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가 지면서 비가 눈으로 변했다. 예상 밖의 눈에 도심은 엉망이 되었다. 도로 한복판에서 차들이 우왕좌왕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힘을 잃은 신호등으로는 해결하지 못해서 교차로마다 교통경찰들이 호각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제대로 돌아가는 건 광고판과 네온싸인들뿐이었다. 도시는 기계만 제대로 작동하는 미지의 세계 같았다.

일산경찰서의 강력팀 형사 진구는 싸구려 패딩을 여며입고 경찰서를 나섰다. 이렇게 추울 줄 모르고 대충 입고 나왔다. 2 월인데 눈이라니. 하늘이 미쳤나. 그래도 오랜만에 야간 근무가 없어서 느긋하고 헐렁한 느낌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뭐해? 빨리 안 오고?”
“지금 갑니다. 오랜만에 쉬시는데, 집에는 안 가세요?”
“너랑 딱 한 잔만 하고 갈 거니까 오기나 해.”
전화를 끊고 눈보라를 헤치면서 바쁘게 시장 골목으로 달렸다. 날씨 탓으로 시장통은 개점휴업이나 같았다. 이미 장사를 포기하고 문을 닫는 집들도 여럿 눈에 뜨였다.
좋구만. 이런 날은 범죄도 덜 일어난다. 악천후 속에서 열심히 움직일 정도로 부지런한 놈이면 범죄로 먹고 살지 않지.
시장 골목에서 문을 연 집들은 하나같이 술을 마실 만한 집들이었다. 순댓국집, 감자탕집, 삼겹살집, 횟집. 그 가운데 돼지국밥집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가득한 데다가 안팎의 온도 차이로 인해 식당 안은 뿌옇게 김이 서려있었다. 게다가 좁은 식당 안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노인네들 탓에 눈과 코가 따가웠다.
“여기.”
팽반장은 머릿고기와 술국을 앞에 놓고 벌써 소주 몇잔을 마신 상태였다. 진구는 앞에 가서 앉으며 흰소리를 했다.
“며칠 집에 못 들어가셨잖아요? 오랜만에 시간 나셨으면서 사모님한테 안 가세요?”
“왜 안 가겠냐? 나 환영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뿐인데.”
“확실해요?”
“뭐가?”
“사모님께서 환영해주냐고요.”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인마. 내가 다른 데서는 인기 없어도 마누라한테만은 인기 짱이야. 인마.”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이 너무 가깝게 있어서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술꾼들의 헛소리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좌우의 대립으로 격앙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교과서 검정은 보수진영의 승리로 끝이 난 것 같습니다. 특히 그동안 힘든 싸움을 해왔다는 자유희망포럼으로서는 오랜만에 이룬 결과로 들뜬 분위기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교과서들이 줄줄이 제책되어 나오는 모습과 그중 하나를 집어든 리포터의 모습이 비쳤다.
‘보수 진영의 주장을 반영한 교과서는 이제 제책을 마무리하고 올해부터 팔십여 개의 고등학교에 채택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팽반장이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인생에 보탬 안 되는 것 가지고 싸움박질들은…”
“싸우는 거 보기도 지겹죠?”
텔레비전에서는 이제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를 하는 전교조의 모습과 그에 맞서서 맞불시위를 하고 학술대회를 여는 보수 진영 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학교 폭력이나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팽반장은 열심히 술국을 퍼먹었다.
“적당히 드시고 사모님이 해주시는 저녁 드세요.”
“야. 밖을 봐라. 일찍 갈 수나 있겠냐? 가다가 굶어죽겠다.”
정말 창밖에서는 눈보라가 골목 안에까지 무섭게 들이치고 있었다.
“지하철 타세요.”
“그래야겠다.”
팽반장이 흘끗 진구를 쳐다보았다.
“넌 데이트 안 하냐?”
“짤렸어요.”
진구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짤려? 연애가 무슨 직장생활이냐? 짤리게?”
“전 직장에서는 안 짤려요. 그런데…”
“에구. 못난 놈.”
피식 웃으면서 술잔을 드는데, 갑자기 주변이 술렁였다. 뭐지? 모두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쏠리고 있었다. 식당 주인이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다. 뉴스 속보가 쏟아져 나왔다.
‘삼십 분 전, 그러니까 여덟 시 오 분에 일어난 폭발로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화면에서는 소방차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고, 냇가를 끼고 있는 커다란 창고에서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불난 거야?”
