아라, 침략자들아!’라고 외치는 영화배우의 외침에 공감하지만, 나이가 들면 고개를 갸웃대게 되어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쳐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 미치던 어린 시절에는 서부의 기마병들이 인디언들과 싸울 때면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 기병대를 응원했지만, 고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인디언의 입장이 되기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한때는 매스컴을 믿었던 관객들이 어느 순간에 매스컴을 믿지 않기 시작하면 매스컴은 그 힘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정부를 신뢰하던 국민들이 한 번 정부가 자신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다음의 파장은 상상 밖으로 무섭다.
김중식의 생존은 모든 국가기관을 통째로 흔들었다. 북한 소식을 하루 종일 틀어대고, 국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작자들을 몽땅 종북세력으로 몰아쳐도 더 이상은 ‘종북’이라는 마술지팡이가 통하지 않는다.
북한은 더하니까 감사한 줄 알고 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대한민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웃기는 국가로 인정되는 북한 따위에 비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없어지면 애국심에도 문제가 생기고 의욕과 희망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통제도 힘을 잃는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붕괴다.
가끔 연수원 동기들 중에서 판사가 된 친구들이 하는 말이 있다. 판사로 오래 지내다 보면, 누가 나쁜 놈인지를 알게 된다고 한다. 누가 나쁜 놈인 줄을 알면서도 응징하지 못하는 때가 가장 자존심이 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쁜 놈을 응징하기 위해서 관련근거를 찾고, 법리를 해석하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그게 법관이 존재하는 이유니까.
검사도 마찬가지다. 검사가 사회를 바꾸거나 시스템을 흔들 수는 없다. 그럴 권리도 능력도 없다. 다만 검사는 자기 앞에 놓인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사회의 안전망 중에서 가장 핵심에 서 있는 존재가 바로 검사다.
그러니까 다른 건 필요 없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시스템이 엉망이 되든 말든, 검사로서 프리랜서를 잡는다. 그게 두진이 현재 원하는 거다. 그 이후는 그 이후에 결정한다. 그 과정도 오로지 프리랜서를 잡는 데에만 집중한다.
프리랜서는 흉악범이고, 살인자이고, 테러리스트다. 그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그를 잡아서 법정에 세우는 일이다.
두진은 그 과정에서 어떤 불이익이 오든, 자기 경력에 어떤 흠집이 가든, 그런 건 관심이 없었다. 신상의 위험도 두렵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프리랜서의 손에 죽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된다고 해서 특별할 게 없다. 검시도 총을 맞으면 죽는다. 칼을 맞아도 죽고, 암에 걸려서도 죽는다.
‘그러니까 피차 목숨 걸고 해보자. 내 손으로 널 잡는다. 내 일생의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잡는다.’
두진은 공원을 서성대면서 생각에 빠졌다. 무언가 걸려들어라. 제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도청되지 않는 선불폰이다. 팀원 모두가 범죄자들이나 사용하는 선불 핸드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검사님. 가리봉동입니다.’
“가리봉동이 뭐?”
‘중국인들 많은 거리 말입니다. 성냥에 있던 그 식당도 찾았습니다. 그냥 양꼬치를 파는 집이었습니다. 거기서 목격자들이 좀 있었습니다.’
아, 중국인들 냄새. 진구가 다른 경찰들과 함께 그 방향으로 수사하고 있었다. 인천 차이나타운과 영등포에서 시작해서 구로동 일대를 탐문하다가 걸려든 소식이다.
“목격자들한테 상세히 진술 받아서 좁혀가게. 난 사무실로 들어가서 기다리겠네.”
‘그런데요. 이게 참…’
“왜?”
‘여기는 그야말로 닭장입니다. 보았다는 큰길에서 안쪽으로 동네 한 곳에 골목골목은 말할 것도 없고, 집마다에 쪽방이 보통 열 개에서 서른 개도 넘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뒤져. 그 근처 경찰을 총동원해서라도 찾아. 사무실로 들어갈게.”
사무실로 달려갔다. 영란도 연락을 받았는지 두진이 들어서자마자 대뜸 달려들면서 말했다.
“검사님. 부동산을 뒤지는 건 어때요?”