“어디야?”
“광탄 아냐?”
“어디?”
“광탄이라니까?”
팽반장도 진구도 무슨 일인가 해서 바라보았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창고의 모습이 보였다.
‘목격자들의 말로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늦은 시간이라 다행히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강한 폭발이어서 십여 동에 달하는 창고가 모두 부서지고 불길을 잡는 데에도 애를 먹고 있습니다.’
“광탄이 어디냐?”
“광탄도 몰라요? 우리 관내인데?”
“뭐가 우리 관내야?”
팽반장은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뭘 놔두는 창고길래 저렇게 불이 난 거야?”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방으로 날리는 책들의 잔해가 보였다.
‘이 창고는 이번에 새로 인쇄된 교과서들이 보관되어 있던 창고라고 합니다. 이번 학기를 대비해서 제책까지 마친 책들로 ’자유희망포럼‘의 교과서들이었습니다.’
기자는 눈보라 속에서 창고를 배경으로 열심히 떠들었다.
‘이번에 폭발을 일으킨 창고들은 모두 아홉 동으로 동시에 아홉 동이 폭발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로 보아서 테러의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팽반장이 진구를 돌아보았다.
“우리 관내라고?”
“광탄이잖아요? 우리 관내에서 고개 하나 넘어가면 나오잖아요?”
“공동묘지 말하는 거냐?”
“옛날이야기죠. 지금은 개발해서 많이 없어졌어요.”
순간, 팽반장과 진구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현장은 화재사고 현장에서, 불과 두 시간 만에 테러 사건 현장으로 바뀌었다. 팽반장과 진구도 정신없이 현장으로 달려 나가야 했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경찰서로 가서 당직을 서던 동료 형사의 차에 동승하고 현장으로 나갔다.
현장은 이제 불길이 잡혀서 소방차들이 철수하고 경찰들이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현장 입구는 방송차량과 기자들과 경찰들로 북적였다.
아홉 동의 창고들은 남김없이 완파되었다. 발화성이 강한 물질이 채워져 있었던 듯 순식간에 불길이 일어나면서 내용물들이 거의 다 타버린 상태였다.
“황당한데요?”
진구는 감식반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방화가 확실하네.”
“방화 정도가 아니죠. 폭약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홉 개 창고가 동시에 터지도록 폭약을 장치하고 안에 잔뜩 발화성 물질을 뿌려서 내용물들을 남김없이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다.
다행인 것은 불길이 삽시간에 무시무시하게 일어났지만, 사방이 묘지로 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불길은 번져나가지 않았다. 대신 내용물은 일부라도 남겨지지 않고 완벽하게 불타버렸다.
“이 정도면 전문가지?”
팽반장이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중얼거렸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다.
“완전 프로죠. 누가 저렇게 완벽한 폭발을 계획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바쁘게 생겼다.”
그때, 검은색 봉고차 한 대가 사건 현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폴리스라인을 넘어 검은 양복의 사나이들이 들어섰다.
“뭐죠?”
진구가 돌아보며 물었다.
“기관 사림들이다.”
팽반장이 낮게 말했다. 아, 보통 사건이 아니구나. 진구는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느꼈다.
“북한에서 저지른 짓일 수도 있다는 거네요.”
“아니면 국내의 좌파 세력이든가.”
팽반장과 진구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현장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검은 양복의 사나이들은 사건 현장에서 경찰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테러라니.”
팽반장이 입술을 혀로 핥았다.



2.

다섯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서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서로 정보를 나누고 회의를 하려고 모였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두진은 부산 시내의 은신처를 찾겠다고 회의를 하던 자신들이 너무 한심했다. 그사이에 범인은 서울로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문제는, 이런 일은 그냥 경찰이나 검찰의 손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런 사건은 공안 사건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정보부에서 개입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렇게 되면 부산에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다. 이제까지 부산에서 검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감춰온 사건인데,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다.
“우리도 서울로 가야 하나요?”
영란이 두진에게 물었다. 두진이 마리와 하라를 돌아보았다.
“프리랜서는 저기 없어요.”
마리가 손을 흔들었다.
“흔히 쓰는 수법이잖아요? 우리를 서울로 쫓아버리려는 거죠.”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 교과서를 날려버리는 짓 따위를 다른 이유 없이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세간의 시선을 끌고, 우리가 더 이상 비밀리에 수사할 수 없게 만들고 있어요.”
“이제는 숨길 수 없는 사건이 된 듯합니다.”
두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상부에 보고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존재도 밝혀야 할지 모릅니다.”
비밀팀도 해체할 시점이다. 모든 걸 걸었지만, 허무하게 끝났다. 프리랜서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허를 찔린 셈이다.
‘네가 감춘다는 말이냐?’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무서운 상대를 만났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거물급 조직폭력배들을 만났지만, 그들과는 부류가 다른 상대라는 걸 새삼 느껴야했다. 왜 모사드가 그를 체포하는 데 실패하고 일 년을 쫓아다녔는지도 이제 알 것 같고, 김중식이 꼼짝 못하고 귀국을 해야했던 이유도 알 것 같다.
“프리랜서가 아직 부산에 있다고 확신합니까?”
“확신해요. 저 폭발은 지금 일어났지만, 폭발하도록 장치를 한 것까지 지금은 아니죠.”
“그럼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먼저 놈을 잡아야겠군요.”
“그러고 보니 왜 갑자기 검사님을 불렀는지 아직 이야기 안 했네요.”
마리는 태블릿을 두진 앞에 내놓았다. 화면에서 승용차 한대가 여러 번 나타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우리 회사 근처를 매일 와서 감시하고 다시 가버리는 차예요. 카메라 각도에서 우리 회사가 보이는 건 우리 요원들이 잠복했다가 찍어서죠.”
마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두진에게 요원들의 실체를 말해주지 않았다.
“차를 운전한 사람은?”
“다음 화면을 보세요.”
차에서 내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차에서 가끔 내려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오고는 했다. 사내의 모습을 당겨보자, 기대하던 인물은 아니었다.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두 사내였는데, 언제나 하나는 차에 남고 다른 하나는 차에서 나가 사라졌다. 시간은 3 일 전부터 시간 단위로 계속되었는데, 오늘 오전 10 시로 끊어졌다.
“오늘 오전 10 시 이후는 없습니까?”
“오전 10 시에 마지막으로 찍힌 다음, 차량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두진이 대운에게 말했다.
“차 넘버로 수배해 봐.”
대운은 전화를 걸었다. 차적 조회를 하고, 각 교통통제소에 연락해서 차량을 수배하도록 협조를 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 요원들이 차량을 추적하고 있어요. 곧 연락이 올 거예요.”
마리의 이야기에 두진은 문득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에서 그런 게 가능한가 생각했다. 특히 하라에 대해서 상당한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한일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넥션 안에 끼어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일본 쪽에서는 들어온 정보가 없습니까?”
하라가 고개를 저었다.
“조용합니다. 살인사건들은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묻혀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걸까요?”
“한국과 같은 상황 아니겠습니까? 정치권이나, 우익단체들이 함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매스컴도 한몫하는군요?”
“뭐, 그런 면에서는 한국처럼 통제가 잘되는 곳이 일본입니다.”
두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사무실은 오늘부로 폐쇄하겠습니다.”
마리와 하라가 멈칫 두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공개수사로 전환하겠습니다.”
두진은 영란과 대운에게 나가자고 눈짓을 보냈다. 그러고는 마리와 하라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차피 이제 비밀리에 사무실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와서 이들에게 더 얻을 것도 없고, 오히려 이들을 수사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부에 보고를 해야만 할 시점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동안의 수고가 아깝더라도 모든 수사 상황을 공개할 수밖에 없다.
복도를 걷다가 말없이 뒤를 따라오는 영란과 대운을 돌아보았다. 이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동안의 자료들을 정리하고 폐기할 것들을 폐기했다. 대운도 영란도 아무 말 없이 정리를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가 수사한 것들을 모두 밝힐 거야. 그래도 두 사람은 입에 올리지 않을 거니까 걱정들 말고 태연히 수사반으로 돌아가.”
영란과 대운이 일손을 멈추고 두진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그동안 모은 증거들이 꽤 되니까 헛수고를 한 건 아니야. 적어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았잖아.”
“전부 보고하실 작정이신가요?”
영란이 물었다.
“그래야지. 특히 김중식이 살아 있더라는 걸 보고해야 해. 이제 감출 수가 없잖아.”
“그 결과가 무섭지 않으세요?”
“무슨 뜻이야?”
“김중식이 죽었다고 발표한 경찰이나 검찰의 배후는 없는 걸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두진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진실은 진실이야. 그리고 범죄가 있었고, 비호세력이 있었다면, 그걸 밝히고 법정에 세우는 건 우리들의 일이야. 우리는 그걸로 국민들한테 월급 받는 거 아닌가?”