“부동산?”
“부동산을 뒤지고, 원룸과 고시원을 뒤져야지요.”
“CCTV는?”
“곧 연락이 올 거예요.”
“그래. 서두르자. 금방 자리를 옮길 거니까.”
곧 CCTV의 결과가 나왔다. 곳곳에서 프리랜서의 모습으로 보이는 인물이 잡혔다. 동선을 보면 가리봉동의 닭장촌 골목 안에서 시흥대로로 나서는 프리랜서의 모습이었다.
“경찰력 다 동원하라고 해. 우리도 가자.”
영란과 함께 사무실을 달려 나갔다.



4.

RM은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CCTV를 보면서 이미 그의 동선을 알 만큼은 알았는데, 프리랜서가 굳이 이런 곳으로 스며들어서 자기 휴식처를 마련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특수팀 사람들은 그곳에 프리랜서가 안전가옥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RM이 보기에는 그런 곳은 다만, 쉴 곳이 필요해서 만들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동안 프리랜서에 대해서 충분히 공부했다. 한국 내에서의 지난 움직임도 파악했고, 지난 시절에 그의 흔적들도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아서 연구했다. 그의 눈에 확실하게 들어온 것은 프리랜서가 이미 한국에서 여러 곳에 안전가옥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모든 킬러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자기가 움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곳곳에 안전가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도주하거나, 이동할 때에 갑자기 위험이 닥치면 아무 곳에나 들어서다가는 독 안에 든 쥐 꼴이 나기 딱 알맞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 자신이 몸을 순식간에 숨길 만한 곳을 마련해두는 것이다.
지루하고 지겨운 짓이지만, 그래도 항상 일 시작 전에 그렇게 해둔다. 도시는 밀림이 아니니까.
그렇게 하고도 그 외에 더 장소를 만든다. 그곳은 작전에 필요한 안전가옥이 아니다. 휴게실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째서 휴게실을 그런 곳에 만들었을까? 그의 행동패턴에 맞지 않는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것은 맞지만, 그만큼 노출의 위험도 큰 곳에서 쉬는 건 문제가 있다. 쉴 곳을 찾는다면 동네 변두리의 상가나 사무실, 오피스텔들이 더 낫다.
권총과 소음기를 챙겼다. 생각은 가면서 하기로 했다. 만일 운이 좋아서 경찰의 수색망에 걸려든다면 튀어나오는 목표를 저격할 기회가 올 수도 있다.
특수팀에서 냉동차처럼 생긴 작전차량과 보조요원들을 지원받고 가리봉동으로 향했다. 요원들은 RM의 확실한 정체는 몰랐지만, 특수부대원쯤으로 생각했다.
가리봉동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경찰차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였고 사복조가 사방에 잠복해 있는 게 보였다. RM은 자기 눈에 보이는 사복 경찰들이 프리랜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는 요원들은 경찰들이 CCTV 중계와 주고받는 무전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RM은 신경 쓰지 않고 지도를 보았다. 큰길은 이미 서서히 사복조와 경찰들로 통로가 막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나다니는 행인이 너무 많았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나서 봐야 공연히 자신만 드러낼 뿐이다.
눈에 익은 얼굴이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형사였다. 승용차 하나에서 검사와 검사 옆에 항상 따라붙는 여형사가 내려섰다. 형사가 인사를 하고 셋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RM은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요원들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진행된 것 같습니까?”
요원이 듣고 있던 헤드폰을 떼면서 말했다.
“부동산들을 뒤지는 것 같습니다.”
“기습은 포기한 듯하군.”
“우리도 진입할까요?”
“아니. 늦었습니다. CCTV를 믿는 게 더 낫습니다.”
“그거라면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려봅시다.”
요원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고 RM은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한 상태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눈에 익혀야 한다. 빌어먹을 골목들은 밀림보다 더 방향감각이 없어질 수 있다.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지만, 목표를 그렇게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요원 하나가 소리쳤다.
“CCTV에 잡혔습니다.”
CCTV 중계화면을 보자, 경찰 하나에게 검문을 받던 사내가 경찰 둘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지나가는 모습이 비쳤다. 한눈에 보아도 전문가 솜씨다. 검은색 위아래 트레이닝복을 입고 흰색 스포츠백을 어깨에 멘 모습이었다.