“그건 그냥 이론 아닙니까?”
대운이 우울하게 말했다.
“법이라는 게 그렇게 명쾌하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법의 문제인가? 그건 능력의 문제야. 우리 무능을 탓해야지. 법을 운용하는 우리들에게 있는 문제야. 법이 잘못된 게 아니야.”
두진은 두 사람을 앞에 놓고 자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문제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 관한 문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버젓이 살아있는 자를 부검하고, 결과적으로 김중식은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장례까지 치를 수 있을까.
“그래도 난 포기하지는 않는다.”
두진은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3.

승용차는 중앙동에 있는 작은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작은 무역회사들이 가득한 빌딩에는 작고 엉성한 싸구려 간판들이 가득했다. 주로 오퍼상들이나, 일반 소기업들의 수출입을 리스해주는 사무실들로 가득한 빌딩이다.
밤이 깊어서 지하주차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차들이 많이 빠져서 빈자리도 많았다. 승용차는 구석진 자리에 주차되었다.
사내 둘이 내려섰다. 점퍼 차림의 두 사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곧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두 사내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도시형자전거를 탄 세 사내가 스르르 들어왔다. 하나같이 사이클용 헬멧을 쓰고 등에도 싸이클용 케이스를 멘 모습이었다. 노란색 스포츠 고글 속의 눈동자들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세 대의 자전거는 방금 들어 선 승용차의 주변으로 접근했다.
곧 그들은 자전거에서 내리고, 한 사내는 승용차의 앞문을 향해 다가가고, 나머지 두 사내는 주변을 경계하며 섰다. 전문가들인지, 승용차의 앞문이 쉽게 열렸다. 사내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네비게이션을 떼어내서 무언가 조작을 하는 중이었다. 손놀림이 상당히 빨랐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사이드미러를 보게 되었다. 동료들의 모습 뒤에 언뜻 사람 그림자가 비친 것 같았다.
사내가 유리창을 내리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자기 동료들이 목을 잡고 쓰러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피가 확 번지면서 승용차 뒷유리창까지 튀었다. 사내는 당황해서 승용차로부터 뛰어내렸다. 등에 멘 케이스를 끌러서 조수석에 펼쳐놓았지만, 그런 걸 챙길 여유는 없었다. 허리춤에서 뾰족한 단검을 꺼내면서 바깥 방향으로 튀어나왔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동료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목에는 칼이 스친 듯 경동맥이 잘려서 피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빨리 도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랜서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사내는 바쁘게 조수석으로 달려들어서 백팩을 챙기고 세워두었던 자전거로 갔다. 그리고 자전거에 오르는 순간, 앞쪽에 나타나 선 프리랜서를 보았다. 사내의 눈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두진에게 연락이 온 것은 새벽 두 시경이었다. 수배차량을 찾았는데, 그냥 찾은 것이 아니라, 살인사건 현장이라고 했다. 현장을 나가자, 이미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주변이 통제 된 상태였다. 그리고 영란과 대운이 나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경비원이 발견해서 신고했습니다.”
대운이 대답했다. 공반장이 다른 수사관들과 함께 나타났다. 두진을 보고 인사하는 공반장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 눈빛만으로도 공반장이 이미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무언가 다른 선이 공반장에게 닿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사질을 오래하면 알아지는 게 있는 법이다. 애써 무시하고 영란에게 말했다.
“감식반은?”
영란이 경찰과 대화하다가 말고 차 안을 가리켰다. 차 안에서 감식반원이 지문을 뜨고 있었다.
“이 차 주인들은 안 나타났나?”
“경비원 말로는 누군지 모른답니다.”
“주차증이 있을 텐데 왜 몰라?”
“이 빌딩 차량이 아닌데, 밤에만 와서 대어놓는 것 같다는데요?”
죽은 작자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상을 빗나가는 게 있다. 마리의 사무실을 감시하던 작자들이 기관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인가? 칼을 쓴 수법이 해운대, 연산동과 같지 않은가? 프리랜서가 나타나서 해치우고 간 거라는 말이 아닌가?
다른 경찰과 대화하던 영란이 다가왔다.
“도난차량이랍니다.”
“네비게이션에서 카드 빼.”
영란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영란이 눈치 채고 대운을 돌아보았다. 대운이 차량으로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감식반 분들, 검사님께서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차량 밖에 서있던 감식반원이 두진을 돌아보았다. 대운이 차를 탕탕 두드렸다.
“나오시라고요. 검사님께서 부르시잖아요?”
차량 안에서 감식반원이 뚱해진 얼굴로 나왔다. 두진은 손짓하면서 재촉했다.
“이리들 좀 와봐요.”
감식반원들이 두진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에 대운이 차량으로 들어갔다. 두진은 감식반원들과 주변의 눈길을 끄느라 이런저런 헛소리를 했다.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하고 잔소리도 했다. 공반장이 왜 이러나 싶은 시선으로 두진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대운이 영란에게 작은 카드를 넘기는 게 보였다.
두진이 공반장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반장님은 어떻게 연락 받고 오셨어요?”
“아, 예. 수사반에 연락이 와서…”
“누가 연락했어요?”
공반장이 애매하게 두진을 쳐다보았다. 두진이 싱긋 웃었다.
“줄 잘 서시는 건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검사줄이 낫지 않겠습니까?”
“예?”
공반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두진을 바라보았다. 두진은 고개를 돌려서 영란에게 소리쳤다.
“김팀장은 뭘 그렇게 꾸물대나? 어서 정리하고 본부로 가야지!”
“예. 곧 갑니다.”
영란과 대운이 알아듣고 승용차로 달려갔다. 두진이 공반장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여기 정리 좀 잘하고 오세요. 난 저 친구들 차 얻어 타고 퇴근해야겠습니다.”
공반장이 어? 하는 사이에 두진이 영란의 차를 향해 달려갔다.
“김팀장! 가는 길에 나 좀 집에 태워줘!”
영란이 차에 타자 대운이 물었다.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택시 타고 왔어.”
대운이 조수석에 타고 두진은 뒷자리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면서 보니, 공반장이 똥 씹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드 좀 넣어봐라.”
대운이 영란의 차 네비게이션에서 카드를 빼고 대신 빼돌린 카드를 꽂았다. 그리고 네비케이션을 켜서 지난 행적들을 추적하면서 갔던 곳들을 베끼기 시작했다.
“어?”
대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거… 이상한데요? 행적이 전혀 마리 쪽 사람들이 찍은 사진의 행적하고 다른데요?”
대운이 베끼던 주소들을 내밀었다.
“뭐? 죽은 작자들이 마리네 작자들 확실하지 않겠냐?”
“확실하죠. 뭐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두진은 영란에게 말했다.
“마리하고 통화 했지?”
“마리가 먼저 전화를 해왔어요. 자기네 요원들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쩐다는 거야?”
“그 부분은 말하지 않던데요?”
그렇겠지. 먼저 단절을 통보했으니까 저들도 그렇게 나오겠지.
“수사 상황 잘 체크해. 그리고 남형사, 뭐가 다르다는 거야?”
“보세요.”
행적을 보았다. 행적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주로 다닌 곳을 체크하니, 회사원 같았다.
“이건… 엉뚱하잖아?”
“예. 그냥 평범한 어느 회사원의 동선입니다. 시내에 있는 회사와 집이 홈으로 설정되어 있는데요?”
“바꿔치기했겠지. 프리랜서가 우리 근처에 있어. 우리 바로 코앞에 있는 거야.”
“그럼 결국 기관원들을 미행하던 마리네 협력자들이 원하던 걸 프리랜서가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네요.”
“네비게이션에 다른 건 없는 건가?”
“좀 끼어 있기도 한데요? 공장 지대에 간 것도 있고요.”
“공단?”
“예. 주로 장림공단으로 갔는데요? 다대포 방면에 많이 갔어요.”
공단이라는 말에 두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영란이 한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말했다.
“어디 세운 거야?”
영란이 돌아보며 웃었다.
“우리 집이예요. 부모님 시골 가셔서 아무도 없어요.”
“무슨 소리야?”
“사무실 옮긴 거죠. 뭐.”
“사무실이라니? 해체하라고 했잖아?”
“해체하게 될 것 같지 않아서요.”
영란이 진지한 눈빛으로 두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을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눈앞에 있는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공개수사로 전환하는데, 포기하다니?”
“포기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빠지라고 했더니, 더 끼어드는 거야?”
“이제 와서요?”
“한배 탔다고 하셨잖아요?”
두진은 영란과 대운의 눈빛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끝까지 가도 혼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같이 죽겠다고 하니, 받아들여야할지 밀어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서 정리해야죠?”