RM은 입고 있던 점퍼의 쟈크를 채우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차에서 내리면서 외쳤다.
“중계해줘요.”
“지도에 있는…”
“그 위치는 아니까 이동 경로만 말해주면 됩니다.”
CCTV에 확인된 방향은 빌딩들이 있는 신시가지로 넘어가는 방향이었다. 그쪽이라면 CCTV가 많아서 추격팀에게 더 유리하다. 목표는 그런 걸 몰랐을까? 모를 리가 없다. 그 방향으로 가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철역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나타났습니다.’
빌어먹을. RM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전철에 타버리면 끝이다. 경찰들이 제대로 막아주면 고맙겠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전철이 오지 않아준다면? 그런 일 또한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도시에서는 계엄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전철역이 보이는 큰길로 달려가는데, 멀리서 경찰차들이 줄지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반대편에서도 역시 경찰차들이 몰려들었다. 전철역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해서 두리번대면서 전철역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RM은 전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경찰들도 달려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아니라는 판단이 왔다.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여주면 프리랜서가 아니다. 자신을 비롯해서 다들 속고 있다고 느꼈다.
옷차림을 생각해야 했다. 검은색 위아래 트레이닝 복장이라면 너무 눈이 쉽게 뜨이는 복장이 아닌가? 대신, 그런 복장은 갈아입기도 편한 복장이다. 게다가 모자조차 쓰지 않았다.
길 건너의 전철역을 바라보며 골목에 몸을 숨겼다. 더 이상은 CCTV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연락이 없다. 품속의 권총을 꺼내서 소음기를 부착하고 언제라도 꺼낼 수 있도록 뒤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전철역에는 나타나지 않을 게 틀림없다. 나타난다면 복장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래도 전철을 타지는 않을 것이다.
골목에 서서 전철역을 바라보면서 주머니 속의 지도를 꺼내들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CCTV 위치와 간격을 검토했다. 중간에 골목들이 수두룩한데 CCTV는 없는 외진 곳을 찾아냈다.
가보기로 하고 다시 주변을 가늠한 다음, 이번에는 눈에 뜨이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뒤허리춤의 총을 앞섶으로 옮겨서 손에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옷깃을 올린 채로 비 때문인 듯이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땅거미가 몰려들고 있는 데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다들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걸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지나치는 사람이든, 자전거든, 하나씩 체크하면서 걸었다.
가끔 비좁은 골목을 차들이 비집고 지나가서 멈추어 서야 했다. 차량은 아니다. 차량은 모두 검문을 받기 때문에 차량을 이용할 리가 없다.
오검사네 팀에서 예상하지 못한 때에 자신의 흔적을 쫓았기 때문에 미처 달아날 틈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프리랜서답지 않게 검문하는 경찰을 제압해서 자신을 드러내야만 했다.
골목이 이어져 있는 교차로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올망졸망한 주택가 너머로 고층의 오피스텔들이 줄줄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 앞까지는 끝없이 이어진 골목길이었다. 한쪽은 첨단 도시의 상징인 빌딩 숲이고, 한쪽은 외노자들과 중국교포들로 가득한 닭장촌이다.
교차로에 서 있는 경찰들이 보였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지금 막 지나치는 자신조차 잡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은색 트레이닝복만 열심히 찾는 모양이다.
비옷을 입은 배달부 하나가 오토바이를 몰고 다가왔다. 뒤에는 배달통이 실려 있었다. 놀라서 품속의 총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쓴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걸었다. 프리랜서도 완벽하지 않다. 그걸 오늘 증명했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상황은 역시 다른 제삼국가들과 다르다. 치안이 안정되어 있는 나라여서 프리랜서라고 해도 자신을 드러낸 이상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오늘은 잡지 못했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성하는 오토바이 백미러로 새로 나타난 상대를 보면서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그동안 다른 데에 신경 쓰느라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몰랐다. 그러니까 방해꾼들은 늘어나고 자신은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꼴이다.
더 잡아 흔들어야겠군.
성하는 배달통을 들고 연립주택의 계단을 힘차게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