대운이 재촉했다. 두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제쳐두고,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 해보자.”
두진은 차에서 내렸다.
“죽겠다고 달려드는데 어쩌겠냐?”
영란이 차에서 내려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왜 죽어요?”
“세상이 우릴 죽일 수도 있고, 프리랜서가 죽일 수도 있지.”
“그런 건 직업상 달고 사는 거잖아요?”
영란이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돌아보며 웃었다. 두진이 어이없어서 마주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4.

중식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멀거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뉴스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이 중계되는 것은 오로지 조직폭력배들의 싸움이라는 것뿐이었다. 경찰과 검찰이 합동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는 웃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급기야 폭발테러가 일어나면서 정국이 초긴장 상태로 들어갔다.
국가정보원과 검찰과 경찰이 합동으로 대책회의를 연다는 뉴스까지 보는데, 성하가 텔레비전을 껐다.
“이제 떠나야 합니다.”
“어디로?”
“어디든. 여기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은 당신을 시체 취급을 하니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제거하려고요.”
“저 마지막 뉴스… 자네가 했나?”
성하는 대꾸하지 않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이라야 언제나 철망 밖에서 박스를 들이고 내가고는 해서 그게 뭐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네가 저 사건을 일으킨 결과가 어떨 것 같나?”
성하가 철망 밖에서 공장의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곧바로 식품운반용 트럭의 뒷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북한의 소행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꼭 제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북쪽에서 저런 짓을 왜 해?”
“북한이 저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한 백 가지쯤 되던데요?”
“그거야 분석가랍시고, 출연료로 먹고 사는 작자들이 헛소리를 하는 거지.”
성하가 박스를 다 싣고 철망 안으로 들어오며 웃었다.
“그래도 다들 유식하던데요? 특히 탈북하신 분들은 북한 수뇌부의 사정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더군요. 시골에서 배를 곯다가 탈출한 사람들도 엄청난 정보를 알고 왔더군요.”
“그게 말이 되나? 그냥 소문을 말하는 거지. 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도 상층부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데, 그런 통제사회에서 뭘 알겠어?”
“그런가요?”
성하가 수갑을 풀어주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일세. 겉으로는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치안이 뛰어나기로 세계에서 알아주는 몇 안 되는 국가일세.”
“충분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총기 하나 구할 곳이 없더군요.”
성하가 이끄는 대로 나가서 트럭에 올랐다. 성하가 문을 닫기 전에 생수를 두 개 넣어주었다.
“좀 멀리 갑니다.”
“소변은?”
“생수병이 있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성하가 철컹 문을 닫았다.

두진은 영란의 집에서 대운과 함께 다시 사무실을 열었다. 이미 모든 자료와 노트북이 옮겨져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네비게이션의 장소를 전부 조회하는 일이다. 모든 곳을 찾을 이유도 없다. 일상적이지 않은 기록은 딱 두 곳, 장림공단과 바닷가였다.
“이 주소들을 가보자.”
“여기 남겨놓을 리가 없잖아요?”
“프리랜서가 카드를 바꿨다면 틀린 거 아닌가요?”
“아니지. 생각을 해 봐. 그냥 빼간 게 아니라, 일부러 바꿔서 끼워놓았어. 누구 카드든, 바꿔서 꽂은 이유가 있을 거야. 프리랜서는 세상에서 김중식이 살아 있다는 걸 알기를 바라는 게 틀림없어.”
두진은 그렇게 확신했다. 프리랜서는 이미 자신을 인식했다. 그리고 자신들과 접촉한 마리와 하라를 알고 있다. 기관의 감시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중에 누군가를 자기 상대로 선택했다. 그게 우리 팀이다. 네비게이션은 우리의 행동을 예상하고 흘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수배해볼까요?”
“아니. 수배하지 마. 우리가 직접 간다.”
“직접 가요? 위험하지 않겠어요?”
“위험하지 않아.”
두진은 단언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죽이고자 마음먹었으면 우린 벌써 죽었어.”

차를 몰고 장림으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니까 길을 헤맬 이유가 없었다. 공단에서 다대로를 따라 달리다가 장림피혁단지를 지나자, 목적지까지 200 미터라는 안내가 나왔다. 그리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목적지라는 표시가 나왔다.
대운과 영란이 차에서 내리며 권총을 뽑아들었다. 두진은 자기도 총을 가져왔어야 하나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셋 모두 긴장했다.
대운이 베테랑 형사답게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로 표시되었던 공장 앞으로 가서 문 옆에 착 달라붙었다. 공장은 불이 꺼져있었고, 간판은 금양정밀이었다. 인기척도 없고 공장이 돌아가는 흔적도 없었다. 그에 비해서 주변 공장들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영란이 반대편에 가서 달라붙었다. 두진이 살펴보니, 문에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지만, 잠겨 있지 않았다. 커다란 기계들이 많이 들락대는 공장들이 흔히 쓰는 미닫이로 된 커다란 문이었다.
“열려 있다.”
두진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문을 드르륵 밀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안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이 꺼져 있었지만, 주변의 공장들이 워낙 불을 강하게 밝혀놓아서 안을 보는데 어렵지 않았다.
대운과 영란이 총을 겨누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두진은 태연히 그냥 서서 안을 바라보았다. 위험은 이미 없다. 폭발물을 설치해놓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만일을 생각해서 문을 잠가 놓았을 것이다.
“우리를 초대한 거야.”
두진은 쓴 입맛을 다시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원하는 건 여기 전부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식사도구라든가, 혹은 사람을 묶어두었던 의자와 갖가지 생활도구까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무기가 될 만한 종류였다. 폭약이라든가, 칼 같은 종류는 없었다. 특이한 것은 사람이 묶여있었던 흔적 바로 앞에 덩그러니 텔레비전이 있다는 거였다.
두진이 가서 텔레비전에 손을 대려고 하자, 대운이 말렸다.
“검사님. 위험합니다.”
“안 위험해.”
두진은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이 켜지면서 뉴스채널이 나왔다. 스물네 시간 뉴스가 나오는 채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문득, 텔레비전 옆에 놓인 작은 USB가 눈에 띄었다. 두진이 가서 USB를 집었다.
“이거 텔레비전에서 나오지?”
“예. 요즘은 전부 스마트티비니까요.”
“꽂아 봐.”
대운이 USB를 텔레비전의 뒷부분에 꽂았다. 그리고 외부입력에서 USB를 찾아서 돌리자, 화면에 김중식이 묶여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김중식씨?’
화면 속에 나타나지 않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넌 누구야?’
중식이 불안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질문에 답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중식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고, 수갑이 채워진 손목을 흔들어 보았다.
‘죽을 뻔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내가 어렵게 당신을 구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누군지 알아야 감사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아직 자세가 되어있지 않군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가 아직 할일도 있고 해서요.’
중식은 잠시 시무룩하게 있었다. 그때,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중식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난 너희들 같은 싸구려들을 잘 몰라. 그래서 묻는 거야. 궁금한 게 있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어. 이런 짓도 재미는 있으니까.’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씨, 씨발…’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중식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심리적인 고통이 확연해보였다. 비명이 잦아들고 힘없는 신음으로 바뀌었다.
‘일본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어. 가자지구를 지키던 이스라엘 군인 출신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
‘뭐?’
‘거기 이런 게 나와. 자기들은 나쁜 사람이 아닌데, 보초를 서다 보면 손에 총이 쥐어져 있고 심심하고 무료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쏘았다고 말이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니까. 쏘아 죽여도 아무도 뭐라고 나무라지 않으니까. 그리고는 날이 밝으면 나쁜 짓이니까 다시는 안 하겠다고 결심한다는 거야. 그런데 그게 중독성이 있어서 다음 날 밤에 보초를 서면 또 쏘게 된다는 거야. 그리고 자꾸 반복하게 되는데, 도저히 그칠 수가 없더라는 거야.’
‘미, 미친놈…’
‘미친놈이 아니라니까? 지금은 전역하고 아주 잘 지내고 있어. 평범하게.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 미친놈아.’
‘나도 미친놈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세. 고문기술자들도 대부분 그냥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고문을 해보면 그 맛에 중독되어서 절대로 끊지 못하지.’
다시 비명이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식은 진저리를 쳤다. 울부짖는 소리, 신음, 고통에 찬 비명소리.
‘차라리 죽여라.’
‘싫은데? 고문 기술의 기본이야. 죽이지 않는 건.’
‘뭘 원하는 거냐?’
‘난 무례한 놈이 싫어.’
‘뭘 원하세요?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흑흑 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나직하고 차가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직 손은 멀쩡하니까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럴게요.’
‘적어. 주소 이름 연락처를 적는데, 네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적는 거야. 내 마음에 들게 적어.’
‘적으면 사는 거요?’
‘모르지. 하지만 당장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 내 재미를 빼앗는 거지만 그 정도는 양보할게.’
장면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 이어졌다. 중식이 긴장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뭘 적는지 안 알려주는구만.”
화면을 보다가 두진이 투덜거렸다. 그때, 밖에서 차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도 들려왔다. 두진이 놀라서 일어났다.
“USB 챙겨.”
대운이 재빨리 텔레비전으로 달려가서 USB를 빼서 두진에게 건넸다. 두진이 주머니에 USB를 챙기는 순간, 우르르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뭐요?”
대운이 나서면서 물었다. 사내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면서 대운을 무시하고 두진에게 직접 물었다.
“오검사님이시죠?”
“그런데?”
사내가 싱긋 웃었다.
“우리가 한 발 늦었네요?”
“어디서 왔소?”
사내가 밖을 가리켰다.
“차에서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아는 분이실 겁니다.”
영란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앙칼지게 말했다.
“보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해요. 건방지게 검사님을 오라 가라 해요?”
“그분도 검사님이신데요? 부장검사님.”
대운과 영란이 멈칫 두진을 돌아보았다. 두진은 대운과 영란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기는 우리 현장이야. 알지? 누가 뭐라든 우리 일 해. 증거 하나라도 빠뜨리면 죽을 줄 알아?”
두진은 사내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승용차를 향해 걸어갔다. 뒷좌석에 부장검사가 굳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차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흘끗 돌아보는 눈매가 몹시 마음이 상했다는 표시로 보인다.
“오검사. 여기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거 좀 어색하지 않아?”
“예. 미처 보고드리지 못했습니다.”
“오검사가 내 사람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 연락 받고 와야 하나?”
“직접 사건 현장에 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오늘 들어가서 보고 드리려고 했는데요.”
“그동안 보고서 올린 것 말이야. 제대로 올린 것 맞아?”
“확실하지 않은 것만 빼면 다 올렸습니다.”
부장검사는 잠시 말없이 두진을 흘겨보았다. 두진은 이상하게 담담한 느낌이었다. 겁나지 않았다. 어차피 프리랜서로 인해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이라는 각오가 생겼다.
“저 사람들 누굽니까?”
“몰라서 물어?”
“아, 예.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자네 데리러 왔지. 명색이 대한민국 검사인데, 다른 기관 사람들하고 실랑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 사람들이 전화했습니까?”
“아니. 더 높은 곳에서 전화가 왔더군. 오검사 이야기를 했어.”
“제 이야기라면…?”
“이번 사건에서 손 떼게.”
각오한 말이 나왔다.
“더 나아가면 좋을 게 없어.”
“제가 손을 떼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오검사, 주변 정리를 좀 해야겠어. 감찰반에서 오검사 이야기를 좀 하던데 말이야.”
“감찰반에서요?”
두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만두게 하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들 나오시네. 부장검사가 눈을 치켜떴다.
“우습나? 우스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무슨 부정이라도 했다고 합니까?”
“내일 이야기하세. 어차피 감찰반에서 오검사한테 직접 연락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오검사는 차문을 열었다. 부장검사가 놀라서 쳐다보았다. 문을 닫기 전에 말했다.
“정식으로 발령 나기 전에는 제가 담당입니다. 마무리하고 귀가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문을 닫고 다시 현장으로 걸어갔다. 털면 나올 게 있겠지 싶다.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잡았을 것이다. 상관없다. 알고 저지른 일이다.
미안하지만, 선전포고를 한 거라면, 이참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입맛이 쓰다. 정작 우리 사회 전체가 선전포고를 받은 건 아닐까 싶었다. 프리랜서로부터.
현장에 다가가자, 사내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사내들을 밀치고 들어가면서 짜증을 냈다.
“범죄현장이니까 다들 나가요. 기관원이라고 아무 데나 밀고 들어와서 게기면 쓰나?”
사내들이 황당해서 앞서 말을 걸었던 사내를 돌아보았다. 예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 나가자고 손짓했다.
“비켜드려라. 검사님 수사 하셔야지.”
사내들이 두진을 흘겨보면서 공장 밖으로 나갔다. 영란과 대운은 한쪽에 서서 두진을 바라보았다. 두진이 대운에게 말했다.
“종이 없어?”
영란이 슬쩍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두진이 알아듣고 큰소리로 말했다.
“뭐해? 감식반 안 불러?”